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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5. 백절불굴의 혁명투사 류석우동지를 회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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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8-20 11:30 조회1,4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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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5

백절불굴의 혁명투사 류석우동지를 회고해 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류석우동지는 전남 나주군 금천면 출신으로 알고 있다.

구빨찌 출신으로 간부로 투쟁한 것이다.

필자가 입산해 불갑지구당부에 있을 때 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있었다.

1951년 2월 20일 불갑산 전투에서 새벽 2시에 나주군에 있는 금성산으로 남은 지구당 성원들이 이동할 때 총책임자였다.

불갑산은 연락거점만을 남기고 다시는 유격투쟁을 할 수 없어 불갑산 지구당이 모두 장흥에 있는 유치내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갑지구당과 유치지구당이 1951년 4월 20일 화순군에 있는 화학산 각슈바위 능선에서 양지구당 지도부가 만나 합치는 방안을 논의 할 때 류석우부위원장동지는 남은 지구당 성원들을 책임지고 통솔하기위하여 화학산골짝에 잠복해 있었다.

전세는 오후 2시경까지는 방어가 가능했으나 화학산 상봉넘어 화순 리앙철도가 있는데 학도병들을 꼽배로 실어다 퍼부어 화학산 원능선에 올라 우리무장대와 격렬한 싸움을 하였는데 실탄 부족으로 분산 후퇴를 하는 바람에 적들은 원능선을 점령하고 박격포 중기 경기 등 뻔히 보이는 곳에서 집중사격을 가하여 우리 동무들이 삼대같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때에 류석우 부위원장동지는 단 한사람이라도 살아 나가야 하기 때문에 배낭은 낙엽속에 묻고 간편한 몸상태로 분산해서 탈출을 시도하도록 했으나 결국 지구당 성원들은 포위망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필자만 살아나오고 모두 전사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대부분 비무장 성원들이기 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들의 총탄에 전사한 것이었다.

이때 필자는 살아나와 4월 21일 오후에 김용우위원장동지를 비롯한 각슈바위 능선에 있던 동지들만 살아 있어서 무지개재 능선에서 적정을 살펴본 바 오후 4시경 되니 적들이 빠져나간 것 같아 전사한 지구당 동지들 시체라도 묻어주기 위해서 가만히 괭이와 삽을 들고 경각성을 높이며 찾아 갔었다.

능선에 두군데서 30여명씩 무더기로 죽여서 그 흘린 피가 폭70-80m간격으로 능선에서 골짝으로 4월에 돋아난 풀잎을 쓰러뜨리고 마치 홍수져서 갈대숲을 쓰러뜨린 것 같이 흘러내린 자국이 빨갛게 뭉쳐 있는 것을 보면서 지구당성원들이 전사한 골짝이를 내려가는데 영승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리고 들어보니 류석우 부위원장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그래서 소리나는 쪽을 향해서 가서 보니 개울가 숲속에 쓰러져 있었다.

해는 지고 캄캄했다 별빛만 총총이 나 있었다.

그래서 우선 산 부위윈장 동지 모셔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가마니를 담가로 만들어서 부위장동지를 모시고 나주 다도면 도동리 도롱굴마을 지구당트에 모셨다.

도롱굴 마을 개울가에 비트를 파서 그 비트안에서 약 한달간 간병을 했다.

그 과정에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알 개 되었다.

유치내산에 있는 당단체와 각종단체들과 동나주군당 단체들은 화학산에 집중하지 않아 살아남았고 그 외 단체 동무들이 화학산에 집중된 사실을 적들은 정보망을 통해 알았었다.

그러기 때문에 적들도 화학산에 집중하였다.

류석우 부위원장동지는 4월20일 첫날 집중포격으로 우측 허벅다리를 맞아 뼈가 부서졌다. 양 팔은 쓸 수 있었는데, 비장한 배낭에 쌀 한두박식을 넣어 있어서 적들의 수색작전에서 비장한 배낭을 떨떨 털어서 내버리는 바람에 산골짝은 걸레를 널어놓은 같았다.  땅에 흘린 쌀을 한웅큼 주워서 무명베 쪼각이 있는 것을 주워 찢어서 헝겊에 싼 쌀을 입으로 씹었다. 그리고 배자치를 찢어서 끈으로 만들어 개울물에 담궜다가 끈을 당기어 목마를 때 한모금씩 마셨다고 했다.

총을 맞고 피를 많이 흘리면 물을 먹고 싶은 마음이 꿀 같은데 참고 견디었다고 했다.

옆에 있는 동무들은 피를 많이 흘려 참지 못하고 개울가에 기어 내려가 아무리 물마시면 죽는다고 말했지만 듣지 않고 마시다 물에서 죽은 동무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숲속에서 죽으면 어느 숲속에서 죽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개울가 길가 숲속에 있으면 시신이라도 묻어 줄 동무들이 있을거라해서 밤새 기어서 개울가 숲속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또 4월21일날 날이 새던 쯤에 적들이 수색 작전을 펼치는데 시신도 총을 쏘고 시신을 뒤집어 날창으로 찌르고 이미 죽었다고 하며 일일이 그렇게 하고 오는데 자기 자신 한테 와서는 피투성이 되어 이미 죽어있다고 하니 그래도 쏘고 찔러보라고 상관놈이 말하니 한방 쏜 놈이 뒤집어 날창으로 찔러서 죽은체 하니 죽었다고 다음 동무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하였다는 것이다.

속담에 호랑이 한테 물려도 제정신만 차리면 살아 난다는 말이 있듯이 류석우 부위원장동지는 적들의 무지 막대한 잔인한 총탄을 맞고도 제정신을 차리고 죽은체 하여 살아 남았다.

이렇게 살아난 부위원장동지는 적들의 침공작전 가운데 마냥 도롱굴마을 비트에서 치료할 수 없어서 금덕리 마지막 지점에 산 비트를 파서 그 때부터 위원장동지 보위병이 목포 출신 인데 그가 밤이면 찾아가 밥을 넣어주곤 했었다. 두서너달 있다가 칼빈총을 들고 그가 자수하는 바람에 그 비트에 그냥 놔둘 수 없었기 때문에 지하 연락선을 통하여 금천면 지하 비트에 있었는데 적들에게 탄로나서 적들은 그를 마을 뒷산에 끌어다가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불굴의 혁명열사 류석우 동지시여!

동지는 적들의 무지 막대한 총탄을 맞고도 살아 남은 경험과 산 교훈은 빨찌산 투쟁사에 중요한 일페이지 기록을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희생당한 것은 미제와 그주구들을 분쇄할 때만이 동지 죽엄의 참뜻을 실천으로 구현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제 모든 아픔과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3년 8월 20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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