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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끝나지 않은 통일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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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4-01 09:26 조회3,0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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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12화

2022년 4월 1일

끝나지 않은 통일담화

[민족통신 편집실]

한호석 (정치학 박사, 통일학연구소 소장)



1989년 3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그날, 나는 당시 내가 소속된 청년운동단체가 주최한 주말연수회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승용차를 운전하여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길이었는데, 나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퀸즈에 있는 동포식당에 들어섰다. 때마침 식당 안에서는 라디오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1980년대 말, 재미동포들이 조국소식을 가장 빠르게 듣는 방도는 뉴욕에서 운영되는 재미동포 라디오방송국이 공중파로 송출하는 정오시간의 보도를 청취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오보도를 전해주는 여성방송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도착했다는 보도를 들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식당을 뛰쳐나와 승용차를 몰고 연수회장으로 부리나케 달렸다. 연수회장에 도착한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갔다는 소식을 참석자들에게 전했다. 하지만 너무도 뜻밖의 소식을 들은 터라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던 1989년 4월 1일 뉴욕에서 긴급집회가 진행되었다. 나는 집회명칭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지지하는 집회'로 정했고, 내가 직접 강사로 나섰다. 33년이 지난 지금, 긴급집회에서 내가 강연한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청중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던 뜨거운 감정은 아직도 내 뇌리에 남아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에 긴급집회에 관한 보도기사가 현장사진과 함께 실렸는데, 그 신문사의 편집책임자는 집회장소에 내걸린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지지하는 집회'라는 글발이 나타난 보도사진에서 '지지'라는 글자를 고의적으로 지워버렸다. 33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익언론매체들의 행태는 비렬하다.

1989년 3월 27일 김일성 주석은 분단장벽을 뛰어넘어 평양을 찾아간 문익환 목사를 금수산의사당(당시 명칭)에서 접견하였다. 접견이라는 외교적 용어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인 상봉이었다. 당시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재일동포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은 2010년 서울에 출판된, '시대의 불침번'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그날의 역사적인 상봉을 이렇게 묘사했다.

"...널찍한 홀 같은 곳으로 들어가니 거기 주석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 목사가 뚜벅뚜벅 걸어 다가서자 두 분은 순간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꺼안으시더이다. 수인사 같은 것을 나눌 겨를도 없었구요. 초면인 두 분이었건만 오랫동안 헤어져 만나지 못했던 두 형제처럼 어쩌면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애정 어린 자세로 포옹할 수 있었을까. 지금 돌이켜보아도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소이다. 분단시대의 암흑을 뚫고 섬광과 같이 강렬한 불빛을 발한 그 순간은 참으로 찬란하고 감동적이었소이다."

서울에서 운영되는 온라인매체 <통일뉴스>의 통일역사자료실에는 1989년 3월 27일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담화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문익환 목사 -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적인 수칩니다."

김일성 주석 - "좋습니다. 해봅시다. 잘하면 될지도 모르지요. 문 목사님의 통일론은 민주이자 통일이요, 통일이자 민주지요?"

문익환 목사 - "그것은 70년대의 통일론입니다. 지금은 민주와 자주와 통일, 이 셋이 하나입니다."

김일성 주석 - "나와 같구만"

위의 담화에서 문익환 목사가 언급한 분단 50년은 1995년을 의미한다. 문익환 목사는 우리 민족이 앞으로 6년 동안 조국통일운동을 열심히 하면 1995년에 조국통일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1989년 3월 당시 문익환 목사가 조국통일문제를 그처럼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던 것은, 1987년 6월 민중항쟁 이후 조국통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던 남측 상황과 관련된다. 이를테면, 1988년 7월 4일 한겨레민주당은 남북정당연석회의를 북에 제안했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남북사회단체회담을 북에 제안했다. 1988년 7월 20일 남측의 11개 진보운동단체들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를 창설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1988년 8월 15일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1988년 9월 22일 민통련을 비롯한 22개 진보운동단체들은 범민족대회 개최를 북에 제안했으며, 12월 21일 민통련 통일위원회는 조국통일방안 시안을 발표했다.

이처럼 1988년부터 강렬해지기 시작한 조국통일운동의 열기 속에서 문익환 목사는 1995년에 조국통일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낙관적 전망은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군사적 현실과 동떨어진 기대감 이상으로는 될 수 없었다.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남측이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어떻게 6년 만에 반미자주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종미우익독재정권들이 1948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40년 동안 조국통일운동을 극렬히 탄압해왔고, 1989년 이후에도 탄압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6년 뒤에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남과 북이 통일방안을 합의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남측에서 조국통일의지를 가진 진보정치세력이 집권해야 하는데, 어떻게 6년 뒤에 진보적 정권교체가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문익환 목사가 조국통일의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 때로부터 33년 긴 세월이 흘렀건만, 남측의 조국통일운동은 아직도 통일국가건설의 과학적 전망을 갖지 못했으며, 통일학의 연구성과도 아직 일천하다. 조국통일운동의 전진속도가 그처럼 매우 느린 까닭은, 남측에서 활동하는 통일운동가들의 투쟁과 통일학자들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남측의 조국통일운동이 통일국가건설의 과학적 전망을 가지려면, 앞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33년 전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담화는 그런 오늘의 현실에 중대한 가르침을 준다.

1989년 3월 27일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담화에서 남북교차승인문제가 거론되었다.

문익환 목사 - "저도 분단을 고정시키는 교차승인은 반대합니다. 그러나 통일을 전제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도적인 단계로서의 교차승인제는 고려할 여지가 없습니까?"

김일성 주석 - "교차승인이나 교차접촉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조선을 만들려는 분렬주의책동이기 때문에 절대로 허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과도기적인 단계라고 아무리 못을 박아도 그 과도기가 언제까지 갈지 누가 알겠습니까?"

문익환 목사가 언급한 남북교차승인은 중국과 소련이 남측을 국가로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측을 국가로 승인하며, 남과 북이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유엔에 각각 가입하자는 주장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남북교차승인안을 들고 나온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1975년 9월 22일 유엔총회 제30차 회의에서 당시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씬저는 남과 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남, 북, 미, 중이 4자회담을 개최하자는 제안을 꺼내놓았다. 키씬저가 그런 제안을 꺼내놓은 의도는 그보다 앞서 조선이 미국에 제안한 조미평화협정체결안을 거부하려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서, 키씬저의 남북교차승인안은 조선의 조미평화협정체결안을 거부하기 위한 역제안이었던 것이다. 키씬저의 역제안을 들은 조선은 1975년 9월 24일 키씬저가 이틀 전에 꺼내놓은 남북교차승인안을 거부하면서, 조미평화협정체결안을 또 다시 제의했다.

1975년 9월 22일 키씬저가 유엔총회에서 조선의 조미평화협정체결안을 거부하기 위해 남북교차승인안을 제기한 배경에는, 그보다 앞서 8월 8일 조선을 지지하는 사회주의국가들과 비동맹국가들이 유엔사령부를 해체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제출한 놀라운 사변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을 지지하는 사회주의국가들과 비동맹국가들이 1975년 8월 8일 유엔총회에 제출한 결의안, 즉 유엔사령부를 해체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은 1975년 11월 18일 유엔총회 제30차 총회에서 찬성 54개국, 반대 43개국, 기권 42개국의 표결로 채택되었다.

그런데 문익환 목사는 남북교차승인안이 유엔사령부 해체,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하는 미국의 흉악한 정치음모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 주석과의 담화에서 "통일을 전제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도적인 단계로서의 남북교차승인"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꺼내놓았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담화주제는 조국통일방안으로 옮겨갔다.

문익환 목사 - "북쪽이 주장하는 고려련방제는 남과 북을 두 단위로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여 남과 북의 현 체제를 존속, 공존시키자는 것입니까?"

김일성 주석 - "군사, 외교는 련방정부의 주관 하에 두고, 통일정부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통일해야 합니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은 가장 현실적인 통일방안입니다."

문익환 목사 - "남과 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감이 깊을대로 깊어졌기 때문에 연방제통일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당분간은 남과 북의 자치정부가 군사와 외교까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단계를 두고 여건이 성숙한 후 연방정부의 주도 하에 외교와 군사를 점진적으로 통합해야 분단 50년을 넘기지 않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일성 주석 - "단번에 할 수도 있고, 협상을 통해서 단계적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엔에 한 나라로 가입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남과 북이 연방정부를 수립한 이후에 외교권과 군사권을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경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 막연한 상상이었다. 통일학의 견지에서 보면, 연방정부가 수립된다는 말은 통일국가가 건설된다는 뜻인데, 통일국가건설경로를 예상하면 다음과 같다.

1) 통일국가가 먼저 건설되고, 연방정부가 나중에 수립되는 것이 아니다. 전민족적 범위에서 정부,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모인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가 성사되어 그 회의에서 연방의회를 구성하거나 또는 남북을 포괄하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민주선거를 실시하여 연방의회를 구성하게 된다. 전자는 급진적 구성방도이고, 후자는 점진적 구성방도이다. 어느 방도를 선택할 것인지는 통일국가건설경로에 조성되는 국내외정세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만일 국내외정세가 긴장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면, 당연히 급진적 구성방도를 따르게 될 것이고, 국내외정세가 완만하고, 평온하게 조성되면, 당연히 점진적 구성방도를 따르게 될 것이다.

2) 연방의회가 구성되면, 연방헌법이 제정되고, 연방헌법에 따라 연방정부가 수립된다. 연방정부가 수립되고, 연방정부수반이 통일국가수립을 만방에 선포하는 날, 우리 민족의 최대숙원이며 지상과업인 조국통일이 실현되는 것이다.

3) 그런데 연방헌법에는 연방정부의 지위와 권한, 지역자치정부의 지위와 권한이 각각 명시된다. 연방헌법에 따르면, 연방정부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행사하는 법적 주체이며, 남과 북의 두 지역정부는 지방자치권을 행사하는 법적 주체이다. 연방정부가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말은 남측 정부와 북측 정부가 각각 행사하던 외교권과 군사권을 연방정부로 이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남과 북의 두 지역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연방정부로 이양하는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연방정부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이양하는 인수인계위원회를 조직하여 이양기간을 최단기간으로 단축해야 한다. 이양기간을 최단기간으로 단축해야 하는 까닭은, 통일국가를 건설한 이후 국내외 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 예상은 이렇다. 통일국가를 건설하면, 미국, 일본,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무력도발, 외교고립, 경제제재로 신생통일국가를 전복시키려고 미쳐날뛰게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통일국가는 강력한 외교권과 군사권을 행사하여 제국주의세력의 무력도발, 외교고립, 경제제재를 제압, 돌파하고 통일국가의 자주권과 안전을 수호해야 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제국주의세력과 격돌하는 심각한 대결상황에서 남과 북의 지역정부가 연방정부에 외교권과 군사권을 오랜 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이양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연방제통일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고, 외교권과 군사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문익환 목사의 견해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경로가 제국주의세력과 맞서싸우는 격렬한 투쟁을 동반한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단견이다. 1989년은 조국통일문제에 대한 남측의 연구수준이 매우 낮았고, 통일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문익환 목사는 통일국가건설경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담화에 대한 서술은 다음 주에 발표할 글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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