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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 칼럼] 용산의 그녀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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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3-24 09:46 조회2,7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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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 칼럼] 용산의 그녀 '김은희'

[민족통신 편집실]

시위중인 김은희 동지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급하게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자리로 옮긴다고 하니,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근 몇 해 간 용산 미군기지 근방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고 가장 자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사람입니다.

‘탱크’라는 귀여운(?) 별명으로 불리는 용산주민 ‘김은희’, 바로 이 사람입니다.

몇 해 전 한미관계를 국제법적으로 분석하고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바로잡고자 다양한 활동을 펼쳐 오신 이장희 교수님과 식사를 하다가 마침 용산기지 이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용산에 대단한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신다. 그 아이 엄마가 용산의 국회의원이나 구청장보다 훨씬 똑똑하고 용감하다. 아무도 못 하는 것을 하고 있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는데, 그 용감한 아주머니가 바로 김은희 동지였습니다.

1996년 이른바 연대항쟁 이후 학생운동이 마녀사냥을 당하던 시절 그녀는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해 당당히 당선되었습니다.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부지런함에 힘도 세고 소탈한 성격이었던 김은희 동지는 많은 학우들의 사랑을 받는 총학생회장이었지만, 새내기 새로배움터에서 돌아오는 날로 경찰에 연행되어 당시 전국에서 가장 처음 구속된 학생대표자가 되었습니다. 그날 아수라장이 되었던 학교 앞 풍경이 생각납니다. 몰려온 숱한 전투경찰들에게 친구를 빼앗기지 않으려 분식집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까지 뛰어나와 싸웠지만 거리엔 짓밟힌 모자와 신발만 남았습니다. 아직 2월인데 총학생회장과 집행부들이 구속됐고, 학교는 재단 이사장의 비리와 민주 교수에 대한 재임용탈락 소식으로 심란한 상황이었습니다. 학생운동 조직인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기 위한 김영삼 정권의 작업과 탄압도 속도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김은희 동지는 구속되어 상당 기간 우리 곁에 없었는데, 감옥에 가 있는 동안에도 그의 정치력은 파장이 커서 학교에 남아있던 우리 모두는 평소보다 훨씬 전투적으로 살았고 재단 이사장을 몰아내는 투쟁에서도 그렇고 전체 학생운동을 지키는 것에서도 큰 성과를 낳았습니다.

최근 뉴스에는 용산주민이 되고 싶어서 안달하는 신임 대통령 소식이 자주 보이지만, 김은희 동지야말로 용산주민이 되고 용산주민을 위해 누구보다 애썼던 사람입니다.

도저히 서울 생활을 감당할 수 없음에도 여러 사업상 아등바등 서울의 끝자락인 도봉 강북 지역에서 셋집을 옮겨 다니며 간신히 붙어 살던 사람이 용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한 계산을 앞세우지 않았던 그녀답게 용산에서 연일 터져 나오는 기지오염문제, 미군범죄문제, 조만간 가시화될 한-미, 북-미 관계정상화에 연계된 주한미군 처리 문제와 미군기지 반환문제 등을 생각하며 이사를 결심한 것입니다.

뚝심 있는 그녀를 생각하면 또 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 갓난아이를 업고 여기저기를 다니던 모습입니다.

이 사회 모든 여성이 그렇듯 여성 활동가들이 겪는 가장 어려운 문제 역시 임신과 출산과 닿아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임신과 출산, 육아, 교육이라는 무거운 것을 여성 개인이 상당 부분 감당해야 하는 이 자본주의, 개인주의 사회에서, 그 시기 활동을 지장 없이 이어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에서부터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다양한 시선과 평가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은희 동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그녀에게서는 활동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들쳐 업고 대학생 강연이며 각종 회의를 챙기던 동지가 아직 너무 어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걸음을 재촉할 때, ‘역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좀 속상했습니다. 비슷한 또래의 어미로 아이를 업고, 혹은 여기저기 눈치 보며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오기밖에 안 되는 것 같은 날이 많았던지라, 그 감정을 그대로 이입해 김은희 동지가 안쓰럽고 답답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기로 버텼던 나와는 달리 김은희 동지는 웃으며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몸이 고되지 않았을 리 없겠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비관이나 신세 한탄이 스밀 틈이 없었습니다.

김은희 동지의 신념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생관이 되어 모든 것의 기준으로 확고한 듯 보였습니다. ‘지켜 살면 좋은 것’ ‘다른 곳으로 향하는 마음자락을 강제하는 나침반’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업과 생활에서 판단의 근거이자 ‘역사적 책무’에 맞춰진 것이었습니다.

체육대회든, 투쟁의 현장이든, 친정이나 시가에 가서 밭일을 하거나 김장을 할 때도 늘 씩씩하고 튼튼한 김은희 동지지만, 눈물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강연이나 연설 중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차오르면 이내 따라 울게 되곤 합니다. 열사의 삶, 민중의 고된 삶을 자신의 슬픔보다 크고 민감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동지의 눈물은 그 어느 시인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말 해 줍니다.

김은희의 진심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서 주변을 서성이곤 합니다. 그러나 김은희 동지의 가까이에 있다 보면 이내 알게 됩니다. 그는 받기보다 주는 것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말 못 할 생활의 고민으로 동지를 찾았을 때, 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공감해주고 위로와 고무를 주던 김은희 동지를 기억합니다.

김은희 동지는 자신의 일에는 무디고 동지와 민중의 삶에는 민감한 보기 드문 사람입니다.

김은희 동지는 학생운동이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을 때 맨 앞에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을 재건해야 할 때 그는 이름 없이 전국을 누볐습니다.

진보정당이 해산되는 시기, 가장 열심히 주민들에게 다가가는 당원이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치열하고 본질적인 전선인 용산에서 그곳의 국회의원이나 구청장, 그 어떤 공무원보다 용산을 잘 알고 용산의 주민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지금 그를 닮은 후배들이 낯선 고장 낯선 지역에서 이 땅을 더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 기꺼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나이 차가 있고 활동 공간이 달랐으며,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구경이나 하는 축이었던 나는 김은희 동지와 많이 친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좀 낯설어 했고 어려워했습니다. 호칭도 정리할 수 없어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곤 했습니다.

그런 김은희 동지와 이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면 힘이 되는 사이로 연결되어 지낼 수 있다니 새삼 고마운 마음입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위대한 사상가 실천가들을 알고 그들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잡을 지푸라기조차 알지 못해 함부로 부유하기 쉬운 세상, 우리를 단단히 붙잡아 뿌리내리게 하고 굳게 자라게 하고 마침내 열매 맺게 할 ‘보이지 않는 끈’에 대해 생각합니다. 각자의 한계도 함께 극복하고, 다른 동지들의 혁신 역시 나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화수분 같은 끈 말입니다.

실은 용산의 탱크 아줌마 ‘김은희’ 라는 사람을 안다는 것보다 고마운 것은 바로 이 ‘끈’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미군기지 앞에도 있게 하고, 투쟁과 혁신의 바람이 부는 백두에서 한라, 어디에나 있게 합니다.

그 끈이 개별 인연에서 조직으로, 조직과 조직으로, 민족전체, 그리고 인류전체를 다 아울러 잇는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는가...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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