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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김영승 회고록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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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10-07 10:00 조회2,2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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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과 시애틀한마당에서 지난 2년여에 걸쳐 연재하였던 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의 빨치산 회고록이 책으로 출판되어, 2022년 10월 14일 출판기념회를 열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 책을 통하여 선배 애국자들이 신념을 지키고 정의로운 세상,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하나뿐인 목숨까지 바치며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후대들이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민족통신은 애국자 김영승 선생의 회고록 출판을 크게 축하하며, 선생께서 지금까지 굳센 의지와 신념으로 진보진영과 통일운동권 모두의 본이 되고 헌신적으로 걸어가는 통일운동의 길을 더욱 건강하게 걷기를 기원합니다. [민족통신 편집실]





‘빨치산에서 비전향장기수가 되다’

십대 소년에 품었던 뜻을 지키기 위해 ‘전향’이라는 의미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지켰던 신념의 강자!

소년 빨치산 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의 회고록이 출판됩니다.! 험한령 넘을 때도 쉬지 않고 곧추 가셨던 빨치산 김영승!

선생께서 지키려고 했던 신념과 가치 잊지 않겠습니다.

출판기념회에 많은 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일시 : 2022년 10월 14일(금)오후4시

장소 :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학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

후원 : 농협 084-12-111441 김영승



김영승 선생은 1935년 전남 영광군 모량면 삼학리 신성부락에서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아버지가 20년간 머슴살이와 소작으로 생계를 꾸렸고 당시 큰 형이 독립군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습니다.

해방 후 누나는 빨치산의 부탁으로 인공기를 수놓아 주는 일을 한 전적이 있었고, 빨치산에게 밥해준 일도 있었습니다.

김영승 선생은 좌익청년단체의 영향을 받아 경찰 앞에서도 바른말을 하는 등 그의 가족들은 빨치산과 연계되었습니다.

한청이라는 청년단체 주도하에 전쟁이 나기 전 1949년도부터 전쟁준비의 일환으로 주민들을 매일 불러 죽창훈련을 시켰는데 누나도 어쩔 수 없이 동원되어 훈련을 받으러 가곤 했습니다.

그해 여름, 빨치산에 의해 경찰이 근무지로 가기위해 탄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로 버스에 타고 있던 경찰 7명중 6명과 임신한 민간인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아버지가 그들을 도왔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한편 친분 있는 경찰과 다투던 체육선생님이 빨갱이로 몰려서 사형 당하는 등 한국전쟁 전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군대나 경찰이 주둔하면 처녀들을 강간하는 일이 있어 그들 눈에 띄지 않으려 숨어 지내곤 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후 광주에 인민군이 들어오자 형제들은 연맹에서, 김영승 선생은 소년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인민군이 후퇴할 때까지 연락사업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전세가 바뀌어 인민군이 후퇴하게 되자 가족들 모두 불갑산으로 입산하였고, 그는 16세에 소년빨치산이 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김영승 선생은 약 4년간 영광 불갑산, 장흥 유치내산, 광양 백운산, 구례 지리산 등을 다니면서 빨치산으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습니다.

수많은 동지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때로는 자신 또한 사지에 내몰리기도 하면서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시기에 이현상, 김선우 등 유명한 빨치산 간부들을 만났고 김영승 선생은 동지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인생의 지표를 명확하게 세워나갔습니다.

그는 1954년 광양 백운산 옥룡골에서 총상을 입고 국군에 생포되었고 체포당시부터 국군과 정보기관의 갖은 회유와 협박이 있었지만, 재판받을 때 동료의 밀고로 그간의 행적이 모두 드러나자 ‘국군 5인 사살’이라는 죄로 군법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후 감형이 되어 다행히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대구, 김천, 안동, 대전, 목포, 광주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수형생활을 했습니다.

1974년 4월 28일 그의 만기출소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감옥 안에서 그가 반공법을 위반하였다며 출소와 동시에 2년형을 추가 선고하여 출소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리고 1976년 2차 만기 출소와 동시에 사회안전법 발효로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수형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강제 전향을 유도하기 위해 고문과 구타를 자행하였고, 김영승 선생은 이러한 폭력 앞에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구타와 물고문 등이 수시로 가해졌지만 자신이 소년시절부터 품어왔던 이념과 사상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강제 전향을 거부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귀의 청각을 상실하기까지 했습니다.

1989년 사회안전법 폐지로 그는 35년 9개월의 수형생활을 청산하고 사회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온 것일 뿐이었습니다. 지속적인 국가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력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난 시간은 감옥에서 강제 전향으로 가해진 구타와 고문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인천에 거주하며, 통일관련 단체에서 열심히 통일운동을 하면서 노년을 보내고 계십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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