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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3]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br><br>독일 도르트문트 리준식 선생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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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6-07 14:11 조회2,8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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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도르트문트=민족통신 손세영/노길남 특파원]7일 독일의 중부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시인 리준식 선생댁을 방문했다.독일 이민생활 35년이 흘렀다. 1977년 독일광부로 이곳에
온 리준식 시인은 광부생활, 자영업 가게, 직장생활 등 바쁜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그 동안 4권의
시집을 펴내는 한편 이역만리 독일 땅에서 한국민주화 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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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3]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독일 도르트문트 리준식 선생 근황




[독일 도르트문트=민족통신 손세영/노길남 특파원]7일 독일의 중부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시인 리준식 선생댁을 방문했다.

그는 "우리 동포들이 독일에 약 4만여명 살고 있는데 내가 거주하는 조그만한 도시 도르트문트에는 대략 80세대의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소개한다.

독일 이민생활 35년이 흘렀다. 1977년 독일광부로 이곳에 온 리준식 시인은 광부생활, 자영업 가게, 직장생활 등 바쁜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그 동안 4권의 시집을 펴내는 한편 이역만리 독일 땅에서 한국민주화 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해 왔다.

그는 최근 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은퇴생활을 시작하면서 남은 생애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전념하려고 여러가지 일들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리준식 시인의 삶의 발자취와 그의 삶의 현주소를 알고 싶었다.

한국에서 어떻게 독일 이민을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의 한국생활부터 질문했다.

<##IMAGE##>리준식 시인은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하여 13살때인 소학교 6학년때 어머니를 잃었고, 그리고 2년뒤인 15살 때 아버지를 잃고 8남매 중 5번째로 고학을 하며 고생길에 접어 들었다. 제천역 앞에서 구두수선을 하며 돈벌이를 했고, 한때는 신문 판매를 하며 가정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그는 그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제대하여 큰 형이 하던 운수업을 7년 정도 돕다가 국내에서 어떤꿈을 실현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나머지 독일 광부로 가는 정보를 얻어 노동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독일 레크링하우전 에발트 광산에서 중노동을 하며 8년을 일했다. 이 기간 중반이 되는 1981년 주변 친지의 중매로 변정옥씨와 결혼하고 그 후 4년 뒤인 1985년에 광부일이 너무 힘들어 그 직장을 그만두고 부부가 일해서 번 돈으로 도르트문트 역전 지하상가에 가게를 하나 얻어 10년 동안 잡화점을 운영했다. 그러던중 1995년께 손님의 부주의로 화제가 발생하자 그 가게를 계속 경영할 수 없어 이것도 포기하고 그 때부터 최근까지 16년 동안 한 도매상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요즘에 그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그는 근황을 설명해 주고 외아들이 29살로 방송국에서 영화선전일을 하고 있어 두 내외가 여생을 보람있게 지내는 것이 앞으로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기자들은 그의 시 작품들이 궁금했다. 언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 물었다.

리준식 선생은 한국서 중학교 시절에 여기 저기에 시들을 출품해 왔는데 한번은 한겨레신문에 그의 시가 게재되어 실린적이 있었다고 회고하면서 그 때 쓴 시는 큰 홍수를 맞은 한국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 “쌀은 하늘이다”라는 제목으로 쓴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이민 생활을하면서 해외동포 언론들이나 북녘의 문학지에 많이 소개되었다. 어떻게 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물었다.

“한번은 광산기업주와 우리 광부들이 작업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충돌하면서 대결국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때 한국의 대사관에서 임정삼이라는 노무관이 우리 광산에 와서 중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노무관이 우리 광부들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고 오히려 기업주 편에 서서 행동하는 것을 보고 분노한 적이 있었고,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처참한 모습들을 독일의 제2방송을 통해 보면서 참을 수 없는 격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광산기업주와 우리 광부들이 대치할 때에 우리광부들이 한국대사관의 노무관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가 우리를 향해 너희들 한국의 가족들이 온전할 줄 아느냐며 협박조로 동족인 우리 광부들을 위협할 때 한국의 외교관이 이렇게까지 처신할 줄 몰랐었다”고 돌이키면서 그 때의 분노를 지금도 얼굴을 붉히며 상기시켜 준다.

리준식 시인은 그 당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뭔가”를 되풀이하며 자문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가공무원이 자기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기업주편에 서서 행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실망과 함께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실망과 증오심은 80년 광주항쟁때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대한민국의 군인이 자기 국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자기 국민들을 동물처럼 취급하면서 잔인하게 학살하고 무자비하게 죽이는 모습을 보고서 “내가 이런 나라 집권자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회의를 갖게 되었고 그 때부터 한국정부 당국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심정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러한 계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독일시민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독일의 헤미트 슈미트 총리까지 ‘3년계약으로 광부로 온 한국인들은 저런 나라에 돌아가기 싫은 사람들은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런 지침 때문에 그 당시 한국 광부들이나 간호원들은 독일에 영주하면서 독일 시민권자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준식 시인은 또 자신이 북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은 광부생활을 할 때 광산기숙사에 북의 출판물들이 배달되어 북녘사회에 대한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알게 되었다고 밝히면서 1989년 임수경 전대협대표가 북을 가고, 문익환 목사가 북을 방문하면서 통일운동의 열기가 한창 고조될 시기인 1990년 제1차범민족대회가 평양에서 열릴 때 독일 동포들을 포함하여, 재미동포, 재일동포, 재중동포, 재소련동포 등이 대거 북부조국을 방문하던 그 행사에 참여하게 됨으로서 북녘사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MAGE##> 그러한 행사들이 계기가 되어 해외동포들의 통일운동 행사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되었고, 90년부터 시작된 평양에서의 범민족대회에 참여하면서 우리민족의 살길은 오로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그는 지금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유럽지역본부 의장을 맡아 활동했고, 동시에 6.15공동선언실천 유럽지역위원회 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리준식 시인은 특히 자기의 활동에 대해 부인인 변정옥씨가 불평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 준데 대해 고맙다고 말하면서 이 두 부부가 다니고 있는 보흠교회가 한국의 민주화와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해 주고 있어 감사한다고 강조한다.

이들 부부는 요즘의 정세에 대해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대통령이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맺은 역사적인 6.15선언과 10.4선언의 남북화해협력과 평화번영에 대한 통일의 이정표가 이명박정권과 새누리당의 반북대결정책으로 이행되지 못하고 조국반도가 전쟁의 위험속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대해 가슴아프게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우리 해내외동포들이 해야 할 당면과제는 이러한 반민주, 반민족, 반평화, 반통일 세력을 청산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 투쟁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끝)

리준식 시인의 이멜: leedortmund@googlemail.com 연락전화: 독일 049-0231-529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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