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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금선사에 안치된 신념의 강자 동지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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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9-01 08:19 조회2,4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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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묘소답사반은 제주서 부터 시작해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2022년 8월 28일에 답사한 서울 금선사에 우리 동지들 20명이 안치되어 있으며 동지 부인들이 3명이 안치되어 있다." 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이 동지들의 묘소를 찾아 애국자 동지들의 간고했던 투쟁의 삶을 회고하며 기록을 남기는 가운데 서울의 금선사에 안치된 동지들을 찾아 올린 글을 싣는다. [민족통신 강산 기자]


[김영승 칼럼] 금선사에 안치된 신념의 강자 동지들을 찾아서





신념의 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인 금재성동지시여!


금재성동지는1920 2/25일 충남 대전시 삼성동에서 출생했다.

1937년에 부모님과 함께 원산으로 이사하여 원산 석유공장에서 노동에 종사했다.

1943년에 항일 운동하다 검거되어 김천소년 감옥에서 3년 복역중에 1945년 8.15 조국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출옥 후 평양학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강원도 보안대장을 했다.

1947년에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금활 충렬)

1948년에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했다.

1955년도에 전기 전문공업학교 교장을 했다.

1955년도에 공작원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1957년에 대전에서 체포되어 15년을 선고 받고 비전향자로서 대전 4사에서 필자와 같이 1990년대에 한방에서 생활도 했다.

.

이때 ‘문경고개‘란 노래도 배웠고 손재주가 좋아사 마미조리(일본어) 잘 만들어 인기가 대단했다.

금재성동지는 1972년 8/24일 대전감옥에서 비전향 출옥했다.

필자와 같이 한방에서 달포 살면서 이야 한 것 중 기록되지 않는 것이 2가지 있다.

첫째는 도 보안대장을 할 때 중성 계급장을 달았으며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때 연대장을 거치지 않고 대좌로서 여단장을 하다가 후퇴를 맞이 했다.

후퇴 과정에서 맨날을 먹지 못해 하루 저녁에 당시 연락병이 마을에 보급나가서 약간의 먹을 것을 보급해 왔는데 연락병은 먹은 줄 알고 받아먹고 나서 보니 그 배고픈 것도 참고 일체 먹지 않고 왔다는 것을 알고 그후 당회의에서 자기는 여단장 자격이 없다고 연락병이 여단장 자격있다고 자기 비판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후퇴 과정에 자기 본부대로 찾아가는 것이 기본 임무인데 이천 교미탄에서 최현 군단장이 자기가 보증할 터이니 우리부대에서 같이 싸우자 해서 투쟁했는데 그후 본부대에 찾아가니 본부대를 이탈했다고 군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무리 최현장군을 증인으로 세웠으나 당시만 해도 연락이 되지 않아 아무리 증인을 세워도 믿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연락이 되어 최현장군이 증인을 섬으로 하여 총살을 면했다는 것이다.

금동지는 1975년 4월에 월남이 해방되어 박정희는 비전향자들이 전쟁나면 모두 참여한다해서 악법인 사회안전법을 만들어서 야당탄압은 물론 전국 비전향자들을 전부 한날 한시에 잡아들여 보안감호 처분을 시켜 청주보안감호소에 구금시켰던 것이다.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어 8월 8일에 당시 고혈압 환자들이라 우리 보다 먼저 비전향출옥했다.

금재성동지는 우리동지들과 같이 투쟁하다가 1998년 6/2일 췌장암으로 보라매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17일에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인 금재성 동지이시여!

동지의 일생은 조국의 현실에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으나 우리 후대 들에게 경험과 교훈을 주는 알뜰한 작풍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 길 위해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참고@@ 마지막 하고픈 말은 건강할 때 녹취해야지 병원에 마지막 누워 있을 때는 이미 시간은 허용치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금동지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하려고 했는데 낙성대 동지들이 빨리 죽는다고 얼굴을 붉히며 입절음 까지 한 사실이 있는데 살아생전 녹취록이 없어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고 있습니다. 결국 녹취를 못하고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신념의 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인

안희숙 동지를 그리면서


안희숙동지는 1929년 1/13일에 군산 옥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노동에 종사하면서 머리가 너무도 영리하여 우리 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방후 2.7구국투쟁과 5.10단선단정 반대 투쟁에도 참가했다.

1950년 9.28 후퇴 때 전북 장안산에 입산하여 장수유격대에서 투쟁하였다.

1952년 2월에 적들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의해서 운장산에서 체포당하였다.

결국 1심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상고심에서 15년을 받고 복역하다가 1967년에 비전향 출옥했다.

출옥 후 여기저기 노동자 생활하며 호구지책을 유지하면서 조선으로 올라갈 기회만 생각하며 일선까지 갔으나 탈북자로 체포당하여 반공법으로 2년을 살았다.

비전향으로 출옥하여 결혼까지 하여 귀여운 딸 하나를 낳았다.

적들의 감시를 받다가 1976년 5월에 비전향을 이유로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감호처분을 받고 청주보안 감호소에서 필자와 같이 복역했다.

옥중투쟁에서 인간이하의 처우속에서 폐결핵까지 걸려 한쪽폐는 못쓰고 한쪽 폐만 가지고 사는데 적들은 이의 약점을 이용하여 비열한 강제 전향을 자행했으나 조급도 흔들림 없이 완강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냈다.

목소리가 남다른 것도 비전향 말살책에 강제급식을 하는 과정에서 목이 다쳐서 정상적인 발음을 못내는 불구의 몸이되고 말았다.

이렇게 불굴의 옥중 투사로서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했다.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 폐지로 1989년 9월에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당당하게 비전향 출옥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옥 후 비전향 장기수 모임인 통일 공장 회원이며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이며 양심수후원회 회원으로서 맹렬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필자와 같이 투쟁하면서 평소에 막걸리를 좋아해 퇴근 길에 포장마차에서 자주 막걸리 받아서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항상 불행하게 죽은 귀여운 옥동자 딸이 감호된 후 주위에서 “빨갱이 딸이라고 놀려대는 상황속에서 시름 시름 앓다가 자기 엄마에게 ”아빠 나올 때까지 다른데 시집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한마디 남기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지금도 방벽에는 죽기전 사진 한장이 걸려 있어 아빠 엄마는 물론 보는 사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한다.

안희숙선생은 항상 죽은 귀여운 딸을 생각하며 막걸리로서 아픈 맘을 달래기도 했던 것이다.

때로는 술을 많이 들어 집찾아가는 길을 잃기도 했다.

1993년 4/7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맘놓고 잔득 술을 마시고 혼자 집문 벽돌 층층대 위해서 걸어내려오다 넘어져 굴러 떨어져 다시 소생하지못하고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가슴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이신 안 희숙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조국의 자주독립 투쟁전선에서 적들의 갖은 탄압과 가시덤풀속에서서도 포기하거나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속에서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살다 가신 동지임을 역사는 빛나게 기록할 것이며 우리 후대들에게 경험과 교훈을 새겨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묘소는 금산사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사모님은 귀여운 따님과 안희숙선생을 생각하

며 홀로 살고 있습니다.

2022년 8월 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올림.




(제2신)

신념의 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인 정대철 동지를 그리면서


정대청동지는 1927년 평북 용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했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조선인민군 소위로 남해여단에 편입되어 중대장을 했다.

1950년 9.28후퇴를 맞아 북상 루트가 차단되어 지리산 전남빨찌산투쟁을 하게 되었다..

인민군소좌로 진급하여 지리산 빨찌산 군관학교 교원이되었다.

정대철동지는 1951년 겨울 동기에 대대적인 적들의 토벌공세에서 생포가 되었다.

광주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15년 징역을 선고 받고 감옥생활하다가 1960년 10월에 감형을 받아 출옥하였다.

그러나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감호처분을 받고 청주보안감호소에서 2년에 2년씩 갱신을 당하며 무기아닌 무기징역을 살게 되었다.

1989년 사회안전법폐지로 비전향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부산에서 살다가 한산도로 가게 되었다. (왜 한산도로 가게된 것은 모른다)

한산도에서 살다가 1990년에 소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하는 비보를 남기고 말았다. 비보 소식을 듣고 우리 선생들이 갔을 때는 목매 자살한 나무는 베어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비운을 안고 시신을 근처 산에 묻고 비통한 심정으로 간소한 장례를 치루었다.

그후 몇 년 후에 거리 관계상 참배하기 힘들어 시신을 파서 파주보광사 입구에 모셨다가 극우 분자들에 의한 묘소 파헤치는 난상을 겪고 금선사에 모시고 있는 것이다.

유서 내용은 “본인은 1990년 11월 21일 4시10분을 기하여 세상을 하직합니다... 당과 조국 앞에 무수한 과오를 범했고 앞으로도 씻을 길 없어 부득히 이 길을 택합니다. 일편단심 자기 사상을 고수 했을 뿐 이 세상에 왔다가 아무런 한 것도 없이 흐린 발자취만을 남기고 말았습니다”라고 쓰고는 떠난 것이다.

정대철동지의 자결은 소위 반공일변도인 사회 풍토속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90년 12월 4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정대철동지 추도식을 한다는 광고를 낸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를 품에 안은 빨찌산 출신의 추모식에 출옥한 빨찌산 출신, 재야 인사들이 많이 참석하여 추도식을 거행했다.


불굴의 애국투사인 정대철동지시여!

동지의 삶과 유서는 위대한 조국해방전쟁과 전선투쟁에 나선 우리 동지들과 후대들에게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마지막 생을 보내야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인가에 대하여 고귀한 경험과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동지가 좀 더 살아서 올곧은 투쟁을 했으면 하는 바람과 아쉬움과 함께 출옥 후 동지를 세밀히 살피지 못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 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올림






신념의 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인 손윤규 동지를 그리면서


손윤규동지는 1923년 10월 6일에 출생했다.

손동지는 1945년 8.15광복을 맞아 당에 입당했다.

1947년에 미포고령 위반으로 8개월 감옥생활도 했다.

1950년 9.28후퇴를 맞아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했다.

그후 적들에게 체포당하여 1955년에 사형선고를 받고 1960년에 무기로 감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1974년부터 비전향말살을 위한 무자비한 고문구타를 당하였다.

이를 반대하여 집단 단식투쟁을 하는데 놈들의 3차에 걸친 강제급식 과정에서 운명하고 마는 분노의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적들은 시신을 대구 공동묘지에 묻었다.

다른 감옥은 우리 동지들의 시신을 공동 묘지에 묻었다가 공동묘지가 재개발되어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나 대구 감옥만은 공동묘지에 묻힌 그대로 있는 것이다.

법무부에 문의한 결과 공동묘지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고 가족이 있는 분들에 한에서 절차를 밟아 시신을 인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손윤규동지 조카분을 찾아 통일광장 선생들과 대구 범민련을 비롯한 인사들과 함께 공동묘지를 찾아 시신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때 기세의 동지도 가족들이 찾아갔으나 주소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

손윤규 동지 시신을 파보니 머리가 잘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죽은 시신을 해부했다는 것임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삼지 않았다.

다만 그후 국가인권위에 최석기동지 박융서동지 김용성동지 변영만동지 손윤규동지 등 5명을 제기하여 확정 통고를 받고 당시 이 동지들의 죽음이 전향제도 폐지에 공헌했다는 취지에서 민주화 운동에도 관련 있음으로 보상심의 위원회에서 다루었으나 결국 기각되고 말았다.

이유는 당시 조 중 동이 “어떻게 간첩이나 빨찌산 출신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가 될 수 있느냐” 하고 대서특필하니 색깔론에 몰릴까 두려워서 민간인측 인사들도 반대표를 던지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속에서 민사 소송이라도 했으면 되는데 누구하나 맡아 할 사람이 없어 기회를 놓치고 만 아쉬움을 남겼다.

그것은 사람이 고문구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국가기관이 인정함에도 그에 대한 일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굴의 애국투사인 손윤규 동지시여!

손윤규 동지의 일생은 반제 반미 투쟁전선에서 조국과 민족해방을 위해서 한생을 바친 위대한 영웅으로 역사는 기록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우리 후대들은 동지의 빛나는 경험과 교훈을 거울 삼고 76년 동안 점령군으로 들어와 핵전쟁 군사연습까지 하는 미제와 윤폐거리들을 몰아내는 투쟁에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어 가열차게 투쟁할 것을 가일층 다짐하는 바입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시신은 화장해서 금산사에 안치되었습니다. 조카분이 생존해 있는데 연락 두절되고 있습니다.

2022년 8월 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제3신)

신념의 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불굴의 애국투 사인 최남규 선생을 그리면서


최남규 선생은 1912년 함북 명천군에서 출생했다.

1913년에 온 가족이 북간도로 이주하여 충신시 명신소학교에 입하였다.

1929년에 결혼하여 1남(명철) 3녀(순희, 순정. 순복)를 두었다.

용정 영신중학교에 입학하여 신문 배달등 잡일을 하면서 고학했다.

1932년에 만주국 국립 사범대학 지리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937년에 연길 사범하교 교원을 했으며 1945년 부터 47년까지 간도성 보건계장을 하다가 간도성 임시정부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1948년 1월에 평양으로 돌아와 시학(장학관)으로 교육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1951년 3월부터 청진 교원대학에서 지리학 교수로 6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1957년에 공작원으로 내려와 9월에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고 대전감옥에서 비전향으로 살다가 1973에 출옥했다.

출옥 후에 받아줄 가족 친척들이 없는 관계로 고물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1975년 7/24일에 비전향을 이유로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보안감호처분을 받아 청주보안 감호소에 재구금된 것이다.

감호소 생활 중 집단 단식투쟁이 있었으나 김용성동지와 변영만 동지가 희생되는 바람에 강제급식이 중단되어 살아 남았다.

단식 중단 후 적들의 탄압이 심하여 많은 전향자가 속출했다.

그리하여 감호자들은 3사방이 두사방으로 줄어 들었다.

이 때에 최고 노인 환자들을 독방에 놔 둔다는 것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특히 죄없는 피감호자들이기 때문에 내가 최남규선생을 모실터이니 허락해 달라고 싸워서 두사람은 한 방에 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방에 최남규선생을 모시고 출옥 하는 그날까지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되니 최고령자로 신념의 고향으로 올라갔다가 서거한 이 종선생과 임방규선생과 권낙기 선생들 3명이 한 방에 생활하다 출옥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정세가 여소야대 정국이었는데 사회 안전법에 대하여 국내는 물론 국제적 규탄을 정권은 견딜수 없어 폐지되는 바람에 우선 고령 환자들을 먼저 석방시켰던 것이다. 감호소 15년을 마감하고 1989년 8/8일에 비전향 출옥했다.

출옥 후 부산양로원에 계시다가 서울로 올라 와 민중탕제원등을 거치다가 1994년에 낙성대 만남의집 마련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다.

1999년 8/31일에 폐렴등이 발생하여 보라매 병원에 입원했다가 12/10일에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만 것이다.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인 최남규 선생이시여!

최남규선생은 일제 교육을 받아 일제치하에 복무하다가 1945년 조국광복을 맞아 받은 교육을 조국과 인민위에 옳게 적용한 교육자 일뿐 아니라 전선의 투사로서 경험과 교훈을 우리 후대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청주보안감호소 있을 때 피감호자 명단을 살아나가 남겨야 하겠다는 굳은 이념으로 매일 밤낮 가리지 않고 외우셨던 그 투지를 일관되게 보였던 옥중투사임을 혁혁하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선생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까마득히 잊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동지들의 감호된 번호 형기 이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였습니다.

최남규선생을 옥중 투쟁 기록자“ 임을 천명합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우리 후대들이 길이길이 기리겠다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단 일동 올림.



신념의 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 불굴의 애국투사이신 권양섭동지를 그리면서


권양섭동지는 1917년에 경북봉화에서 출생했다

1943년에 종형과 함께 만주로 가서 항일 빨찌산 투쟁을 하는데 종형을 도왔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봉화 고향으로 내려와 활동했다.

그리하여 대구지역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에 적들에게 체포되어 4년간 감옥을 살기도 했다.

1972년도에는 경북지역 통혁당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이때에 온 가족이 검거되기도 했다.

권양섭동지는 재판에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을 받았고,

부인((조석귀님)은 일심에서 5년 이심에서 3년 6개월로 강형되어 만기 출옥했다.




아들인 권낙기님은 무기에서 10년으로 감형되었고 동생은 소년수라 이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후 1993년에 형집행정지로 22년만에 3/16일에 석방되었다.

아들인 권낙기는 10년 만기를 다 채웠으나 비전향을 이유로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안감호처분으로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필자와 같이 살다가 사회안전법 폐지로 1989년 9월에 비전향 출옥했다.

권양섭 동지는 옥중의 후유증으로 직장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1997년 3/18일에 운명하고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불굴의 애국투사인 권양섭동지시여!

권동지의 일생은 일제로부터 미제에 이르기 까지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전선에서 싸우다가 온가족이 감옥생활하는 진짜배가 혁명 투사의 일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미제보다 악독한 직장암에 걸려 주위의 피해를 걱정해 곡기를 끓고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야 만 동지의 마지막을 회고 할 때 우리 후대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며 동시에 어떻게 마지막을 보내야 한다는 고귀한 경험과 교훈을 남기어 길이길이 새길 것입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가족과 자제들도 권동지의 참뜻과 같아 오늘도 내일도 이땅에서 미제를 몰아내는 투쟁에 가열차게 투쟁하고 있으니 안심하기 바랍니다.

유분은 원래 파주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금선사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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