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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사단장 띤소장은 이렇게 포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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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군기자 작성일13-07-29 21:47 조회2,4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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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해방전쟁사에서 특출한 지위를 차지하는 대전해방전투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전투가 세계를 놀래우는 충격적인 사변으로 더욱 유명해지게 된것은 《상승사단》으로 불리우던 미24사단이 정규군으로 개편된지 2년밖에 안되는 청소한 조선인민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섬멸되고 미군력사상 처음으로 사단장이 포로되였기때문이다.

이미 력사에 공인된 띤과 그의 사단의 괴멸에 대하여 우리가 다시 론하게 된것은 최근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이 《잊혀진 승리》니 뭐니 하면서 펼쳐놓고있는 조선전쟁의 진실을 오도하고 외곡하는 모략극의 주역의 하나로 바로 미24사단이 등장하였기때문이다. 미국은 조선전쟁에 내몰리였던 이 사단의 고용병들을 찬양하는 기념물을 알링톤국립묘지에 설치한다 어쩐다 하면서 희비극을 연출하고있다.

력사는 미24사단에, 미국에 이렇게 따져묻고있다.

한사람도 아니고 한개 사단의 발자욱을 어떻게 지워버리겠는가?

《잊혀진 승리》인가 아니면 《잊어버린 패전의 교훈》인가?

 

괴멸

 

언제인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을 찾으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전해방전투에 대한 대형전경화의 사상예술성과 창조적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원래 대전해방전투자체가 대작이지만 이 전경화도 대작이라고 치하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뜻깊은 교시에는 대전해방전투의 거대한 군사예술적가치에 대한 평가만이 담겨져있지 않다.

조선전쟁이 《이후전쟁의 표본》이라는 세상사람들의 말을 빈다면 대전해방전투는 조선전쟁의 축소판이라고 말할수 있다. 대전해방전투는 영웅조선이 세계앞에 첫 대걸작품으로 내놓은 《미군의 비극》이였다.

대전시는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의하여 서울에서 쫓겨난 적들이 《림시수도》로 정하고 리승만괴뢰통치기관들과 미8군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적들의 교통의 중심지이며 전략적거점이였다.

전쟁도발후 보름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금강이남으로 쫓겨간 적들은 금강과 소백산줄기의 유리한 자연장애를 리용하여 아군의 반공격을 저지시켜 대전을 사수해보려고 최후발악하였다. 여기에서 주역을 논것이 바로 패전을 모르는 《상승사단》으로 명성을 떨쳤다는 미24사단이였다.

미24사단은 일찌기 미국에서 독립전쟁과 남북전쟁때부터 싸움을 잘하여 《명성을 떨친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었다. 이 사단은 일제패망후 일본에 주둔해있으면서 조선의 지형과 기후조건에 적응한 전투훈련과 경험을 쌓았다.

띤은 제2차 세계대전시기 유럽에서 사단장으로 싸웠으며 필리핀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마닐라에 입성한것으로 하여 유명해졌다. 또한 그는 이미 전쟁전에 남조선의 군정장관으로 있으면서 조선인민에게 용납할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자였다.

《스미스특공대》의 괴멸로 이미 오산계선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사단장 띤은 불안감을 감출수 없었다.

미군 2개 사단의 병력이면 사태를 역전시켜 퇴각으로부터 공세로 이전하게 될것이라고 장담했던 맥아더는 1주일만에 《조선의 전황은 중대화》되고있다고 비명을 올리면서 《이미 요구한 병력외에 다시 4개 사단으로 된 1개 군을 긴급증원할것을 강하게 요청한다.》고 워싱톤에 제기하였다.

금강 남쪽계선에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그 어떤 강적과 맞다든다 해도 《3년간은 문제없이 지탱할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미24사단은 전혀 예측 못했던 치명적타격을 받게 되였다. 조선에서 력사에 없는 《…가장 영웅적이며 로련한 진지확보 및 방어전투》가 벌어질것이라고 요란스레 선전했던 《불퇴의 선》, 《최종방어선》이 단 이틀만에 허물어졌던것이다. 사단의 운명은 공주방면의 제34보병련대의 격파와 금강방어의 주력이였던 19보병련대(《바위련대》)의 각개격파괴멸로 더는 걷잡을수 없는 내리막길에 들어서고말았다.

일본의 한 군사전문가는 인민군대의 금강도하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북조선의 제3, 제4사단들은 군의 주공으로서 미24사를 급속히 추격하고있었는데 미군의 기도를 포착하고 이튿날인 14일에 금강을 기습도하하여 우선 공주방면의 미34련대를 격파하였으며 이어 16일에는 대평리정면의 미19련대를 혼란시켰다. 이러한 전투들에서 북조선군대는 언제나 미군방어진지의 짬새로 침투하여 그 후방을 습격하였으며 혹은 그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북조선군대는 미군이 일찌기 맞다들어본적이 없는 정면공격과 기습전 등 두가지 전법을 구사하는 맞서 싸우기 힘든 상대였다.》

대전해방전투의 서곡인 금강도하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7월 16일 몸소 전선사령부로 나오시였다.

전선사령부 작전회의를 소집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금강을 도하한 모든 련합부대들은 금강 남쪽기슭의 적방어를 신속히 돌파하고 계속 진격함으로써 미25사단과 미1기병사단이 대전지역에 증원되기 전에 미24사단을 대전지역에서 완전히 포위섬멸할데 대한 작전방침을 제시하시고 대전지역에 있는 적에 대한 포위진을 빨리 치는것과 동시에 포위한 적들을 짧은 시간내에 소멸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대전포위의 공간을 메울 묘술까지 환히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어주신 화살표대로 인민군련합부대는 군종, 병종들간의 긴밀한 협동작전으로 대전에 집결된 적을 압축해나갔다. 대전 동남쪽으로 우회하게 된 제18보병련대 전투원들은 대도로를 따라가도 100여리나 되는 거리를 박격포탄과 식량까지 지고 험준한 산발을 타고 강행군으로 돌파하여 적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7월 20일 새벽, 대전시를 중심으로 한 100㎢의 좁은 지역에 완전히 포위된 미24사단은 드디여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였다.

1950년 7월 20일 새벽 5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전시가에 대한 총공격명령을 내리시였다.

적들의 방어체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미24사단은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그 어떠한 땅크도 파괴할수 있다.》는 설명문까지 붙어있는 바츄카포로 장비하고있던 미34보병련대의 포병놈들은 인민군땅크가 나타나자 포탄 한발 쏴보지 못하고 모두 달아나버렸으며 영동에서 새로 도착한 한개 중대의 땅크병놈들도 싸울 엄두조차 못 내고 도망쳤다.

적들의 지휘체계도 완전히 헝클어졌다. 련대장들은 사단장의 명령을 듣지 않고 사병들은 련대장, 대대장들의 뒤를 쫓아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대전전투에서 《시범을 보여 신뢰를 얻겠다.》고 했던 띤도 무졸장군이 되여 살구멍을 찾아 미친놈처럼 덤벼쳤다.

당시 미24사단장 띤의 련락장교로 있던 한 괴뢰군대령은 그때의 띤의 몰골을 이렇게 썼다.

《잘 자지 못한것으로 하여 눈은 새빨갛게 피져있었다. 얼굴은 해빛에 타고 때로 새까맣게 되여있었다. 팔은 모기에 물려 붉게 부풀어올랐으며 옷은 땀과 먼지로 젖어있었다.》

땅크들을 앞세운 아비규환의 퇴각무리들은 대전-금산사이, 대전-영동사이로 빠져나가보려고 발버둥쳤지만 시내에서 나오는족족 우리 인민군대에게 불마당질당했다.

7월 20일 12시, 미24사단은 괴뢰제1사단, 7사단과 함께 완전히 괴멸되였으며 대전은 해방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50년 7월 23일 대전해방전투에 참가한 인민군부대들에 친히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을 하달하시였다.

《나는 대전해방전투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고상한 애국주의와 무비의 영웅성을 발휘함으로써 빛나는 승리를 쟁취한 인민군병사, 하사관, 군관 및 장령들에게 군사위원회와 최고사령부의 이름으로 감사를 보낸다.》

대전해방전투에서 세운 위훈으로 하여 서울제105땅크사단, 서울제3보병사단, 제18보병련대, 제56추격기련대와 서울제4보병사단에 근위칭호가 수여되였다. 이 전투는 9명의 공화국영웅을 배출하였다. 전원이 전사의 영예훈장 제2급을 수여받은 포병분대도 있었다.

로동신문사 종군기자였던 송학용은 1950년 8월 17일부에 실린 《리승만잔당들이 대전에서 섬멸되던 날》이라는 기사를 이렇게 끝맺었다.

《21일 밤! 비가 내린다. 원쑤들이 더럽힌 대전시가를 깨끗이 씻으려는듯 고요히 비가 내린다.》

원쑤들에게는 패배의 눈물이요, 인민군병사들에게는 가슴속에 터져오르는 승리의 축포와도 같던 그날의 밤비를 대전해방전투에 참가했던 로병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있다.

대전해방전투는 군사작전으로부터 전투행동에 이르기까지, 지휘관으로부터 개별적병사에 이르기까지 적아쌍방의 강약과 승패를 시금석처럼 명백하게 갈라주었다. 승리자가 된 조선인민군 근위사단들이 남진의 길에 오를 때 패배자인 미24사단의 포로병대렬은 북행길에 늘어섰다. 사단의 괴멸과 함께 사단장 띤은 사라졌다.

띤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띤이요》

 

띤이 실종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악관과 국방성의 경악은 극도에 달하였다. 미국이 건국이래 110여차의 침략전쟁을 치르었지만 사단장이 실종된것은 처음이였다. 미국은 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까지 투하하였다.

그러나 띤의 행처는 묘연했다.

적아가 찾던 띤은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띤은 1950년 8월 25일 전라북도 진안지역가까이에서 우리 인민군대에 의하여 체포되였다. 당시 띤이 지닌 소지품은 입고있는 병사복(군모 없음), 군용지도, 골트권총 1정, 군화, 처와 찍은 사진 한장, 손목시계 그리고 밭에서 방금 캔 감자 2알이 전부였다. 이 미군사단장은 36일동안 비참한 방랑생활을 하며 숨어다녔던것이다.

띤이 생포되였을 때 나이에 비하여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몰골의 미군《병사》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를 호송한 인민군병사들은 이 늙수그레한 미군《병사》가 《띤, 띤…》하고 계속 영어로 중얼거리는 꼴을 보고 반정신이 나간 작자가 아닌가고 생각했다고 한다.

전쟁을 앞두고 일본의 주둔지역에서 벌어졌던 가장무도회에 참가하여 옛날식조선량반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던 띤이 그때로부터 불과 두달후 이처럼 허름한 병사복차림으로 포로병이 되여 나타날줄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띤자신이 고백하였다. 《내가 띤이요.》

띤에 대한 당시의 예심기록에는 이렇게 씌여져있다.

《예심원:소속을 말해보라.

띤:미군 24사단 띤소장입니다.

예심원:사단장이 틀림없는가?

띤:틀림없습니다.

예심원:사단장이 호위성원도 없는가?

띤:호위성원은 20여명이였습니다.

예심원:포로된 경위를 말하라.

띤:대전이 포위되면서 경비용차를 타고 남으로 가다가 인민군포병들이 쏜 포탄에 맞아 차가 전복되면서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나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30분정도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운전사의 군복을 갈아입고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산을 내려 도로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다 너무 배가 고파 감자밭에 내려가서 감자를 캐다가 집주인에게 발각되여 그의 신고로 인민군대에 포로되였습니다.

예심원:사단장이 조직한 대전방어계획에 대하여 말하라.

띤:금강을 비롯한 유리한 계선을 리용하여 대전을 중심으로 모든 병력을 4중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삽시에 돌파당하였습니다.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의 높은 지휘능력에 탄복합니다. 나는 인민군대가 중무기로 무장되였다는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대전전투는 조선사람이 조직한 작전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심원:띤, 똑똑히 기억하라. 일본제국주의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

띤:(머리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였다. )

예심원:사단의 전투인원과 장비에 대하여 말하라.

띤:인원은 약 1만 2, 000명이며 사단산하 승용차만 500여대가량 됩니다.

예심원: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적이 있는가?

띤:사단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예심원:전승국사단장인데 정규군으로 개편된지 3년도 안되는 인민군대한테 패전한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띤:약한 군대가 강한 군대한테 지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민군대에 그렇게 유능한 지휘관들이 있는지도 몰랐고 중무기로 무장한지도 몰랐습니다. 인민군대가 이렇게 발전하면 10년만 지나면 (자기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면서) 세계 1등급의 군대가 될것입니다.

예심원:포로된 감상에 대하여 말하라.

띤:나는 올해에 51살인데 일생에 두번째로 기쁜 날이라고 봅니다. 첫번째 기쁜 날은 장가간 날이고 두번째 기쁜 날은 포로된 날입니다.

예심원:포로가 된것이 그렇게 기쁜가?

띤:그것은 포로가 되여 살아있기때문입니다.

예심원:요구할것이 없는가?

띤:(일본말로)죽이지 말아주십시오. …》

띤이 조선전선에 진입하였을 때의 몸무게는 81㎏이였는데 굶주리면서 1개월이상을 방황한 후 포로되였을 때 몸무게는 58㎏이 되였다고 한다.

그가 자기 처한테 보낸 사진 뒤면에는 《미륙군소장 윌리암 에프. 띤. 1950년 9월 4일 대전 남쪽 산중에서 쫓기우는 기간 내가 얼마나 여위였는가를 볼수 있을것이다.》라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1951년 12월 26일부 《로동신문》에는 외국기자들도 포함한 기자단이 포로수용소를 찾아 전 미24사단장 윌리암 에프. 띤소장을 방문하고 이야기를 나눈 취재담이 실렸다.

《…정전담판에서 우리측이 제시한 미영전쟁포로명단에 처음으로 띤의 성명이 공포되였을 때 적측이 받은 충격과 당황한 기색은 격심하였는데 미국내에 일대 센세이숀을 불러일으킨것도 바로 이자이며 또한 정전담판의 원만한 진행을 각종 구실로 방해하며 그의 생존에 관하여 허무한 랑설과 허위선전을 류포하면서 공화국정부의 정당한 포로대우정책을 훼손하며 담판의 순조로운 진행을 저해하려고 기도하고있는 미국인들이 아직도 그의 생존을 의심하고있다는 문제의 인물이 바로 이 사나이인것이다. …》

기자들앞에서 띤은 자기가 포로된 경위를 자세히 언급하였다.

《8월 24일 밤 나는 생콩과 복숭아를 먹으며 20mile가량 걸었다. 그 이튿날 동이 트자 나는 숨을 곳이 없음을 알았다. 그것은 이미 이 지방이 조선인민군의 영향하에 있다는것을 알았기때문이다. 어느 자그마한 촌락을 지나 500yd(1yd는 91. 4㎝)가량 걸어갔을 때 한 조선청년을 만났다.

길가에는 도로보수공사에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40US$를 주마 하고 대구까지 데려다주면 1, 000US$를 더 주겠다고 말하였으나 그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전북 진안에 들어가기 10리전 지점에까지 왔을 때 인민군대와 많은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포박되고 류치장에 감금되였다. …

이날은 나의 일생에 있어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다. 이날은 바로 내가 결혼식을 한 날이였다.》

1953년 9월 3일 유명한 기자 버체트는 미국의 최고직급의 전쟁포로 윌리암 에프. 띤과 회견하고 개성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금년 10월로서 나의 군대생활은 30년이 될것이다. 나는 가정생활로 돌아가 나의 새 손자들과 얼마동안 생활하겠다. 〉라고 그는 나에게 말하였다. 띤은 포로되여있는 동안에 318통의 서한을 받았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포로된 이후 평균 이틀에 3통의 서한을 받은셈이다.

내가 그에게 식사 및 거주형편에 관하여 문의하였을 때 띤은 1951년 12월에 포로들에 관한 정보교환에 뒤이어 서신이 허용된 다음 자기가 맨 처음에 쓴 서한들가운데는 김일성원수에게 드린 서한이 포함되여있었다고 나에게 상기시켰다.》

띤은 자신을 관대히 대우해주는데 대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서한을 드렸다고 거듭 말하였다.

《상승사단》사단장은 전쟁 3년간을 포로수용소에서 보냈다. 그동안 그는 사단과 전쟁의 운명보다도 가족의 안부를 더 걱정하였다.

 

사단군기는 어디로?

 

1950년 10월 5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김광수전사 적의 대부대를 섬멸코 미군사단기를 탈취》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대목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김광수전사는 언제나 주타격부대의 최선두에서 영웅적위훈을 떨치며 전선장병들로부터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다. 대전해방전투에서는 단신으로 미군전차 3대를 격파하였으며 미군 40여명을 사살하고 미군사단기까지 빼앗는 빛나는 위훈을 세웠다.》

기사의 주인공 김광수전사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영웅7중대》로 불리운 근위 제18보병련대 3대대 7중대의 군인이였다.

《조선인민군》신문 2009년 3월 25일부에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김광수전사가 속한 중대 전투원들이 적의 퇴로를 막을데 대한 명령을 받고 1950년 7월 20일 대전-대구간 큰길에서 벌린 매복전투에 대한 상세한 전투기록자료가 실렸다.

《…과감한 중대전투원들의 영웅적행동에 의해 적들은 그야말로 〈불마당질〉을 당하고말았다. 요행 살아남은 놈들은 모두 포로가 되였다.

이날 7중대 전투원들은 적땅크, 장갑차, 자동차 96대, 각종 포 10문을 파괴로획하고 적병 500여명을 살상포로하였다.

그리고 미24사단의 군기와 지난날 놈들이 받은 그 무슨 〈축기〉까지 로획했다. …》

이것은 조국해방전쟁사에 귀중한 력사기록으로 남은 신문기사자료들이다. 부대가 통채로 괴멸되고 사단장까지 포로된 미24사단의 군기가 우리 인민군용사들의 로획품이 된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래동안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서 일해온 학술연구부 라용순부부장, 탁웅연구원, 백옥순연구원의 말에 의하면 유감스럽게도 미군사단의 군기와 축기는 침략자의 기발만 보아도 격분을 참지 못하던 우리 인민군병사들이 불태워버리거나 갈기갈기 찢어 발싸개를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태여 미24사단의 군기의 마지막행처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미군 《상승사단》의 완전괴멸은 누구도 부정하거나 외곡할수 없는 공인된 력사적사실인것이다.

미24사단의 괴멸과 사단장 띤소장이 포로된 사건은 미군력사에 가장 수치스러운 오욕의 한 페지를 기록하였다. 당시 띤의 상관이였던 미8군사령관 워커는 《유명한 사단장을 잃었다. 이것은 대아메리카군의 망신이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고 한다.

미8군사령부와 미극동군사령부는 화약내와 훈장빛으로 금박칠한 띤의 경력과 능력을 믿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전부터 명성떨친 미24사단의 용감성과 풍부한 전투경험을 믿었다. 사단이 전쟁의 정세를 역전시키는데서 주역을 당당히 수행할것이며 대전이 미군의 《강대성》의 신화를 다시금 세상에 떨치는 빛나는 무대가 될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조선전쟁마당은 미군이 《혁혁한 전과》로 《전승국》의 지위를 쉽게 차지하게 한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장터가 아니였다. 단 한차례의 패전도 모른다는 《상승사단》은 조선전쟁터에 발을 들여놓은지 19일만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단장으로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정신육체적으로 완전히 괴멸되고말았다.

포로되기 전에 띤은 인민군대의 맹공격에 당황망조하여 저저마다 도망칠 길을 찾는 부하들을 위협하면서 이렇게 소리쳤었다.

《띤만 있으면 사단은 얼마든지 있다.》

물론 띤은 목숨을 건졌다. 그렇다고 사단이 살아났는가, 사단의 명예가 지켜졌는가?

유명한 24사단의 사단장이 행방불명이 아니라 《영용하게 전사》했으리라고 굳이 믿고싶었던 백악관과 국방성의 간절한 눈길앞에 띤은 해진 병사복을 입은 초췌한 포로병의 몰골로 나타났다. 이것이 조선전쟁에서 우리 인민군대와 맞섰던 미제침략군의 장군이라는자의 모습이였다.

두 군대가 맞서 강약과 승패를 겨루는 전쟁은 결국 군집단을 통솔하는 지휘관들사이의 대결이나 같다. 미국의 장군들이 조선전쟁에서 무참하게 패한것은 그들이 자기의 적수인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너무도 몰랐기때문이다.

조선인민군의 지휘관들중에는 51살의 띤이나 60대의 워커, 70이 넘은 맥아더처럼 요란한 학력과 풍부한 현대전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대전해방전투에서 핵심적역할을 한 인민군지휘관들에게는 미국의 장군들에게는 전혀 없는 특출한 장점이 있었다. 대전해방전투의 주타격전구들을 맡고 활약한 지휘관들은 전설적영웅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밑에 일제의 백만대적과 싸우면서 우리 식의 빨찌산전법을 배우며 성장한 젊은 항일혁명투사들이였다. 대전해방전투를 총지휘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항일혁명투사 강건동지는 16살때부터 손에 총을 잡고 일제와 싸운 32살의 젊은 군사지휘관이였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 구상하신 작전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절대적인 신념, 최고사령부의 명령은 무조건 끝까지 집행해야 한다는 결사관철의 집행정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병사들의 앞장에서 전투장을 종횡무진하는 무비의 용감성,

이것이 미국의 로회한 장군들에게 《패전장군》의 오명을 들씌운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의 사상정신적특질이였다.

3년간의 조선전쟁에서 여러명의 《유엔군사령관》들과 미8군사령관들이 교체되였다. 미국의 어느 한 비밀보고서에는 《지난 조선전쟁은 김일성장군의 전법에 의하여 미국이 패하고 미국의 명장들이 제일 많이 죽고 철직된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씌여져있다.

대전해방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은 30대의 젊으신 령장이시였다.

* *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워보려고 애쓰고있는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에게 우리는 포로된 띤사단장에 대한 예심기록에 있는 한 대목을 다시 읽어주고싶다.

《예심원:전승국사단장인데 정규군으로 개편된지 3년도 안되는 인민군대한테 패전한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띤:약한 군대가 강한 군대한테 지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민군대에 그렇게 유능한 지휘관들이 있는지도 몰랐고 중무기로 무장한지도 몰랐습니다. 인민군대가 이렇게 발전하면 10년만 지나면 세계 1등급의 군대가 될것입니다.》

그때로부터 63년이 흘렀다. 아마도 띤이 살아있었더라면, 그더러 미군장성의 명예를 걸고 오늘의 반미대결전의 현실을 놓고 63년전의 자신의 예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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