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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6. 출옥 후 직장은 몇 번이나 옮겨 다녔는가 회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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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8-25 11:24 조회1,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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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6

출옥 후 직장은 몇 번이나 옮겨 다녔는가 회고해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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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989년 9월5일 사회안전법 폐지로 비전향출옥 후 바로 10월에 청량리에 있는 자동차 세탁소에 취업했다.

이는 나의 조카사위가 베어링 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통해 쉽게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자동차 세탁공장 사장이 이북출신이라 부려먹기만하고 먹는문제와 복지문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하루 쉬지 않고 자동차를 50여대씩 닦았다.

그리하여 겉은 건강하게 보이지만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직원들에 물으니 우리는 괜찮은데 아저씨는 배가 그리 고프냐고 한다. 그렇다고 본인 신분을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직원은 여자 일명 남자 4명이었다. 남자는 모두 20대였다.


다른 직원들은 담배 필 시간을 갖는데 나는 담배도 피지 않기 때문에 그냥 차닦는 일만 열심하고 있었다.

하도 배가고파 사장에게 말을 했더니 그리 배가 고프면 라면이나 먹으라고 한다. 이것도 라면 먹는 시간을 주지 않고 한 말이다.

처음 들어가 일하는데 다른 직원들은 차 거죽만 닦고 나보고는 차안을 청소하고 닦으라고 한다. 사실 차안은 청소하고 닦는데 매일하다보니 가래침이 새까맣고 공기가 그리좋지 않았다. 그것도 군말 없이 했었다.

조카사위는 얼마간 참고 견디면 사장을 시켜 줄 터이니 그리 알고 일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할 수는 없었다.

이북출신 사장은 잔소리가 심하고 마치 노예처럼 대하고 일을 시킨데 대하여 그대로 받아드릴 수 없어 이곳 아니면 밥벌이 할 수 없을까 하고 잘해 처먹으라 하고 직장에서 뛰쳐나왔다. 모든 직원들은 아쉬워하고 있었다. .

나는 감옥에서 침구공부를 해서 침놓을 줄도 알지만 그 계통에서 일하려하지 않고 몸으로 때우는 직장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두 번째는 임방규동지의 소개에 의하여 영등포에 있는 엘리베이터 부품공장의 과장으로 취직했다.

직원은 5-6명이다. 취직해보니 나는 사장과 같이 밥상에서 밥을 먹는데 직원들은 밥상도 없이 땅바닥에 앉아서 먹는다.

이런꼴을 볼 수 없었다

사장에게 밥상 다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어야한다고 말했으나 시큰둥하고 만다. 직원들에게는 사장에게 요구하라고 자꾸 이야기 했다.

이제껏 직원들이 마무 말 않더니 내가 들어온 후는 이것저것 요구조건이 많아졌다고한다.

나는 장부 정리만 하면되는데 한가한 시간이 많아서 노는 것보다 작업장에 나가 한가지 기술이라도 배우기 위해서 직원들과 같이 일하기도 했다. 직원들은 좋아라 한다. 괴장급여는 27만원이었는데 직원급여에 비하면 턱 없이 작았다. 사장은 나의 이력을 좀 알고 있기 때문에 과장대우를 해주었지만 급여는 형편 없었다.

그리하여 밥도 밥상 위에 올려놓고 앉을 의자도 자기가 만들어서 앉아 먹으니 노예가 아닌 인간다운 면이 있어 보기도 좋았다. 그런 중에 90년 출옥한 장기수 환영사건으로 자동 해고 되었다.


그후 나의 큰조카가 영등포에서 기계공장을 차렸는데 거기서 일했다. 3부 5부 구멍을 뚫는데 지금 같으면 자동기계로 뚫지만 90년대는 중소기업들에서 사람의 힘으로 뚫으니 겨울인데도 땀이 억수처럼 흐로고 있었다. 도저히 힘에 부쳐 일을 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다음에 청량리 역 롯데벽화점 경비로 들어가 격일제로 경비일을 하다가 여의도에 새로운 증권회사가 새로 생겨 당시 용역업체이기 때문에 반장을 비롯한 3명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내가 글씨도 잘 쓰고 장부정리도 잘 하기 때문에 반장이 지명하여 함께 가게 되었다.


증권회사는 노조가 있는데 당시 부산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인모선생이 조선으로 송환될 때에 이종 김용규 최남규 한창우 김영승과 함께 병원에서 만나 인사하고 봉고차에 실려갈 때 사진 찍은 것이 한겨레에 보도됨으로 인하여 내 정체가 폭로되었다. 그리하여 증권회사 노조도 알게되어 가깝게 지내게 되었으나 회사 직원들이 거의 알게 되고 회사 소위 간부들도 알게 되어 경비하는데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다른 경비는 다 말 안하는데 너만 말하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 때부터 감시가 심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사 총무과장이 용역업체에 말하니 용역업체에서 결국 대기 발령을 내려서 나오게 되었다. 그후 여의도빌딩 경비로 근무하게 되었다. 빌딩경비반장을 경비인원도 소개시켜준 일이 있고 해서 알게되어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 주차장 근무를 하는데 운전하고 싶은 생각이 꿀같았다.

그리하여 회사간부들 차를 빼고 박고 하는데 잘하였지만 한번은 회사 감사차량을 주차장 정문에서 후진하다가 정문모서리에 들이받아 부서지게 되었다. 그후 부터는 일체차량을 손 못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출근시간에 차를 놓고 가면 경비들이 홈에 넣고하는 데 내가 다시 차를 홈에 넣는 것을 감사가 상층에서 보고 나무랬고, 그것으로 인해 해고 되었다. 집에 있으면서 자동차학원에 다니고 운전면허증을 땄었다.


그후 하안동 아파트가 들어서 경비에 들어갔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신망을 얻어 격일제 근무 하는데 좋았다. 그런데 다른 격일제근무자가 이북출신인데 너무 딱딱하게 대하여 아파트 주민들의 인심을 잃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관리사무소에서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모략이 제기되어 해고 당했다.


그후에는 논현동 주차장 근무에 운전면허증도 있고 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역시 격일제인데 돌아가신 왕영안선생이 하고 있어 단 둘이 격일제로 근무했다.

그후 신념의 고향으로 올라가서 작고한 조창손동지가 근무하다 못하게 되어 김해섭선생이 근무 중 급발진사고를 일으켰는데 사장은 나보고 나무란다.

그때는 급발진사고가 가끔 있었는데 인정하지 않던 때였다.

사장은 그만두라고 까지 막말을 쏟아냈다. 참고 견디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에 말지사 독자사업부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신념의 고향으로 올라 간 이경구동지 사업을 인수 받고 일하다가 여러파동을 겪더니 말지사는 폐간되고 지금은 “민중의 소리”만 남아 활동하고 있다.


말지에 있다가 민족21에 가서 독자 사업하다 그만두게 되었다 민족21은 쥐박이 (이명박 정권) 때 5.24 조치로 금강산 통로가 막히고 간첩조작으로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현재는 횡단보도 지킴이를 하고 있다. 4년되었다.

월10회일하는데 7시-9시까지 하고 27만원 받는다.

그리고 운전면허증은 반납했다. 면허증만 가지고 있지 운전이 생활수단과 연결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옥한지 30여년 되고 있는데 직장다운 직장은 한 번도 다녀보지못하고 말년이 되고 있다.

나름대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내나이에 직장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일환이지 전부는 아니었다.

2023년 8월 19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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