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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80. 권영용 동지와 강동찬 동지를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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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9-12 11:47 조회1,4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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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80. 

권영용 동지와 강동찬 동지를 회고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불굴의 혁명열사 권영용동지를 회고해 본다

권영용동지는 강진 출신으로 1950년 6.25 합법공간 때 강진군당 당증과장을 했으며 9.28 후퇴 후 지리산 전남도당학교 분교에서 간부양성을 위한 교육을 받는 과정에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공세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적과 싸워 살아 남았다.

1952년 4월에 전남도당 지리산 전투지구당부가 결성 되었을 때 지구당 조직부 지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함께 투쟁하면서 알게 되었다.

1953년 1월에 지구당부가 백운산 전남도당부로 소환되었을 때 전남도당 88근위대 중대 정치지도원을 했다.

당시 근위중대 중대장은 우병철동지가 했다.

전남도당의 직속연대인 전남연대가 적들과 투쟁 중에 한 개 중대세력이 희생됨에 따라 근위중대가 전남부대로 개편되어 이중대가 되었다.

적들과 전투중에 중대장이 중상을 당하여 중대장이 되었다.

전남부대가 삼중대인데 이중대로 들어갔다. 1중대와 2중대는 전투중대이고 3중대는 후방중대였다. 나중에 1중대 동지들이 희생당하여 전남부대는 2중대가 1중대였다. 그리하여 전남부대는 1중대와 3중대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잘 싸웠으나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로 마지막을 고했다.

1954년 2/20일 백운산 옥용골에서 부대와 운명을 같이하여 생포되었다. 나는 중상생포되어 밤에 적들의 토굴에 들어 갔는데 마침 권영용 중대장과 같이 있었다. 적들은 중상당한 나에게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중대장에만 물어 본다. 2월21일 밝아지자 나는 광양읍으로 이송 되었다.

권영용 중대장동지는 남원 고등군법에서 15년을 받고 전주 감옥으로 이송될 순간이 었으나 3중대 부중대장이었던 김원섭놈의 변절 밀고로 사형을 받았다.

그리하여 사형수들의 대구감옥 이송에 따라 다른 사형수 동지들과 함께 한 사방에 있었다.

사형이 확정되어 1954년 12/24일 수색 사형장에서 총살 집행을 당했다.

당시 유족이 있어 사변호사까지 대었으나 효력을 발생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오늘에 와서 전국묘소 답사반이 묘소를 찾고 있는데 혹시 유족이 있어 시신이라도 고향선산에 안치했는지 무척 궁금해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강진농민회에서 권영용동지 유족을 수소문 해 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는 인적사항은 이것 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는 나의 조선 로동당 입당 보증인이고 52-54년 체포될 때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한 유일한 동지입니다.

참고로 강진에는 불굴의 애국투사인 김기호동지, 강동찬동지, 권영용동지 등 3분의 동지들을 합동 추모식을 올리기 바랍니다 . 이 3분은 강진의 유명한 불굴의 애국투사들입니다.

그래서 김기호 동지 외에 자료 2개를 내 아는데로 적었으니 참고하세요. 내년부터 강진 농민회 조통위가 추모식을 합동으로 함께 한다고 하니 무척 기쁩니다.)

2021. 8/5. 2022년 7/10 2023년 9월 4일. 동지인 김영승올림


(2) 불굴의 애국열사 강동찬동지를 회고해 본다.

강동찬동지는 강진출신으로 서울 동국대 3학년 재학중에 조국전쟁이 미제에 의해서 일어났다.

인민군에 의한 해방 세상이 되었을 때 자원해서 의용군으로 입대하여 적들과 투쟁하다가 일시적 9.28 후퇴를 맞이하여 북상했다.

1951년에 내려왔다가 적들에게 체포당하여 무기형을 받고 비전향장기수로서 대전 4사에 복역할 때 한 사방에 있었다.

강동찬동지는 누구 못지않게 적들의 무지막대한 탄압과 처우에 언제나 앞장서서 잘 투쟁했다.

앞장서 투쟁하다보니 소위 곤조통으로 지목되어 무지막대한 고문과 탄압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여 신경성 고혈압 환자가 되었다. 적들은 소위 곤조통이라 하여 치료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아 좁은 공간에서 개미체바퀴처럼 돌던 총 십분의 운동을 하다 혈압이 터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비전향말살책에 의하여 갖은 탄압을 자행했으나 마지막 생을 다할때까지 올곧게 사상과 양심을 지키다가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강동찬동지는 우리동지들 중 제일 많이 적들에게 안 죽을 만치 두들겨 맞고도 꿍꿍 앓으면서도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적개심과 증오심은 누구 못지않게 강했다.

전주에 이감가서 고혈압이 터젔을 때 같은 전우인 김도한 선생이 아래 시를 지었다. 

1980년 9월 하순이다.


<강동찬동지 졸도>에서

영광된 인민조국 내사랑 오직하나

삼십년 옥사리가 오히려 자랑인걸

안죽고 기어코 보리 반역도당 소탕을


김도한 선생은 출옥 후 석방되어 “옥중일월”이란 시집을 출판했다.

그때 이야기 중에 강동찬 동지의 가족관계에 있어서 어머님, 누이,동생의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이미 김도한 선생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살아 계지지 않을가를 생각한다. 시신도 어데 묻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강진의 자랑인 김기호 선생만 묘소만 있지 다른 두동지는 모르고 있다.


불굴의 애국열사 강동찬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만악의 근원이며 불구대천의 원쑤인 미제국주의 조선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들에게 생포 당하여 옥중 삽십년 투쟁속에서도 혈압까지 터져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일념을 고수하신 업적은 감옥 역사에 한 페이지를 기록하여 길이 길이 남을 것이니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잊으시고 자주 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3년 9월 4일 필자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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