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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진 칼럼] 불후의 명저이자 유일한 생명의 책 세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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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8-30 11:03 조회2,5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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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은 세뇌된 인간들에게 량심과 지혜의 밝은 빛을 주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인류와 지구도 능히 구원할수 있게 해줄 불후의 명저이자 유일한 생명의 책입니다" 세기와 더불어를 여러 차례에 걸쳐 읽고 또 읽으며 깊이 이해하고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는 김웅진 박사의 글을 싣는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웅진 칼럼] 불후의 명저이자 유일한 생명의 책 세기와 더불어 외






불후의 명저이자 유일한 생명의 책 세기와 더불어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암흑상태에 있는 절망적인 좀비들이라도 능히 빛과 영광의 세계로 구원해낼수 있는 불후의 명저이며 유일한 생명의 책입니다. 민족의 앞길을 환히 여는 책 !

그래서 민족의 원쑤들이 지난 30년동안 아무도 읽지 못하게 피눈이되여 금지시킨 책인것입니다.

회고록은 세뇌된 인간들에게 량심과 지혜의 밝은 빛을 주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인류와 지구도 능히 구원할수 있게 해줄 유일한 책입니다. (사람을 만들어주는 책)

8천만 조선동포들은 빠짐없이 되풀이 읽어야 하며, 모든 인류가 탐독해야 합니다. 영어, 중국어, 로씨야어를 비롯한 여러가지 언어본이 있습니다.

적지않은 중국사람들이 관심있게, 주의깊게 읽었고 (중국 동북항일혁명의 력사이므로), 미국의 학자들도 열심히 (오류나 시비거리를 찾아내려 혈안되여) 읽은 책입니다.

아무도 오류를 찾지 못했으니, 완벽한 검증을 마친 진실의 책입니다.

초판이 발행된지 30여년이 경과하면서, 감옥과 같은 남조선에서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한번 두번으로 안됩니다. 세번, 네번으로도 안됩니다. 날마다 세수를 해야하듯이, 이 책은 날마다 읽어야 합니다.

.

다음은 《세기와 더불어》에 소개된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투사들의 주요 회의들입니다.

이 회의들의 내용과 력사적의의를 모두 잘 리해한다면, 회고록을 상당히 리해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자신이 회고록을 잘 리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아래 회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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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는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공짜책이라고 해서 소홀히 생각하지 마시고,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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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민회의 청수동회의(1918년 11월)

★관전회의 -- 공산주의운동에로의 방향전환

★우마항회의

★3부통합회의

★무송회의

★카륜회의(1930) — ★오가자회의(1930) — ★봄명월구회의(1931) -- ★송강회의(1931) -- ★겨울명월구회의

★사도황구회의

★길동지구당회의

★남패자회의

[봄명월구회의; 간도와 두만강연안 륙읍일대의 실태를 충분히 파악한데 기초하여 우리는 1931년 5월중순 옹성라자에 있는 리청산의 집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열었다. ]

[겨울명월구회의; 이 회의에는 차광수, 리광, 채수항, 김일환, 량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중권, 리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하여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서 대중의 총애와 인망을 받고 있던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

★공수덕회의(1931년 5월) -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한 혁명력량준비문제 론의 확정.

★광명촌회의 - 무장투쟁이라는 새 사변을 앞두고 국내혁명조직들앞에 나서는 실천적과제를 토의.

★소사하회의(1932) - 우사령부대에 들어가면 구국군의 간판을 가지게 되니 피해를 입을 념려가 없고 무기도 좀 해결할수 있지 않겠는가, 영향만 잘 주면 그들을 공산주의화하여 안전한 동맹자로 만들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동무들의 토론에 붙이였다.

이 문제를 가지고 당조직의 본부가 있는 소사하 김정룡의 집에서 하루종일 회의를 하였다. 그 모임을 지금은 소사하회의라고 한다.

★라자구회의; 회의에는 나와 리광, 진한장, 왕윤성, 호진민, 주보중을 비롯하여 30~40명이 참가하였는데 나와 리광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였고 진한장, 왕윤성, 호진민, 주보중은 중국측을 대표하였다.

회의의 기본안건은 구국군의 도주를 막고 반일련합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이 바로 라자구회의다.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로서는 마지막회의였다. 이 회의를 마감으로 병사공작위원회는 해체되였다. 라자구회의의 결정에 따라 나와 리광, 진한장과 주보중, 호진민은 왕덕림부대, 오의성부대, 채세영부대와의 사업을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십리평회의

★다홍왜회의

★요영구회의

★남호두회의(1936.2) 우리는 1936년 2월하순부터 근 한주일동안 소자지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었다.이 회의를 일명 남호두회의라고도 부른다. 회의에는 위증민을 비롯한 중국동지들과 함께 김산호, 한흥권, 최춘국, 전만송, 최인준, 박태화, 김려중, 림춘추, 전창철 등 군정간부 30∼40명이 참가하였다.

★미혼진회의에서 인민혁명군부대들의 개편문제를 토의하고 새로 조직되는 사단들과 려단의 활동지대를 결정하였다.

무엇보다먼저 1개 사단, 1개 독립려단을 새로 편성하여 인민혁명군의 전투력량을 종전의 2개 사단으로부터 3개 사단, 1개 독립려단으로 대폭 확대할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기초하여 부대별 활동구역을 분담하였는데 새로 조직될 3사(후에 6사)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국경연안 일대에서, 1사는 무송, 안도, 림강 일대에서, 2사는 간도와 북만일대에서 각각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새로 편성되는 독립려단은 북만주지방에서 류동작전을 하다가 점차 압록강연안에 진출하여 국경일대에서 출몰하는 적들을 제압하기로 하였다.

남호두회의를 193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를 구획짓는 하나의 분수령이라고 하면 미혼진회의는 ★동강회의, ★서강회의, ★남패자회의(=몽강회의; 남패자회의를 일명 몽강회의라고도 하는것은 남패자가 몽강현에 속해있기때문입니다.)와 함께 조선혁명을 1940년대의 대사변으로 유도해간 징검다리라고 할수 있다. 남호두를 떠난 급행렬차는 미혼진, 서강, 남패자를 거쳐 소할바령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였다. 미혼진, 서강, 남패자는 남호두로부터 소할바령으로 통하는 력사적인 로정에서 우리의 우정과 심혼이 아낌없이 뿌려진 잊을수 없는 중간정류소들이다.

우리 부대를 찾아온 항일련군 제1군 2사동무들과 함께 공동생활, 공동작전을 하면서 전투적우의와 련대를 두터이해가던 일이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인공산주의무장부대들과의 협동문제는 이미 1935년 3월의 ★요영구회의 ★서강회의이다. 회의는 서양목정자밀영에서 사흘동안 진행되였는데 2사와 4사의 간부들과 위증민, 전광을 비롯한 군부간부들도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국내진공작전방침이 토의되였다. 이 방침과 관련하여 내가 연설을 하였다.

★국사봉회의

★북대정자회의 고난의 행군 총화

★백두산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한 과업을 조직건설의 측면에서 많이 론의하였다면 ★초수탄회의에서는 적배후교란작전방침을 관철하는데서 나서는 과업을 항일련군부대들과의 협동작전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측면에서 많이 협의하였다.

★맹산촌회의

★소할바령회의 돈화현 소할바령 대부대작전으로부터 소부대작전으로의 선회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29(1940)년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돈화현 소할바령에서 소집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 하신 보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할데 대하여》

★하바롭스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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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뿌리와 력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사람들의 기억력이 놀랍도록 짧다. 계몽과 각성이 없는 상태라면 한두세대 안에 자기 력사를 깡그리 잊고 미국과 일본이 자기 부모인줄 알게되는 한심한 존재가 바로 우중이다. 해외에서 사는 동포들의 경우에는 더 말할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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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시절 교과서들에 분명 《비루스》, 《왁찐》이라고 외국어 표기용 글꼴로 뚜렷하게 인쇄되여 있었던것을. 60년대, 70년대의 얘기다. 그 이후에도 80년대까지 독일어 Virus, Vakzin 음가대로 외래어를 표기했고, 북과 남이 공통적이였다.

그러나 남녘은 언어가 미국식 영어발음을 따라 개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이러스》, 《백신》으로 변했다.

내 나이 또래의 남조선 사람들에게 《비루스》, 《왁찐》이라고 쓰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거나, "북<한> 사람인가요?" 라고 힐문할 지경으로 그들은 가까운 과거, 학창시절조차 완벽히 까먹었다.

사람들이 참 실망스럽도록 기억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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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 입학한 76년, 박정희는 반정부 학생시위와 운동의 본거지였던 서울대를 서울시내로부터 관악산골짜기로 옮겨서 가둬버리려고 관악캠퍼스를 새로 짓고 그 입구에 동양최대규모의 파출소(말이 파출소지 전투경찰 대대병력이 주둔하는 대규모 진압부대)로 자물통을 채웠다. 새 캠퍼스에 일호로 입교한게 76학번이다. 그때 입학금과 등록금, 교복비를 합해서 11만원을 낸 기억이 난다. (문과는 10만원)

76년당시까지만 해도 일제시대에 교육받아 언어와 사고방식이 구닥다리+일본식이던 로교수들이 학교의 터주대감들이였다. 그러나 이미 (주로) 미국에서 류학한 (소장파) 교수들이 급격히 늘고 있었다. 그들은 전문지식보다 오히려 더 숭미주의 (미국은 무한히 위대한 나라다, 미국을 배우고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은 아무도 못당한다..), 미국식 생활태도와 문물과 언어 (하필이면 미국문물 중에서도 이른바 저질양키식 습속과 언어)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박사도 (가짜박사도) 흔해빠졌고, (미국)류학생들도 범람하지만, 그때는 미국박사를 무슨 벼슬로 여겼다. 미국 아무 대학에서나 학위를 받으면 남조선에서 떵떵거릴 수 있었고, 교수직은 물론 실권있는 행정직과 고위관직까지 바라봤다. 플로리다 대학이건 하와이대학이건 상관없었고 어쩌다 위스콘신이나 MIT학위라도 얻었다간 기세등등하기가 여간이 아니었다.

학부와 대학원시절, 미국 물먹은 인간들에 대한 일화가 풍부했다. 류학파들이 선진과학을 배껴온건 공로로 쳐도, 그들은 자주의식 빵점, 사상교양면에서 정말 빵점짜리들이였고, 남조선을 초고속으로 미국의 문화식민지화 하는데 앞장섰다. 어찌나 미국 티를 내는지, 우선 앉는 자세부터 소파에 몸을 파묻고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이 기본이었고, 요란하게 손짓하며 말하기, 어깨 으쓱거리며 손들기, 토씨만 빼고 전부 영어로 말하기, 경망스럽게 눈짓하기, 반바지에 슬리퍼끌고 교실과 강단에 나타나기, 등 아주 가관이었다.

어떤 교수들은 영어본토발음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겨, 학생들의 "콩글리시" 발음을 늘 고쳐줬다. "인터네쇼날이 뭐야. 이너네셔널." 아미노산인 글리신을 말하면 "글리신이 뭐야.. 글라이신." 알라닌이라고 말하면 "알라닌이 뭐야, 우리 미국에선 앨러닌이라고 해." 이런 식인지라 학생들은 "영어가 객지에서 고생한다"고 야유까지 했다. 우아래없이 다리 꼬고 비스듬히 앉아 막말하기, 강의중 음식(주로 샌드위치) 먹기, 등 미국풍이면 뭣이든 자랑거리로 여겼다. 말끝마다, 사사건건 언어와 관행과 행정면에서, "미국에서는 이렇게 한다.."를 입에 달고 살았고,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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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국류학파들이 학계와 정계와 사회문화계를 주름잡게 되었고 수십년 세월이 흘렀다. 먹고사니즘에 내몰린 지친 우중들은 기억이 너무나 짧아, 이제는 남조선이 원래부터 이렇게 살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미국류학파와 남괴의 미국기독교가 퍼뜨리는 숭미주의와 사대주의, 자기것 말살하기를 토착+잔류왜구 분단기생충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안그래도 개같은 "두음법칙" "사이시옷", 은어, 언어의 저속화, 문화의 음란화 등등, 북남이질화와 남조선동포들의 짐승화 좀비화에 미쳐날뛰던 왜구고정간첩들은 남조선의 미국화, 문화예속화를 미친듯 반겼다. 미국식이 아닌것이면 무조건 깔보고 적대하며, 제 민족과 력사와 전통과 주권 등 제 것은 무엇이든 경멸하는 극도로 부패한 식민지문화를 낳았다. 남조선은 자신의 뿌리도 잃고, 언어도 잃고, 모든 가치의 중심이 "미국"과 "물질"이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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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과거에 대한 정확한 기억이 바로 력사이다. 《세기와 더불어》는 조선의 뿌리를 찾는 최고의 입문서, 교과서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력사를 잃으면 뿌리없는 노예인것이다.

다른건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력사는 반드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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