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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백절불굴의 애국 투사 나정주, 김병억 동지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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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8-03 07:46 조회2,4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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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김영승 선생이 전국묘소답사반 일행과 함께 민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애국자들의 묘소를 찾으며 그들을 기리고 있다. 이번에는 나정주 동지와 김병억 동지의 통일애국투쟁의 흔적을 더듬어보며 두 분을 추모하는 글이다. [민족통신 강산 기자]


글: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제1신) 백절불굴의 애국 투사인 나정주동지를 기리면서


2022년 7/31일 전남 장성군 삼서면에 위치한 금성 나씨 선산을 찾았다.

나정주동지는 1925년 4/19일에 전남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에서 출생했다.

조부는 나도순씨로 삼서면에서 제1가는 부자였다고 한다.

부친은 나승규씨로서 3.1운동의 첫발을 내 딛었다. ‘오성학숙‘을 설립하여 국민계몽운동과 반일 투쟁에 전 생에를 바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농민운동의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조직원들의 권익과 악덕지주를 처단하는 투쟁을 벌리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삼서면 우치리에 망금청을 지어 문명퇴치 운동을 벌렸다.

뿐만 아니라 광주학생운동의 자금책을 담당하기도 했다.


나승규씨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독립운동가이다.

8.15 광복후 민중동맹위원장으로 1948년 10/18일 남북협상회의에도 참여 했다.

1949년에 가족과 함께 월북하여 지금껏 살고 있으나 생사확인은 못하고 있다.


유일한 아들인 나정주동지는 어릴적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역이 뛰어나 같은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정주동지는 서울의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 때 동맹휴학을 선동 주도하여 퇴학처분을 받았다

1년후 고창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8.15 광복후에 연희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나정주동지는 선대의 피를 이어받아 애국심과 약자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개인적으로 자질도 뛰어나 육상대표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악기를 잘 다루고 성악 또한 일류란 말을 듣기도했다.

특히 웅변에 능해 청중들을 웃기고 만인들을 리드하는 다재 다능한 재능을 갗추고 있었다.



1949년 부친 따라 입북하여 1950년 전쟁 때 중성계급장을 달고 영광법성포로 상륙하여 광주에서 군사동원부장을 하다가 9.28 후퇴 후 8중대를 이끌고 북상하다가 추풍령에서 적들의 루트 차단으로 인하여 북상하지못하고 남하하여 고향인 태청산으로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 부대는 전원이 인민군으로서 각종 무기와 중화기로 무장했다.

장성 8중대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적들의 오래동안 삼서면 일대는 낮에는 경찰대 밤에는 유격대 세상이 반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 12/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삼계면 사창리에서 지서를 습격하다가 중상을 당하여 후퇴 중 삼서면 유정리에서 26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당시 태청산 기슭에는 장터처럼 붐비는 입산한 인민들이 있었다. 태청산에는 목포 나주 무안 군당과 무장부대와 함평 함호대 입산자들로 붐비고 있었던 것이다.

금성나씨 일가들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지금도 그 악영향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한다.

전쟁 전만해도 나씨 일가중 23명이 사각모를 쓸정도로 인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전투에 참가한 전우들과 친척들의 목격담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금성나씨 선산에 안장되어 있다.




백절불굴의 애국투사인 나정주 동지시여!

조선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태어나 선대의 피를 이어받은 나정주동지의 일생은 어떻게 살다가 마지막을 올곧게 맞이하느냐의 경험과 교훈을 우리 후대들에게 남기고 있습니다. 한참 투쟁할 나이에 아깝게 가셨지만 오늘의 정세는 동지가 살아 투쟁할 때와 본질은 같이 전쟁의 참화를 또 겪어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동지와 같은 영웅적인 지도자가 절실이 필요하고 있습니다. 늦게나마 동지를 알게되어 우리 후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나정주 8중대는 적들이 떨 정도로 용맹한 부대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참고: 이 자료는 정영일 동지가 수습한 자료를 참고로 한 것입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

아직도 나씨 집안들이 나정주씨의 정신을 이어받아 벌쪽하게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2년 7/31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제2신) 백절 불굴의 애국투사인 김병억동지를 추모하면서.


김병억동지는 1929년에 장성군 북하면 용두리에서 3형제 중 2남으로 출생했다.

동지는 장성중학교를 다녔고 18세에 입산하여 빨찌산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했다.

1950년 7/23일 인민군에 의한 해방 공간시대에는 장성군당위원장을 했다.

당시 22세 나이에 군당위원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와 용맹한 전투력을 가진 정치군사 간부였다는 모범을 창조한 지도 일꾼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1950년 9.28후퇴를 맞아 합법체제에서 비합법체제로 전환했을 때 노령지구 사령관(노령병단) 으로서 담양 감악골에 일시적 해방구를 두고 있을 때 전북빨찌산 무장부대와 합동작전을 지휘하며 영광 해방작전에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당시 노령지구당 위원장은 합법 때 광주시당위원장이었던 김체윤동지었다.

전남 노령지구는 영광 담양 장성군을 관할하는 전남도당 산하 지구당 중의 하나다.

전북무장부대와 합동작전이 가능했던 것은 유격근거지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당시 회문산 여분산 등지에서 일시적인 해방구, 반해방구를 쓰고 맹열한 무장투쟁이 전개 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격지구보다 합동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김병억동지는 1954년까지 유격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아 장성읍 모 지하 아지트에서 있다가 변절자에 의해서 비트가 탄로나 적들과 대치속에 최후까지 싸우다 희생되었다(자결 1954년 7/21일)

시신은 놈들이 장성경찰서 앞에 피법벅이된 시신을 꺼적대기에 몰아가지고 와 당시 살아 있는 유족들에게 보여 확인 후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한다.

그런데 수십년이 흘러 공동묘지가 재 개발지역으로 개발되고 지금 보혜양조장이 들어선 지대이며 동시애 농업학교 언저리라고 한다.

유족들은 재개발 될 때에 시신을 찾아 매장할 형편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 했는지 지금껏 모르는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김병억동지도 재산시 영웅칭호를 받았다.

지금 당시 3살이었던 조카가 살아남아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한다.

현재 서울의 성수동에 살고 있어 조만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노령지구 당위원장이었던 김체윤 동지는 1951년 동기공세 때 체포되어 광주포로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놈들의 감시의 허술한 틈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여 광양 백운산 도당부에 들어왔다.

일정한 심사를 거친 후 당시 도당직속부대인 전남연대 정치지도원 하다 여수 지하로 내려갔다. 공작사업하다 적들에게 탄로돼 희생되었다(1953년 6월)

여기까지 아는 범위 내에서 기록하고 있으니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알아내면 보충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참고 하기 바란다.

참고 @@ 현재 사촌동생인 김병욱 명예교수님도 아는 대로 증언하고 있다. 그의 형인 김병일동지도 장성군당 선전부장하다 1951년 2월에 희생되었다 한다. 그리고 노령학원(도당학교)) 터 앞에 김병억동지를 기리는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하는데 학원 답사 때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오늘 우거진 풀밭을 헤치며 찾아보았으나 표지판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추모식을 가마골 김병억동지를 기리는 표지판 앞에서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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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절 불굴의 애국 투사인 김병억동지시어!

조국과 민족 인민을 위한 투쟁전선에서 만악의 근원인 미제를 몰아내는 투쟁에 영웅적으로 투쟁을 지도하다 한참 더 일할 나이에 한줌의 흙으로 산화하여간 동지의 투쟁 업적은 빨찌산 투쟁사에 빛나는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동지의 불굴의 투쟁정신은 우리 후대들이 경험과 교훈을 받들어 기리기리 새길 것이니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어렵게 병억동지의 사촌동생인 김병욱 명예교수도 자리를 같이했다.

2022년 7/31일 오후 2시경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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