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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속보란

1회여성역사기행 7/31-8/4 하루하루를 돌아보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전여대협 작성일04-08-05 20:08 조회2,0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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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경희대로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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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래배우기

‘우리나라’의 노래 ‘달려 달려’와 ‘평화 만들기’를 부르기 쉽게 가르쳐주었어요.



2. 정해은 선생님의 ‘페미니즘 시각으로 바라본 역사’ 강연을 들었습니다.

왜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드러나지 않았는가. 남성에 의한 주류 역사학이 사실은 객관적 사실의 열거가 아니라 각 역사학자들의 가부장적 사고와 관점들이 그 안에 개입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어느 누군가(특히 지배층, 기득권 세력)의 독점된 공간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정말 “전체”의 역사가 되기 위한 시각 넓힘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후 기행에서 보게 될 여성들의 삶을 통해 그녀들이 소위 “공적 영역”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현실 억압을 인지하고, 저항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내주신 토론과제가 두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① 내가 여성으로써 행복했을 때와 ② 싫었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③ 여성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3. 토론 결과 발표 (번호대로 써 보면..)

- 숙소에 모여 조별 토론한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1) 전남대:

    ① 거의 없었던 것 같다.

    ② 싫었던 점은 일상 속 남성에게 의존적인 모습이나 여성이 항상 약한 존재로써 바라봐지고, 인식되는 것 혹은 그런 모습이기를 요구받는 것들...

    ③ 기행을 통해 배우고 싶은 것은 여성 민중에 대한 역사, 그리고 그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았던 삶을 다시 재조명 하는 것.

  2) 경희대:

    ① 군대 안가는 것,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여성으로써 사회의 약자들을 이해할 수 있고, 대변할 수 있다는 것.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등등..

    ② 놀러갔을 때나 농활 갔을 때 빨래 하고 속옷 널기 어렵다. 생리, 생리통.., 항상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

    ③ 여성 힘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진정한 역할 모델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 고대 서창:

    ① 초경을 했을 때 가족들이 축하해주었을 때(케葯 받고, 꽃다발도 받고 .. 그랬어요..^^)

    ② 성적 비하 발언등을 들을 때(어떤 택시 아저씨가 첫 손님이 여자면 그날 하루는 재수가 없다고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승차하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를 보였었다.), 성 차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시각이 언제나 성적 객체로써만 존재할 때

   4) 동아대:

    ① 좋았던 적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여성은 폭력적이지도 않고, 남자들처럼 냄새나지도 않고..(?)

    ② 성적으로만 대하거나 그런 시각

   5) 영남대와 인제대:

    ① 거의 그런 기억이 없다. 있다면..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옷을 스스로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이나 , 혹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 상관 없이 입었을 때

    ② 고등학교 때 교복 치마를 입을 때, 자기네들은 런닝도 입고 돌아다니면서 여자애들이 나시 입는 것 가지고는 뭐라고 할 때, 꼭 학교에서 반장, 부반장, 회장 등을 남자애들만 시키는 것. 군대문화

⇒ 정해은 선생님이 자신의 20~30대에는 여자인 것이 싫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듯이 우리 대부분도 좋았던 기억보다는 여자이기에 강요받고, 요구되는 사회상이나 인식들과 행동에 대해 싫었던 기억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여자이기에 좋았던 점과 싫었던 점 모두 우리의 “소중한 경험”이다. 좋았던 기억들도 잘 살려서 이 후에는 내가 여성인 것이 자랑스럽고 좋은 것으로 다가왔으면 한다.



4. 조별시간

  1) 깃발 만들기

    조별로 모여서 각 조의 특성에 맞는 조 이름을 붙이고, 그에 맞는 깃발을 만들었죠. 다들 독특한 아이디어들이 잘 담겨진 깃발들이 완성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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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의 목표

    자신이 왜 이 기행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목표도 써서 타임캡슐에 잘 넣어놨죠. 기행이 끝나고 해단식 할 때 다시 펼쳐보기로 했습니다. 내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잘 지켜졌는지, 나는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네요.



5. 촛불의식

  : 두개의 원을 만들어 서로 인사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좀 뻘줌하기도 하고, 내 목표가 무엇이었더라.. 왠지 상대방에게 이야기 하기 어려웠지만 곧 다들 적응이 되었다. 촛불을 들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왠지 기행에 대한 막연한 지루함과 잘 해낼 수 있을까의 의문들이 이 순간만큼은 사라지고, 벽을 허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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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역사.

공적의 영역에 묻혀 그들의 삶을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가 그 여성들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고

내가, 우리가, 주체적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여행이 되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맡은 임무인 것입니다.

  
<b><font size=3>7월 31일</fon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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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드디어 기행의 시작이다!!! </font></b>

7시 기상.. 아침 일찍 일어나 전날 배운 노래 “달려 달려”에 맞추어 율동을 배웠다. 늦게 취침에 들고, 모기에 신경쓰다보니 미처 다 자지 못한 잠 때문에 처음엔 다들 지쳐했지만 곧 재밌게 따라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정리한 후 경희대 녹원에서 간단한 발대식을 진행하였다. 사회는 경희대 총여학생회장! 고대 서창 총여학생회장의 연설을 들었다. 전날에 들은 “여성의 역사” 강의가 인상깊었나보다. 우리의 기행의 목표는 숨겨져왔던 그녀들의 삶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 여성의 생각으로 그녀들의 행적으로 발견하고, 재해석 하는데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삶 속에서 주체적인 여성이 되자고 하였다. 귀여운 새내기의 기행 선서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b><font size=3>여성사 전시관 </font></b>


대방동에 있는 여성사 전시관은 여성부가 주관하여 2002년도에 세워졌다고 하였다. 사실 가기 전에는 얼마나 많은 자료와 전시물이 있을까 잘 몰랐는데 막상 갔을 때 얼마나 세심하게 여성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려고 했는지 느껴졌다. 사람이 많아 두 조로 나누어 오늘의 주제 “나혜석”에 관련한 다큐를 보고, 상설 전시관과 특별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나혜석”에 관련한 다큐는 그녀의 삶을 사계절에 비유하여 어떻게 그녀가 화가로서, 문인으로써, 그리고 애인, 남편과 열정적 사랑을 했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최린과의 염문설로 이혼 이후 파멸해가는지..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의 ‘신여성’의 이미지는 언제나 부유층 사회적 문제의식 없는 여성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 자유 연애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배우고, 본 여성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신여성들은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사회 모순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지식으로만 놔두었던 것이 아니라 이후 노동쟁의나 독립운동, 사회 계몽 운동에 이바지 했었다. 나혜석 역시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당했고,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스스로 깨어있는 지식인이었으며 가부장적 사회 모순을 얼마나 날카롭게 꼬집고 비판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곳에 보기를 원하는 영상물을 가져가면 볼 수 있어요^^)

여성사전시관은 항상 상설 전시관과 특별 기획 전시관으로 나누어 한다고 한다. 상설 전시관에서는 여성들이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거쳐오면서 어떻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집 주거 공간은 어떻게 구분되었는지, 의복의 변화 등을 볼 수 있었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굉장히 많은 시청각 자료들이었는데 단순히 듣고, 보여주는 형식을 탈피해 다양한 디렉토리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별 기획 전시관의 경우 이번 주제는 여성과 교육이었다. 예전 이화학당 같은 여학교들을 재현한 교실에서 우리는 그 의자에 앉아보기도 하고, 그 당시 여성들이 사용했던 교과서나 즐겨 읽던 소설책들을 볼 수 있었다. 또 여학교 안에서 맺어졌던 여성들간의 우정을 잘 나타내주는 사진들과 졸업사진, 그리고 다양한 체육 활동, 예술 활동의 모습들도 보았다. 개화기 그 당시에는 여성들이 교육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자세는 지금보다도 더 진지하고, 열정적이었음을 느끼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일제 시대였기 때문에 조선어강독과 국어(일본말) 교본이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 밖으로 나가면 “동상이몽”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여성의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목표를 그 당시 지식인 남성들, 일제, 그리고 교육을 받던 여성의 시각으로 조명해 놓은 것인데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지식인 남성들이나 조선 지배층들은 여성의 교육을 좀 더 합리적인 가사활동을 할 수 있는 현모양처를 만드는데에 시각을 두고 있었다. 반면 일제의 경우는 황국 신민으로써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인 여성들을 원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진정으로 바랬던 교육은 자아 실현이었다는 것.. 말 그대로 동상이몽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 받은 여성이 사회에서 요구되는 바대로 살아가지 않았을 때 쏟아졌던 비난들은 어쩌면 예기되고,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오면서 여성학 소모임 친구들과 나중에 여유를 가지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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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나혜석의 미술 세계에 대한 강연 </font></b>

나혜석이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과 실천을 글로써 표현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녀의 그림 속에서 역시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그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시절과 이혼 후, 그리고 점점 스러져가던 시절의 그림의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초반에 그림 속에 등장하던 인물은 노동하는 여성이었고, 농촌 배경의 그림이 많았었다. 그러나 최린과의 염문설 이후 이혼을 당하게 되고,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정조’ 관념이나 가부장성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정교한 건축물 그림들 속에서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생계의 문제나 자녀들과의 생이별 속에서 심신이 피폐해지고, 또한 자궁의 지병의 고통 때문에 작약(이 식물이 통증, 특히 부인병 등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있다.)을 많이 그렸고, 그림 아래 앞 부분에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처럼 처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그림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느낌과 상황과 생각을 아주 솔직히 표현했던 것이다.

굉장히 미술사적인 기본 지식들을 요구했기 때문에 좀 어렵기도 했고, 또 이전에 보고 왔던 다큐멘터리와는 사뭇 다른 시각과 설명이었기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웠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 나혜석 거리와 생가, 작약을 그렸던 곳 등을 둘러보면서 아직까지 제대로 조성되지 못한 이 곳들이 사회가 여전히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끔 했다. 더 많은 노력과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곳들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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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숙소로 돌아와서... </font></b>

첫날부터 시작된 빡빡한 일정과 무더운 날씨는 우리의 표정을 굳게 했나보다. 조금은 지치기도 하고, 발걸음도 가볍지 않았다. 그러기에 주체적이지 못했던 오늘 하루.. 모두가 반성하며 내일은 조금은 다른 여행이 되자. 다짐을 했다. 신여성을 이전까지는 어떻게 생각했나.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토론도 하고, 하루 평가도 하고... 서로 지친 팔다리도 주물러주며 오늘도 이렇게 마무리 한다.


<b><font size=3>8월 1일</font></b>

오전 발제: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한 용어의 문제와 그 당시 어떠한 사건이었는지, 또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잘못된 시선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짚어보면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임을 인지하고, 여성 ‘인권’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 인제대: 이제까지는 막연히 아.. 잘못된 문제라고 생각만 했었는데 이번 발제를 통해 좀 더 자세한 내용과 배경, 그리고 어떻게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 이대: 수요시위에 있어서 민간이나 학생들이 움직인다고 해서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잘 모르겠다.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도 노력이 있어야 되지 가능하지 않을까..
- 고대 서창: 어느 만화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민족에 의해 강간을 당하는 여주인공..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때문에 동족들에게 버림받는 상황. 그리고 많은 전쟁의 폐해) 그 만화를 보면서 굉장히 충격이었고, 그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총여학생회활동을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이라크 전쟁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 보여조: 예전에 마루타라는 영화 보면 여성들 강간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이것이 그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이다 라는 생각.. 근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리랑이라는 소설 속에서의 ‘위안부’에 대한 장면이 나오는데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많이 알리고, 다른 여성들에게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 동아대: 전쟁시 물리적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것이 지금도 그러한데 사회 정의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힘이 약한데 어쩔 수 없다라고만 이야기 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실천적인 문제)
단순히 가슴 아픈 일이라고만 그칠 수 없다.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 ..
정신대 대책 협의회가 더 잘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는 것. 국제법정의 경우도 굉장한 자금과 로비가 필요한 곳이다. 이런 것들도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노력하는 것.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실천적 자세..

(자료참고는 무엇으로 해야 하나)
정신대문제대책 협의회 사이트 참고. 할머니들이 증언하셨던 자료. 책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들, 포토 에세이집(할머니들이 최근에 활동하시고 살아가시는 모습을 담은 것.) 그 밖에 정대협에 있는 영상물들을 구입하거나, 빌려보는 것으로..

토론을 정리 하면서 광주대에서 만든 그림(모자이크로 만든건데 나중에 그림을 연결할거에요 ) 뒷면에 할머니들께 드릴 편지를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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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차 안에서 즐거운 한 때^^</font></b>

전날 평가 시간에 차 안에서의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반영되어 차 안에서 간단한 레크레이션과 각자의 끼를 보여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회자는 끼가 충만하신(?) 전남대 부총여짱님.. ㅋ처음 순서는 경희대 조장(01‘ 수진)님과 “니꺼내꺼 송”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어요. 가장 잘 한 커플은? 전남대 친구와 목포해양대 친구가 잘 해서.. 무엇인가 상품을 받았답니다. 두 번째는.. 동아대 친구 .. 최신꼭을 부르겠다고 하다가 그에 걸맞는 씨디를 찾지 못하여 함께 달려달려를 불렀답니다. 세 번째는 전남대 두 친구가 나와 함께 한결같이를 불렀습니다. 다음 순서는 실무단.. 헉~ 나름대로 화음도 넣으면서 ’처음의 마음‘을 부르려 했으나.. 불협화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거의 다 와서 인제대 친구들이 나왔습니다. 아동학과 친구가 있어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곡 ’멋쟁이 토마토‘를 율동과 함께 해주었답니다. ^^ 기행 단원들 안에서 최고 인기를 얻게 될 것 같습니다.
영남대와 목포해양대 친구가 나와 다시 멋쟁이 토마토를 해보았습니다. 사회자로부터 분위기 흐린다고 구박받았어요. 마지막으로 고대 서창 총여학생회장님과 이대 친구! ‘산다는 건 그런거 아니겠니..’ 아.. 가사를 까먹었어요. ^^; 테이프 코러스도 똑같이 따라해보면서 이렇게 나눔의 집으로 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b><font size=3>나눔의 집</font></b>

지금까지는 책으로만, 사진으로만 보았던 것들을 직접 나눔의 집에 와서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나눔의 집에 대한 영상을 보았고, 이후에는 역사관을 둘러보았다. 새내기들이 나와서 영상을 본 소감을 이야기 하였는데 그냥 머리로만 사고하고,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사실뿐이라고 생각했던것과 달리 직접 할머니들의 음성으로 증언을 들었을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였다. 할머니들이 위안소에서 쓰시던 물건들과 돌아가신 분들의 유품.. 그리고 사진등으로만 보았던 할머니들의 그림 작품들을 볼 수가 있었다. 처음 할머니들이 한 집에서 같이 지낼 때는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로가 똑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그림 치료를 활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글로 쓰지 못했거나 차마 너무 괴로운 기억이기에 말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셨다. 못다핀 꽃, 배를 따는 일본군, 빼앗긴 순정.. 그리고 강덕경 할머니와 김순덕 할머니의 사진을 지장으로 찍어 만든 그림도 보았다.
만든 엽서를 잘 붙여서 완성시키고, 계신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요즘은 많이 힘들어 하신다고 했다. 또 연세가 있으셔서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거의 한달에 한분씩 돌아가시고 있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03학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실천해야겠다라는 생각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용하는 언어들도 주변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 해야겠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아직도 어색하고, 할머니들을 직접 대하면서도 왠지 역사적 사진을 보는 듯이 실감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한 친구는 밀리터리를 입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아침부터 고민하기도 했다고... 이대 친구는 그 분들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할머니와 다르지 않은 똑같은 할머니들이었다. 또.. 운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 모르는 것이 죄송스러웠고, 앞으로 그런 부분들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인상깊은 조형물이 역사관 서로 마주보고 양 옆에 있었다. 하나는 칼과 총을 들고 있는 험상 굳은 표정의 일본군을 상징했다. 말 그대로 알 수 있듯이 무력으로 여성들을 어떻게 성폭력을 가했는가를 잘 표현해주는 듯 했다. 이 일본군 얼굴의 아래는 국화(國花)인 국화를 넣어 이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과 마주보고 있는 조각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표현한 것이다. 두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은 ‘너희가 이렇게 우리를 억압하고, 짓밟은 행위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너희에게 보복하지는 않는다. ’라는 평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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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의병 윤희순</font></b>

가이드 해주시는 분이 윤희순 의병의 친손자이셨습니다. 함께 또 안내해주신 여자분이 있으셨는데 그 분은 여협에서 활동하시는 대학 강사분이셨습니다. 이 두 분이 가장 인상깊은 것은 여대생들이 이렇게 역사의식을 갖고 활동하고, 기행하는 것이 얼마나 의의가 있는 일인지 칭찬해주시면서 이런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해주신 거에요. 또 같은 의병 활동을 하면서 남성과 여성이 역사 기록이나 이후 사적 조성 등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시면서 여성들도 똑같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들의 공적이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너무 잘해주셔서 오히려 우리가 몸둘바를 몰라했죠. 두꺼운 책자도 선물해주시고, 맛있는 춘천 막국수를 대접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렇게 많은 관심 가지며 활동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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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와 전남대의 발제와 주제토론을 시작했어요.
일단 발표 전에 윤희순 윤희순이라고 하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해서 일단 의병 윤희순이라고 호칭하도록 했습니다. 안사람의병가.. 아까 의적비에서 보았죠. 일제시대때 발생했던 운동은 크게 두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의병 등 무력투쟁과 또 다른 하나는 계몽운동이 있었죠. 주로 의병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 남성, 그리고 그 중 양반들도 있었는데 유교적, 성리학적, 가부장제 사고 속에서 여성들이 참여하기 어려웠다. 반면 애국계몽운동의 경우는 여성들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의병 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이 있었어요.
윤희순 의병의 경우 워낙 집안이 다들 의병으로 참여한 상태, 그러한 집안 분위기가 있었고, 그래서 이 분 역시도 그런 의식이 투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그러나 애국에 남녀구분이 있을 수 없다, 우리도 그렇게 일어나자며 의병투쟁에 관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후 국내에서 의병투쟁을 하기 어려워져 중국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들을 잃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계속 의병을 돕는 활동들을 하십니다. 후손들도 이러한 의병투쟁 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며 죽기 전까지도 그러한 활동 과정들을 저술하여 남겨놓기도 했습니다.
비록 의병을 뒷바라지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상황 자체가 워낙 바깥일과 안 일을 구분하고, 여자가 사회참여나 간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토론 주제는... 윤희순이라는 사람의 활동과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는데 그에 비해 남성이 했던 의병투쟁등은 굉장히 잘 보전되고, 기념관도 세워지고 있습니다. 여성의 업적이 제대로 남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동아대: 그 분이 직접 총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총알을 만들거나 군자금을 모으고, 식량을 대주었잖아요. 그러나 왜 그런 활동은 의병 활동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활동 영역의 구분 자체가 오히려 더 남/녀 역할구분을 강화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것이 윤희순 의병의 활동을 역사 속에서 재평가 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좀 더 이러한 활동까지 포괄하는 명확한 ‘의병 활동’에 대한 개념 정의가 필요할 듯 하다.
- 경희대: 유관순 ‘누나’라는 표현 등을 보면 대부분 역사를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가사 안에서 애국 활동에 있어 남녀 구분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셨는데 우리들 역시도 사회 참여 속에서 그러한 인식구분 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희순 의병을 표현하는데에 있어 시아버지, 남편의 의병 활동 뒷바라지를 잘했다라고 이야기 되어지는데 만약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의병활동을 한 여성이 있다면 과연 제대로 평가 받았을까.. 여성의 활동 속에서 공적 영역 뿐만 아니라 사적영역까지 포괄하여 평가되곤 하는데 그 속에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b><font size=3>(인터뷰-전남대)</font></b>

윤희순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위안부 할머님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잠깐의 휴식 끝에 도착한 윤희순 의사의 유적지 ..
덩그러니 비석 하나만 남아있는 쓸쓸한 자리였지만, 의병 윤희순의 기상이 남아있는 ‘안사람 의병가’를 읽으면서 그녀의 남다른 나라 사랑과 여성의 몸으로 의병으로 앞장섰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집안 모두가 의병으로 행동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겠지만, 안사람의 몸으로 의병에 나서려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사의 당당한 모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상을 보지 못한게 아쉬웠다. 또한 직접적인 의병 활동만이 추모되고 있는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업적을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의병 윤희순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남겨야 할 것이다.

경희대와 한양대 후발대 4명이 결합을 했습니다.^^*


<b><font size=3> 오늘의 공동체 프로그램- 대안 생리대 만들기</font></b>

대안 생리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생리대의 형태는 1회용 생리대와 탐폰.. 하지만 이제 우리의 몸과 환경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공동체 놀이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던 경희대 친구들이 자신들이 배운 대안 생리대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왔어요.
대안 생리대가 좋은 점은 일단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생리대는 아기들 귀저기와 재질이 비슷한데 태워도 완전연소하지 못하고 굴러다녀요. 또, 썩지도 않죠. 이런 생리대 폐기물이 여성들 생리하는 기간을 따져봤을 때 한달 3일에서 7일, 이것을 일년 12달, 또 완경기 전까지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1회용 생리대를 쓰는 셈인 것이지요. 사실 우리 어머니들은 1회용 생리대를 쓰지 않으셨었답니다. 1회용 생리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창 시절에 아기들 귀저기 같은 천으로 생리대 접는 방법을 배워서 썼데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한마디로 가장 필요한 여성 필수품을 상품화하여 소비하게끔 만든 것이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환경을 파괴하고 있었던 거에요.
또 여성의 몸에도 엄청 안 좋은데 생리대 자체 내 혈액을 응고 시키기 위한 것과 솜을 표백시킨 표백제 등등 그 자체로 화학물질 덩어리였던 거에요. 1회용 생리대를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여성들이 자궁의 병이 많이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하네요.
환경도 생각하고, 우리 건강도 생각하면서 수다도 떨고, 혹여나 틀릴까 조심조심 바느질을 하였습니다. 특히 재송이는 남자니까.. 여자친구한테 손수 바느질(이번에 처음 바느질을 배웠답니다.)한 대안 생리대를 선물해주면 좋겠죠.^^ 또 생리대가 어떻게 생긴건지도 알 수 있고..
다들 자라고 하는데도 다 완성 못했다고 손에서 쉽게 떼지를 못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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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하루 평가(조장 회의)</font></b>

발걸음조(인제대): 총화 틀에 맞추어 했다. 일본군 ‘위안부’ 나눔의 집에서 그림, 초상화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얼마전 김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영정을 보며 숙연한 마음. 학내에서 풀어내지 못했던 아쉬움. 윤희순 유적비 가서는 처음 알게 된 인물이라 미리 알고 갔더라면 더 많은 주제의 토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구 그 안내를 해주신 분들한테 고맙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다.
전대 부총여짱님을 모범 대원으로 추천되었어요..^^ 이제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신오인당조(동아대): 보통 역사 기행이면 책에서 나올법한 장소나 이런 곳에서 소풍 오듯이 했었는데 이번 기행은 참 알차고, 내용도 있고, 배우는 것이 많아서 내년에는 더 많은 학우들과 같이오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본 사람들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해야겠다.. 모두들 뜻깊은 하루였다고 함..
보여조(전남대+영남대): 잠을 나름대로 푹 자고.. 이래서 기분좋게 지낸 듯. 또 서로 노력한 부분들도 있었다.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과 이야기도 하고.. 새내기는 눈물도 글썽하기도.. 이때가 가장 좋았다고들 함. 의병 윤희순 같은 경우는 잘 모르니까 더 많이 보고 싶고 했는데.. 막상 갔을 때 그 유적들이 부족하고, 관리가 잘 안되어 아쉬웠다. 규율은 무조건 웃자가 오늘의 목표였어요. 하루종일 웃고, 줄도 잘 맞추고 이랬습니다. 점점 발전해가는 모습. 모범 대원은 뒷정리 주체를 한 은지랍니다.
경쾌한 시선조(경희대): 앞과 비슷한 평가.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과의 대화, 위안소 재현해놓은 것, 할머니들이 그리신 그림 직접 보게 되어 인상깊었다. 충격이기도.. 의병 윤희순 관련해서는 여성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좋았다. 생활에 대한 평가는 솔선수범하자는 것과 씩씩하게 하자는 것.. 잘 지켜지기는 했는데 사실 대화는 거의 수다의 형태... 조원들끼리 친해지긴 했는데 다른 조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해 아직 아쉬움.. 후발대중에 남학우가 왔어요. 뻘쭘해 하는 것도 있지만 금방 적응할 듯 하다. 너무 특별하게 대하지 않으면서 또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지리학과 학생회장님은 집에 일이 생기셔서 가셔야 한다고.. 재송이가 남자들은 왠지 모를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있다고 얘기 함. 그래서 그들 역시도 가부장제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 적대감보다는 잘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함.


<b><font size=3>8월 2일</font></b>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일찍 일어났어요. 바로 강릉을 가기 위해서였죠. 그래서 출발하는 차 안에서 다들 잠을 청하느라 바빴습니다. 게다가 날씨도 흐려서 좀 추웠답니다.
허난설헌 생가를 둘러보기 전에 서로 아직도 다른 학교끼리는 아직 친해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반영하여 둘씩 새로운 짝을 지어 소나무 숲을 산책하였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많이 친해졌고,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짝궁과 같이 붙어다니고, 밥도 먹는 규칙을 세웠죠. 분위기는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b><font size=3>허난설헌 생가로 가다</font></b>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으로 가서 한국 한옥에 대한 강연을 윤미화 선생님께, 그리고 허난설헌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강릉 여성의 전화에 계신 분께 들었습니다. 강연 듣기 전에 미리 생가를 둘러보았는데 사실 규모도 작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려고 하니까 그리 눈에 특별히 들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옥의 구조구조가 어떤 목적이 있고, 어떤 지혜가 녹아져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같은 한옥이 아니었어요.
그곳을 돌아보며 들은 설명을 정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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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자국에서 전쟁이 많이 일어나 남아있는 과거 건축물들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죠. 특히 조선 시대 건축물은 유교적 이념이 강하게 녹아들어있는 것이어서 남성 중심적 권위와 동선, 이용의 목적이 있는 건축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대문을 볼까요. 대문은 남자가 들어가는 문이었고, 여성들은 주로 측문을 이용했습니다. 다른 사대부 집의 구조가 그랬듯이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가마를 타고 집 안까지 들어가기 위해서 대문 지붕이 유달리 높았답니다. 이 집 역시도 다른 높이보다 높긴 했는데 우리가 보았던 다른 한옥에 비한다면 낮은 편이었죠. 왼쪽은 회벽이 칠해져 있는데 사람이 기거하는 공간은 꼭 회벽으로 칠해져 있구요. 나무 벽은 곳간이나 광, 창고와 같은 곳이에요. 왜냐면 통기가 되어야 하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조상들이 집을 짓는 것은 풍수지리에 맞추어 하는데 예를 들면 안방은 자손 생산하는 곳이니까 음양의 기가 조화되는 곳을,.. 그리고 대문은 복이 들어오는 곳. 부엌은 가족의 건강과 관련한 공간이므로 특히 이런 곳은 꼭 풍수에 맞추어 위치를 정하고 만들었죠.
인상 깊었던 것은 한옥의 곳곳의 크기 비율이었는데 창, 문 등의 크기를 정하는데 있어 인체 평균 크기에 맞추었던 거에요. 그래서 인체에 배가 되어 크기가 커졌던 서양 건물과는 달리 굉장히 작은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방의 천장 높이는 사람이 선 키와 앉은 키를 더한 것이고, 창은 앉았을 때 팔을 딱 걸칠 수 있는 정도의 높이, 그리고 마루도 앉았을 때 무릎의 높이에 맞게 만들어졌죠.
허난설헌의 생가도 다른 사대부집과 기본적인 구조는 같았지만 아주 특색있는 몇 가지가 있었어요. 일단 사랑채 높이가 높지 않았어요. 안채랑 기단 높이가 똑같았죠. 대부분은 그 집 가장 남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두 단이나 세단 정도 더 높이기 마련인데 이 집은 그러지 않았다는거죠. 또 대부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같이 지어졌는데 사당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채의 구조가 다른 경우는 사랑채와 무척 다른데 허난설헌의 생가의 경우는 안채와 사랑채의 방 구조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집안의 개혁적 성향을 잘 나타내주고, 나름의 (물론 그 안에서도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민주적인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허난설헌이 자신의 재능을 키우는 데에 여자라는 문제 자체에서 자유롭지 않았나 싶어요.
오늘의 인터뷰는 고대 서창 총여학생회장님이랍니다. 평소에 미술에 관심이 많데요.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이 설명하는 내용을 열심히 듣고 있었죠.

<b><font size=3>(인터뷰)- 고대 서창 총여학생회장</font></b>

한옥에 대해 자세히 들은게 인상 깊었어요. 각 부분 이름도 잘 몰랐는데 들으면서 외국 건축물들이랑 비교해볼 수 있었고, 말씀해 주신대로 사랑채랑 안채랑 높이가 비슷했던 것이 인상 깊었어요. 그러한 집안 분위기가 허난설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었나 싶어요. 안채의 구조도 다른 가옥에 비해 민주적이었고, 권위적이라는 느낌이 덜 느껴졌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았어요. 집 안이 예쁘게 가꾸어져 있었고, 정원등을 통해 허난설헌은 감수성을 키울수 있지 않았나.. 강연 전에 소나무 산책은 그 전에 같이 얘기 많이 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기행 전에 허난설헌에 대한 짧은 글을 읽고 왔었는데 그 글들이 생각나면서 그녀의 감수성과 예민한 느낌들이 이 곳에 와서 공감되고 느껴졌어요. 한옥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라던지 집 주위 펼쳐진 풍경이 그녀의 시 짓는 스타일, 습관이 느껴져서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요.

<b><font size=3>여성역사기행 단원들의 백일장</font></b>

나혜석을 시작으로 일본군 ‘위안부’, 윤희순 의병, 허난설헌까지 지금까지 보아왔던 인물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느낀 점이나 우리의 생각들을 그림이나 시 등으로 표현하는 백일장을 허난설헌 생가 옆에서 진행했어요. 다들 처음 시작할때는 웅~ 소리 내면서 곤란해 했는데 다들 막상시작했을 때는 너무 잘한거 있죠. 그림 부분과 시 부분 각각 1명씩 시상을 해야 하는데 뽑기 어렵답니다. 마지막 해단식날 두둥~ 발표를 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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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땅 여자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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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바다다!!!</font></b>

상상 되시죠? 시끌벅적 기행 단원들의 요란스러움이 경포대 해수욕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니까요ㅋㅋ태풍이 올라와서 파도가 높아 깊이는 못들어갔지만 서로 빠뜨리기도 하고, 모래사장에서 피구도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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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토론 전의 짤막한 오락 시간^^</font></b>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기발한 질문들로 바닥에 깔 깔개가 찢어질 정도로 격렬하게 놀았답니다. 벌칙은 노래부르기.. 한양대 총여학생회장님의 능청스러운 노래와 춤이 인상적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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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size=3>허난설헌에 대한 발제와 토론(한양대 총여학생회장)</font></b>

허난설헌의 이름은 초희이고, 자는 경번이라고 합니다. 허난설헌의 시가 주위 사람들에게 크게 두가지로 평가되었었는데 하나는 표절한 것 아니냐 라는 것과 또 하나는 너무 외설스럽다 였습니다. 그 당시 허난설헌의 삶은 굉장히 불행했는데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구박받고, 아이들도 계속 잃으면서 27세로 요절하게 됩니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잘 표현했지만 이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대부분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자료들은 이 분의 시가 너무 뛰어나 이를 퍼뜨렸던 중국이나 일본에서 전해진 것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 허난설헌은 젊은 시절 굉장히 시어머니나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과 행복하지 못했던 쳰 생활이었다. 자기 암시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라고 하며 비하하는 말만 듣고 자란 사람이 이후 커서도 이러한 분위기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나 집에서 어떤 위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따라 그 이후 삶에 대한 자세를 결정하는 듯 하다.
- 이 분도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굉장히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희생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b><font size=3>신사임당에 관한 발제와 토론</font></b>

대부분 우리가 어렸을 때 처음 신사임당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냐.. 완벽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현명하게 대하고, 뒷바라지 했던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처음 다가왔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가부장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신사임당 이다.
박정희 시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하면서 급부상한 인물은 이순신과 신사임당이었다. 이순신이 국가에 대한 애국, 충의 대명사였다면 신사임당은 열녀, 현모양처. 즉 국가에서 필요한 일꾼, 국민을 길러내는 ‘어머니’ 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자신의 남편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신사임당 역시 자신의 자아 실현을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삶의 목표 전체가 ‘현모양처’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잘못된 것은 남편에게 바로 문제제기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우리가 신사임당을 다시 보고, 본받고자 하는 것은 사회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내’ 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훌륭하고 주체적이었던 삶. 그 자체를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b><font size=3>나의 자서전 쓰기</font></b>

지금까지 이 20여년간의 나는 어땠지? 그리고.. 이제 내가 나이를 먹고 60세가 된다면??? 그림으로 표현해보는 시간!.. 이것으로 오늘 일정도 끝이네요.. 내일을 위해 이제 자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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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신사임당.. 오죽헌
이후 임진각을 가야해서 오늘도 일찍 아침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오죽헌을 갔어요. 정말 말 듣던 그대로 잘 조성되어 있더라구요. 안내자분을 따라 설명들으며 들어갔지만 허난설헌 생가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어요. 아무래도 국가에서 박정희 시대에 의도적으로 내세웠던 인물로 이순신과 신사임당을 꼽았었고, 그래서 그런 목적의식이 느껴지는게 자꾸 걸리는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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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율곡 이이에 대한 이야기나 유품들이 더 중심적으로 설명되고 있었고, 신사임당의 경우는 우리가 이미 발제를 했듯이 그저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율곡 이이를 이렇게 잘 훌륭히 키워낸 어머니였다 라는 이야기만 강조되고 있었어요. 안내하시는 분도 계속 그렇게 얘기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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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사임당 관련해서 설명해줄 가이드를 찾을때 여성단체로 알아봤었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라고 하더군요. 워낙 신사임당에 대해 이미지화 된 것들이 그다지 여성 그 자체의 모습으로 해석된 것이 아니니까요.
어쨌든 오죽헌의 느낌은 국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권위’ 그 느낌이랄까요. 소박하고, 작았던 허난설헌의 생가와는 너무 많은 차이가 느껴져서 다들 그다지 기분이 좋질 않았습니다. 5000원권 뒷면에 나와있는 오죽헌의 도면과 실제 풍경과 비교도 해보고.. 그 안의 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도 보며 그렇게 아침을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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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차를 타고.. 파주로...
차를 타고, 간단하게 지금까지 돌아본 여성들에 대해 자료집을 가지고 ‘삐리리’ 퀴즈 대회를 했지요. 어떤 문장들을 읽어주고 문맥에 맞게 “삐리리”된 단어를 맞추는 게임이지요. 사회자는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장님. 너무 상식적(?)인 문제들을 내서 그런지 다들 잘 맞추었죠.
그리고.. 다들 너무 피곤해서 밥을 먹는둥 마는 둥 계속 차에서 잤는데.. 차가 너무 많이 막혔어요. 그래서 일정이 밀리고 해서 문산읍에 도착했을 땐 이미 5시가 넘었고.. 원래 걷기로 했던 장소보다 조금 더 가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경희대에서 제안한 것인데 오늘이 ‘자이툰 부대’ 이라크 파병되고, 그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투쟁들과 단식에 지지하며 우리도 도보할 때 관련 피켓을 만들자고 해서 함께 만드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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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통일에 관한 염원을 담은 끈도 만들고요.. 임진각까지 그렇게 어려운 코스가 아니라서 통일에 대한 배운 노래들을 부르며 임진각까지 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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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시간 좀 더 걸었을 때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임진각 하면 버스에서 바로 내려서 망배단, 자유의 다리 이쪽만 보았었는데.. 들어가는 입구는 그야말로 ‘반공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구조물과 설명서들 뿐이었어요. 아마 엄혹했던 시대에 세워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고쳐지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던 거죠. 특히나 탱크, 전투기, 미사일들을 설명하는데에 있어서 ‘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던..’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며 경악과 비난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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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저것보다도 더 발달된 무기로 파괴하고, 민간인들이 학살당하였는데.. 그것을 ‘적’이라고 표현하다니.. 이북을 ‘적’이라고 표현하다니... 통일을 이야기 하고 염원한다던 임진각의 모습과 사뭇 모순되는 이것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전쟁에는 ‘적’과 ‘아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과 싸우고 있는 규정된 ‘적’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요. 우리나라 한국전쟁에 파병을 결정하여 도와준 기념으로 트루먼(당시 미국 대통령) 동상을 세웠다는 것을 보며 또 한번 혀를 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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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배단이 있는 쪽으로 가는 길에 왠 여성과 그 양 옆으로 서 있는 두 아이의 조각이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도 여성들이 어떻게 국가주의에 이용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물이었습니다. 옆에는 나라가 어려울 때 움직였던 많은 여성들(대부분 국가 전시에 동원되었던..)을 찬양하고, 신비화 하는 모습, 특히 어머니 ‘민족’이라고 표현되어지는 그러한 논리로 만들어진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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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종탑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망배단에 관한 설명을 들은 후 자유의 다리로 갔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온 피켓과 끈과 조 깃발을 달면서 평화와 통일에 관한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울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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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뒷풀이
원래 기행의 마지막은 4일이지만 지역 친구들은 다시 내려가야 해서 뒷풀이와 평가는 3일 저녁에 하게 되었씁니다. 실무단이 신경쓴 빠방한 안주와 술자리.. ^^ 그리고 조별 평가와 각종 공연들을 보며 마지막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재기발랄한 전대 부총여학생회장님의 사회가 압권이었어요..^^한양대 총여짱님의 귀여운 춤과 단장님의 브레이크 댄스(?)도 우리를 뒤집어놓았습니다. ㅎ 그렇게 밤은 저물어갔죠. 이렇게 오늘도 끝!!!



8월 4일

기행의 마지막날.. 우리는 나눔의 집을 갔던 것을 회상하며 수요시위에 참여하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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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사관 앞으로 가는 지하철 속에서 시민분들한테 우리가 기행에서 여성의 역사에 대해 느꼈던 점. 그리고 지금 수요시위에 참여하러 가고 있다는 것, 8월 14일 정대협에서 하는 평화 한마당에 많이 오시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잘 들어주시기도 하고, 박수 쳐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좀 더 잘 준비해 왔더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수요시위는 우리 기행단이 주최하기로 해서 문예공연과 각종 정치발언, 그리고 사회까지 총괄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떨리기도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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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가 시작되고 오늘은 유난히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경희대와 한양대 친구들도 많이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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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노무현 대통령과 일본 총리의 만남에서 나왔던 여러 가지 발언들이 어김없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한일관계는 청산되어야 한다. 사죄하고, 배상하라! 잘못된 역사 교과서를 바로 잡아라! 라는 정대협 사무총장님의 발언을 시작으로 중학생도, 외국인도, 대학생들도 하나의 목소리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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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행 기간 내내 오늘을 위해 준비했던 ‘보여조(영남대, 전남대, 목포해양대)’의 ‘평화만들기’ 율동도 보여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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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단식하러 한양대로 돌아가는 길..  허난설헌 생가에서 했던 백일장 시상식과 모범대원을 뽑는 시간. 그리고 뺏지 만들기랑 기행증서 수여 시간을 가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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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부분은 기행단 허난설헌과 만나다를 그린 이양희석, 그리고 시 부분은 김수진, 모범대원 2등은 청일점 박이재송과 귀여운 새내기 배진주, 최고 모범대원은 힘든데도 항상 웃고, 웃겨주고, 조원들도 잘 챙겼던 차김진아.. 이렇게 뽑혔답니다.^^
5박 6일을 어떻게 보내나.. 때로는 빡빡한 일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친구들도 있어 기운도 빠졌었고, 서로 서먹서먹했는데.. 이제는 너무 정이 들어버려서 다시 또 언제보나 .. 하며 이 시간들을 마무리했습니다. 여성의 역사를 책에서만 읽고, 이론으로 쌓았던 것을 이제는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느끼며 다양한 주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여성이 삶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속에서 묻혀지고, 인정받지 못하고,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발자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언니,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삶 속에서 또 한번 나의 삶에 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제 마무리 할 시간이네요. 즐거웠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진지했던 보람된 이 5박 6일을 우리는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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