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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비밀 속에 가려진 격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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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0-07-12 18:23 조회3,0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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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속에 가려진 격전의 시작


*글:한호석 박사(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진은 필자


<차례>

1.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두 개의 정상회담

2.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 도발할 결절점

3. 백악관의 극비정보 빼돌린 전설적인 첩보원들

4. 하이난섬해방작전의 승리와 백악관의 극적인 정책전환

5.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두 개의 정상회담

일제가 패망한 직후 중국에서 내전이 재발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내전을 해방전쟁이라고 불렀고, 중국국민당은 중국내전을 반공감란전쟁이라고 불렀다. 감란(戡亂)은 반란을 무찌른다는 뜻이다.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을 비롯한 악질군벌들의 억압과 수탈을 속에서 오랜 세월 신음해오던 5억 중국 인민을 해방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내전에서 패한 중국국민당과 그들의 군대는 중국 본토에서 섬으로 쫓겨났다. 대만섬과 하이난섬이 그들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섬과 하이난섬을 해방하면 중국의 국토완정대업이 완수될 수 있었다. 중국국민당과 그들의 군대는 대만섬으로 쫓겨나 본토수복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해방군에게 대만해방은 뒤로 미룰 수 없는 중대한 과업이었다.

그런데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협을 건너가 반란군을 제압하고 대만을 해방하려면 강력한 공군력과 해군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수립된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은 거의 전무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해방작전에 반드시 필요한 전투기, 폭격기, 함정, 상륙정을 소련에서 들여와야 했다.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은 로씨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딸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정상회담 중에 대만을 해방하는 최고중대사를 논의했다. 두 정상은 최고중대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주고받았다.

마오 주석 - “국민당 세력은 대만섬에 해군기지와 공군기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어서 인민해방군이 그 섬을 점령하기 힘듭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군사지휘관들은 대만섬 점령을 촉진시키기 위해 소련이 공군조종사 자원병들 또는 비공개 (공군)부대를 파견하는 (군사)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해왔습니다.”

스딸린 서기장 - “(군사)지원의 방식은 검토해야 하겠지만, (군사)지원은 배제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대만해방작전에) 개입할 구실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소련의) 군사지휘관들과 군사고문들은 어느 때나 파견할 수 있습니다만, 그 밖의 문제들은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략)

위의 담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마오 주석이 한시바삐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공군력과 해군력을 확보하는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스딸린 서기장은 군사지휘관들과 군사고문들을 중국에 파견하는 군사지원사업은 선뜻 꺼내면서도 전투기, 폭격기, 함정, 상륙정을 보내는 군사지원을 보류했다는 사실이다.

의문이 생긴다. 소련은 왜 대만해방작전에 위한 중국의 군사지원요청을 그처럼 소극적으로 대한 것일까?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중소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약 8개월 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조소정상회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9년 3월 7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과 스딸린 서기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주고받았다. <사진 1>

▲ <사진 1>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은 소련이 마련한 특별항공기를 타고 로씨야모스크바를 방문하여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스딸린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을 세 차례 진행했다. 위의 사진은 김일성 수상이 스딸린 서기장과 함께 만찬을 나누는 장면이다. 정상회담에서 김일성 수상은 스딸린 서기장에게 외부의 군사지원을 받지 않고 주체력량으로 조선의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서울해방작전이 신속히 전개되어 3일이면 승리할 수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일성 수상은 정상회담 중에 스딸린 서기장에게 "미국이무력개입을 감행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전체 조선인민은 새로운 통일정부를 열렬히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수상의 통일국가건설의지는 강렬했다.


김일성 수상 - “스딸린 동지, 이제 조건이 성숙되어 전 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조선 반동세력은 절대로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우리를 공격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질 때까지 분단을 고착화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공세를 취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유격대의 지원이 (무력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딸린 서기장 - “대남공격은 불가합니다. 첫째, 북조선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수적으로도 열세입니다. 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국군이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와 미국 사이에 아직도 38도선 분할협정이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미국의 (무력)개입을 막을 명분이 없게 됩니다.”

위에 인용된 두 가지 정상회담의 담화록을 보면, 스딸린 서기장은 남조선해방작전과 대만해방작전에 대한 미국의 무력개입을 우려하면서 조선과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매우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스딸린 서기장에게 있어서 미국의 무력개입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남조선해방작전이나 대만해방작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하면, 소련도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 내전과 중국 내전은 미국과 소련의 전쟁으로 대폭 확대되어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게 될 판이었다.

소련에게 막대한 인명손실과 물적 피해를 안겨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때로부터 불과 5년 만에 소련이 또 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려드는 것은 스딸린 서기장이 예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더욱이 소련이 상대해야 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범국들을 차례로 제압한 강적이었고, 당시에는 핵무기를 독점한 핵강국이었다. 소련이 첫 플루토늄원자로를 가동한 때는 1948년 6월 19일이었고, 첫 핵시험을 진행한 때는 1949년 8월 29일이었는데, 당시 소련이 만든 핵폭탄은 너무 크고 무거워 웬만한 폭격기로는 운반할 수도 없었다. 소련은 전쟁에서 사용할 수 없는 원시적인 핵폭탄밖에 갖지 못했으나, 미국은 전략폭격기에서 투하하는 실전용 핵폭탄을 대량으로 보유했다. 만일 소련이 그런 핵강국과 섣불리 전쟁을 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피해를 훨씬 능가하는 핵참사를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런 까닭에 소련은 미국과의 전쟁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 했다.

소련은 미국과의 전쟁을 극력 피하려고 했지만, 압도적인 핵무력을 가진 미국은 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1948년 11월 23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핵무기개발을 추진하는 소련이 핵무기를 갖지 못하게 제압하고, 미국의 핵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1957년경에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이 그런 예상에 의거하여 작성한 핵공격계획이 바로 드롭샷 작전(Operation Dropshot)이다. 1949년에 작성된 드롭샷 작전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 중국과 조선에 있는 100개 대도시들과 산업시설들에서 200개 타격대상을 선별했고, 핵폭탄 300발과 고폭탄 29,000발로 그 타격대상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세계사회주의진영 전체를 말살하는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하려고 광분했다. 또한 미국이 1949년에 세계 최초의 전략핵폭격기인 B-36을 실전배치한 것은 ‘드롭샷 작전’을 실제로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B-36은 전략핵폭탄을 약 4t 정도 실을 수 있고, 비행도중에 급유를 받지 않고 대륙간 16,000km를 비행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전략핵폭격기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국은 1949년 4월 4일 서유럽 21개국 대표들을 워싱턴에 불러 모아 북대서양조약을 체결했는데, 이것도 소련과 사회주의진영을 상대로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하기 위해 광분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 도발할 결절점

소련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할 만한 결절점은 전 세계에 세 군데밖에 없었다. 베를린, 대만해협, 한반도가 바로 그런 결절점이었다. 그래서 스딸린 서기장은 1949년 4월 17일 평양 주재 소련대사 떼렌티 슈띠꼬브(Tereti Shtykov)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내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1949년) 5월 중 남조선 주둔 미국군이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으로 철수할 계획임. 철수목적은 남조선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더 많이 주기 위해서임. 미국군이 철수하는 것에 맞춰 유엔감시위원단도 남조선을 떠날 것임. 4~5월 중에 남조선은 38도선에 무력을 집중시킬 것이 틀림없음. 6월 중에 불시에 북진공격을 감행하고, 8월까지 북조선군을 완전히 궤멸시킬 목적으로 보임. 이런 정보의 사실여부를 긴급히 확인해 내게 보고하기 바람.”

스딸린 서기장의 긴급지시를 받은 슈띠꼬브는 1949년 4월 20일 조선인민군의 전투준비태세가 “매우 미흡하고”, 소련군사고문단이 북조선에 도착하지 않았으며, 북조선의 무기생산과 탄약생산을 지원하기로 한 소련의 결정사항이 아직 집행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비밀전문을 스딸린 서기장에게 보냈고, 1949년 5월 2일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 첩보원이 보내온 정보와 서울의 라디오방송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남조선은 남조선주둔미국군의 철수문제를 협의하고 있음. (중략) 남조선의 대북작전계획과 관련하여 말하면, 남조선은 국방군을 계속 증강하고 있음. (중략) 미국은 남조선에 무기와 탄약을 많이 제공하고 있음.”

위의 비밀전문을 받아본 스딸린 서기장은 미국의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받으며 한국군의 무력을 증강시킨 이승만 정부가 38도선을 너머 북진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예상에 뒤따른 것은, 미국이 소련과의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한국군의 무력을 증강시켜 북진공격으로 내몰려는 게 아닌가 하는 심각한 우려였다.

그러나 슈띠꼬브가 “미국이 남조선에 무기와 탄약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고 스딸린 서기장에게 보고한 것은 사실과는 다른 오보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주한미국군철수에 대비하여 막대한 군사지원을 미국에게 요청했지만, 미국은 그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미국의 인색한 태도는 1949년 5월 9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 Acheson)이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John J. Muccio)에게 보낸 1급 비밀전문에서 드러났다. 비밀전문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게 2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군사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군사지원은 1,1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으므로,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군사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무쵸가 이승만에게 “상세히 착오 없이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게 군함과 전투기를 제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무쵸의 건의는 “사정상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미국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미국정책기획실장폴 닛츠가 군사지도를 살펴보면서 담화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한반도 군사지도를 보면서 북침전쟁계획을 논의하는 장면인지 모른다. 1950년 1월 1일 초대 미국정책실장이었던 조지 케넌의 뒤를 이어 그 직책에 임명된 폴 닛츠는 소련을봉쇄하고, 유렵과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진영의 확장을 저지,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핵무력을 증강하고, 군사비를 증액하며,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전쟁능력을향상시킨다는 새로운 대외정책기조를 작성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에 따라1950년 4월 12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소련과 사회주의나라들에 대해 매우강경하고 도발적인 NSC-68을 채택했다. 이런 정책에 의거하여 미국 육군성은SL-17이라는 명칭으로 작성한 한반도 전쟁계획을 1950년 6월 19일 미국 합참본부에 제출했다. 그들은 북침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하지만 “미국이 남조선에 무기와 탄약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는 슈띠꼬브의 오보를 믿은 스딸린 서기장은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하려는 미국이 한국군의 무력을 대폭 증강시키고 배후에서 조종하여 북진공격으로 내몰려는 게 아닌가 하고 상황을 오판했고 전쟁위기를 우려했다. 스딸린 서기장의 대응책은 소련이 미국의 전쟁도발에 절대로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딸린 서기장은 1949년 8월 13일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띠꼬브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해 북조선에 있는 소련 해군기지와 공군부대를 폐쇄할 것. 우리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또한 적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시키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함임.”

1949년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선인민이 통일을 고대하고 있다는 동지들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강화하고 남조선에서 반정부운동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은 “전쟁초기단계로 시작되는 것이므로,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의견을 담은 문서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보냈다.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띠꼬브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게 보내는 문서를 김일성 수상에게 전달했다. 슈띠꼬브가 스딸린 서기장에게 보낸 비밀전문에 따르면, 김일성 수상은 그 문서를 “냉담하게 받았다”고 한다.

김일성 수상은 남조선해방작전을 대폭 축소한 서울해방작전을 실행하여 전쟁피해를 극력 줄이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졌지만, 서울해방작전이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할 구실을 미국에게 주게 될 것을 우려한 스딸린 서기장은 작전실행을 보류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이런 의견불일치는 당시 소련과 중국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발생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대만해방작전을 실행하여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졌지만, 대만해방작전이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할 구실을 미국에게 주게 될 것을 우려한 스딸린 서기장은 작전실행을 보류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딸린 서기장이 제기한 보류의견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국가건설의지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토완정의지를 약화시킬 수 없었다. 조선인민군은 서울해방작전에 필요한 군사준비를 다그쳤고, 중국인민해방군도 대만해방작전에 필요한 군사준비를 다그쳤다. 그처럼 복잡한 정세가 조성된 가운데 어느덧 1949년이 저물고 1950년을 맞았다.

3. 백악관의 극비정보를 빼돌린 전설적인 첩보원들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워싱턴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1950년 1월 5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대만섬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대만에서 특권을 얻을 생각도 없으며, 중국 내부문제에 군사적으로 관여할 의사도 없다는 중대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워싱턴에 있는 전국언론협회에서 진행된 공식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알루션렬도 ⟶ 일본 ⟶ 오끼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태평양방어선을 획정했음을 밝혔다. 트루먼과 애치슨이 한 주간의 시차를 두고 꺼내놓은 그런 놀라운 발언들은 즉흥발언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은 1949년 12월 30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1급 비밀문서인 NSC-48에 명시된 정책적 결정이었다. 그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49년 5월 5일 미국 육군참모총장 오마 브래들리(Omar N. Bradely)는 연방상원의원 아더 왯킨스(Arthur V. Watkins)가 제기한 질문에 답변하는 중에 태평양방위선에 관한 질의응답을 다음과 같이 주고받았다.

질의 - “태평양방위선은 어디에 설정되는가?”

답변 - “미국은 일본, 오끼나와, 필리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현 정세에서 말하는 방위선은 거기에 설정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중략)

질의 - “미국의 방위선은 중국에는 설정되지 않을 것인가?”

답변 - “미국은 중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 않으며, 노르웨이, 프랑스, 이딸리아에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 않다. 전체 방위력을 일괄하여 유럽에 집중하고 아시아를 등한시 하는 것은 정치기획자들의 견해인 듯하다. 유럽 또는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내가 논하기에 적절한 문제가 아니며, 군당국은 외교정책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하략)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한 NSC-48을 채택한 것은 미국이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에 무력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NCS-48에 명시된 미국의 대외정책은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을 실행단계로 떠밀어준 결정적 계기로 되었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비밀첩보원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1급 비밀문서 NSC-48의 사본을 감쪽같이 빼돌려 소련 모스크바에 보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NSC-48의 사본을 모스크바로 빼돌린 비밀첩보원은 1950년 당시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 도널드 맥클린(Donald Duart McLean)이다. 영국 정보국 M16 소속 워싱턴지부장인 그는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정보교환협약에 따라 국가기밀을 서로 주고받았는데, 맥클린은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미국과 영국의 정보교환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는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가 본국으로 보내는 외교행낭에서 미국의 국가기밀문서들을 꺼내 사진기로 촬영한 다음, 그 필름을 런던의 어느 길거리에서 접선한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 소속 비밀첩보원에게 넘겨주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50년대 초 어느 날 도널드 맥클린과 그의 아내 멜린다가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아마도 맥클린이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워싱턴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공식직함은 1등 서기관이었지만, 그는 영국 정보국 M-16 소속 워싱턴지부장으로서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미국과 영국의 정보교환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는1944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국제정세의 흐름을 바꿔놓은 전설적인 첩보망으로 역사에 남은 케임브리지 5인방의 성원이었다. 미국의 핵무기에 관한 극비정보, 미국의 유럽원조계획인 마셜플랜에 관한 극비정보를 비롯한 당대 국제정세를 좌우한 중대한 국가기밀문서들이 도널드 맥클린의 손을 거쳐 모스크바로계속 넘어갔다. 그가 모스크바에 넘겨준 미국의 극비정보문서들 중에는 1949년12월 30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NSC-48 이외에도, 1949년 3월 22일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주한미국군철수를 1949년 6월 30일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한 1급 비밀문서도 있었다.


도널드 맥클린은 1944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국제정세의 흐름을 바꿔놓은 전설적인 첩보망으로 역사에 남은 케임브리지 5인방(Cambridge Five)의 성원이었다. 세계적인 명문으로 인정받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를 졸업한 당대 최고의 수재들인 도널드 맥클린을 비롯하여 킴 필비(Kim Philby), 가이 버지스(Guy Burgess),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 존 케인크로스(John Cairncross) 등 다섯 사람은 1930년대 미국과 유럽을 강타한 세계대공황(Great Depression)의 거대한 폭풍 속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빈곤과 불행으로 몰아넣은 자본주의의 저주스러운 현실을 직접 체험했고, 자본주의의 적인 소련에서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는 놀라운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생적 사회주의자로 변모되었고, 자기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주의를 위한 비밀첩보활동을 자원했다. 케임브리지 5인방이 이룩한 상상을 초월하는 첩보성과를 보고 감탄한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는 그들에게 거액의 보상금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돈 때문에 첩보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보상금을 받지 않은 열렬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미국의 핵무기에 관한 극비정보, 미국의 유럽원조계획인 마셜플랜(Marshall Plan)에 관한 극비정보를 비롯한 당대 국제정세를 좌우한 중대한 국가기밀문서들이 도널드 맥클린의 손을 거쳐 모스크바로 계속 넘어갔다. 맥클린이 모스크바에 넘겨준 미국의 극비정보문서들 중에는 1949년 12월 30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NSC-48 이외에도 1949년 3월 22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주한미국군철수를 1949년 6월 30일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한 1급 비밀문서도 있었다.

스딸린 서기장은 케임브리지 5인방의 비밀첩보활동 덕분에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아시아정책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 스딸린 서기장은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이 미국에게 무력침공구실을 안겨줄 것으로 우려하여 보류를 권유했던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4. 하이난섬해방작전의 승리와 백악관의 극적인 정책전환

김일성 수상은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던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이 마련한 특별항공기를 타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딸린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을 세 차례 진행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이 작성한 조소정상회담의 기록은 45년 뒤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스딸린 서기장은 정상회담 중에 김일성 수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제환경과 국내상황은 (소련이) 조선의 통일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북조선이 서울해방작전을 실행하는 경우 미국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도,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이 중국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김일성 수상은 스딸린 서기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조선을 해방하려는 우리의 희망을 언제나 지지했습니다. 마오쩌둥 동지는 중국혁명이 완성되면 우리를 도와줄 것이고, 필요한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조선의 통일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중요한 것은, 김일성 수상이 조선의 통일을 외부의 군사지원을 받지 않고 주체력량으로 실현할 것이라고 단언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6.25전쟁 중에 미국 지상군이 38도선을 넘어 무력침공을 감행한 1950년 10월 1일 이전까지 북조선은 중국의 거듭되는 파병제의를 거절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과 맞서 조선을 돕는다는 뜻)의 기치를 들고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날은 1950년 10월 25일이다.

스딸린 서기장은 정상회담 중에 김일성 수상에게 미국이 남조선에 파병할지 모르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김일성 수상은 “서울해방작전이 신속히 전개되어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으로 비화되자 서울해방작전을 개시하여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해방’했다. 또한 김일성 수상은 정상회담 중에 스딸린 서기장에게 “미국이 무력개입을 감행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전체 조선인민은 새로운 통일정부를 열렬히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수상과 스딸린 서기장이 모스크바에서 진행한 정상회담을 중시하는 까닭은, 그 정상회담에서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중대한 합의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중대한 합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평양에 파견되는 소련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서울해방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조선인민군은 1950년 여름까지 전투준비태세를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 수상과 스딸린 서기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진행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1950년 5월 1일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중국인민해방군이 중국 최남단에 있는 하이난섬을 해방했다는 소식이다. 1950년 4월 10일 하이난섬을 해방하기 위한 대규모 상륙전을 개시한 중국인민해방군은 20일 동안 격전을 벌이며 남진하여 마침내 5월 1일 하이난섬 남단에 있는 싼야를 해방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사상자는 약 4,500명이었고, 국민당군 사상자는 약 33,000명이었으니, 중국인민해방군의 압승이었다. 국민당군 패잔병들은 바다를 건너 대만섬으로 도망쳤다.

하이난섬해방작전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압승으로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스딸린 서기장은 김일성 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대로 246명으로 구성된 소련군사고문단을 조선에 급파하여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서울해방작전계획수립을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에게 남겨진 마지막 국토완정과업은 대만에 집결한 장제스 정권을 타도하고 대만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대만해방작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 주력부대는 곧바로 대만섬을 마주보는 푸젠성에 집결했다. 소련은 대만해방작전을 준비하는 중국에게 공군력을 지원했다. 미그-15 전투기 40대와 폭격기 및 지원기 116대를 보유한 소련 공군 제106비행사단은 1950년 3월부터 상하이 인근 비행장에 배치되기 시작했고, 중국인민해방군은 1950년 말까지 14개 비행사단을 양성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양안의 폭이 약 150km밖에 되지 않는 대만해협을 건너 대만섬에 상륙하는 것은 얼마 전에 하이난섬 상륙전을 경험한 중국인민해방군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더욱이 대규모 상륙전부대들은 상하이 인근 비행장에서 출격한 전투기와 폭격기들의 공중엄호를 받으며 대만섬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미국 원동군사령부는 1950년 5월 29일 미국 합참본부에 보낸 군사상황보고서에서 “최근 상하이와 베이징 인근에 주둔하는 중국 공군에 소련제 전투기들이 배치되었다. 이것은 대만문제와 직결되는 첩보”라고 하면서 “미국 합참본부의 비상계획에 중국의 대만점령과 소련의 서태평양 진출에 대한 대비책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50년 4월 10일 중국인민해방군 상륙부대가 중국 최남단에 있는 하이난섬을 해방하기 위해 해안에 상륙하는 장면이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에는 상륙정이 없었기 때문에, 어민들이 사용하는 돛이 달린 어선을 많이동원하여 대규모 상륙전을 벌였다. 중국인민해방군 내에 조선인들로 구성된 전투부대는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가장 용맹하게 싸워 승리에 기여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하이난섬 북쪽 해안에 상륙하여 20일 동안 격전을 벌이며 남진하여5월 1일 마침내 하이난섬 남단에 있는 싼야를 해방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중국인민해방군 사상자는 약 4,500명이었고, 국민당군 사상자는 약 33,000명이었으니, 중국인민해방군의 압승이었다. 국민당군 패잔병들은 바다를 건너 대만섬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중국인민해방군이 하이난섬해방작전을 전개하던 시기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1950년 4월 12일 진행한 회의에서 기존 대외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대외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존 대외정책은 1949년 12월 30일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한 NSC-48의 대외정책을 뜻하는데, 1950년 4월 12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949년 12월 30일에 채택한 NSC-48을 폐기했고, 새로운 대외정책이 명시된 NSC-68을 채택했다. NSC-68에 명시된 새로운 대외정책은 소련을 봉쇄하고,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진영의 확장을 저지,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핵무력을 증강하고, 군사비를 증액하며,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전쟁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소련과 동맹국들에 대한 핵공격을 상정한 매우 강경하고 도발적인 정책이었다.

강경하고 도발적인 NSC-68에 의거하여 미국 육군성은 SL-17이라는 명칭으로 작성한 한반도 전쟁계획을 1950년 6월 19일 미국 합참본부에 제출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쟁계획인 SL-17의 내용을 보면, 조선인민군이 한국군을 공격하는 경우 신속하게 후퇴하여 부산방어선을 구축하고 인천에 상륙하여 반격,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6.25전쟁 중에 미국은 SL-17 전쟁계획에 의거하여 작전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약 1주일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로벗 멘지스(Robert G. Menzies)는 트루먼 정부로부터 이승만의 북진공격에 관한 극비외교문서를 받았다. 북진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멘지스는 미국이 이승만의 북진공격을 자제시키면 좋겠다는 외교전문을 트루먼에게 보냈다. 그런데 트루먼과 멘지스가 주고받은, 이승만의 북진공격에 관한 극비외교문서들을 누군가가 모두 파기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외교장관 존 버튼(John W. Burton)은 외교문서파기에 항의하여 사직했다.

NSC-48을 폐기하고 NSC-68을 채택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950년 6월 이승만의 북진공격을 부추기는 전쟁도발계획을 준비했지만, 스딸린 서기장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NSC-48을 폐기하고 NSC-68을 채택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아니라 미국이 이승만의 북진공격을 부추기는 전쟁도발계획을 준비했다는 정보도 파악하지 못했다.

5.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한 조선인민군은 한강도하와 남진공격을 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다. 당시 북조선은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을 체포하면 북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의 국회가 통합된 전민족통일의회가 구성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서울을 완전히 포위하여 퇴로를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조선인민군 총사령부는 서울해방작전계획과 다르게 전개된 상황에 맞춰 작전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것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이었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3일 동안 한강도하와 남진공격을 하지 않은 까닭은,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던 1950년 6월 27일 오후 8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트루먼의 주재로 진행된 비상회의에서 한반도 내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하기로 결정했고, ‘코리아상황(Korean Situation)’이라는 제목의 정책문서가 작성되었다. 트루먼은 그 문서에서 미국 원동군사령부 관하 해군력과 공군력을 무제한으로 한반도에 동원하면서, 한국군에게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제공할 것이며, 미국 공군은 38도선 이남 지상에 있는 북조선군의 무기와 병력, 다른 군사목표들을 타격하고, 미국 해군은 38도선 이남 해상에서 전투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다른 한편, 트루먼은 미국 해군 제7함대에게 대만섬에 대한 중국인민해방군의 공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일본에 주둔한 제7함대는 군함 10여 척을 대만해협에 급파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원천봉쇄했다.

1950년 6월 28일 마오쩌둥 주석은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8차 회의에서 “올해 1월 5일 트루먼이 미국은 대만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지금은 트루먼 스스로 자신의 성명이 거짓임을 증명했고,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국제협의를 깨버렸다”고 비난했으며, 저우언라이 외교부장(당시 직책)은 “트루먼이 27일에 발표한 성명과 미국 해군의 행동은 중국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한 것이며 유엔헌장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미제국주의자들이 그 어떤 방해책동을 벌이더라도 대만이 중국에 속한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전체 인민은 한마음 한뜻으로 침략자 미제의 수중에서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끝까지 분투할 것”이라는 대미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월간조선> 2014년 2월호 분석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작성한 ‘공격작전의 정보계획’이라는 제목의 문서와 평양 주재 소련군사고문단 단장 울라지미르 라주바예브(Vladimir Razuvaev)가 소련군 총참모부에 보고한 ‘6.25전쟁 보고서’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작성한 3단계 작전계획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 두 가지 문서에 담긴 3단계 작전계획 중에서 제1단계 작전계획은 조선인민군이 금천-구화리, 연천-철원, 화천-양구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2일 안에 서울 부근의 한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하고 서울을 해방하고,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약 90km를 5일 만에 진격하는 것이었다. 조선인민군이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면,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 완전히 포위하고,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게 된다.

제2단계 작전계획은 군산-대구-포항을 연결하는 제2공격축선까지 약 180km를 14일 만에 진격하는 것이었고, 제3단계 작전계획은 부산-여수-목포를 연결하는 제3공격축선까지 약 80km를 10일 만에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만 보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주도를 제외한 38도선 이남전역을 3단계에 걸쳐 29일 만에 ‘해방’하는 전면전 작전계획을 수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총사령부는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 작전계획을 수립한 것이 아니라,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 작전계획만 수립했다. 그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전투부대를 어떻게 편성하고 운용할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제1단계 작전계획에만 들어있고, 제2단계 작전계획과 제3단계 작전계획에는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1단계 작전계획은 명실공히 작전계획이지만, 제2단계 작전계획과 제3단계 작전계획은 작전계획이라는 제목만 붙어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작전계획이 없으면 전투를 할 수 없다. 이런 사정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38도선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350km의 작전종심 중에서 90km 계선까지만 진격하여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점령하고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서울해방작전만 준비했음을 말해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한국군이 구축한 서울방어선을 격파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가 T-34 땅크를 앞세우고 서울해방작전을 전개하는 장면이다.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금천-구화리, 연천-철원, 화천-양구에서 공격을개시하여 2일 안에 서울 부근의 한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하고 서울을 해방하며,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약 90km를 5일 만에 진격하는 서울해방작전을 전개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가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면,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 완전히 포위하고,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서울을점령하고 서울 남쪽 한강 계선까지 진격했지만,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포위하여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목표는 완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제1단계 작전계획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울을 점령하고 서울 남쪽 한강 계선까지 진격했지만,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 포위하고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지는 못한 것이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지 못하고 한강 계선에서 한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1950년 6월 29일 주일미공군기지에서 이륙한 미국 공군 B-29 폭격비행대가 한반도 영공을 침입하여 평양에 대한 첫 공습을 감행했다. 북조선 전쟁지휘부는 미국이 한반도 내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하는 수준을 넘어 38도선 이북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북조선 전쟁지휘부의 전략적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전략적 선택은 한강을 건너 남진공격을 재개하여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었다. 실제로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30일 한강을 건너 남진공격을 재개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1950년 6월 29일 미국의 평양공습은 국지전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고, 한반도 내전을 국제전으로 전환시킨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평양을 공습했다는 소식을 들은 스딸린 서기장은 1950년 7월 1일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띠꼬브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그는 긴급전문에서 슈띠꼬브가 북조선의 작전계획에 관해 자신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인민군이 진격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진격을 일단 멈추기로 결정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딸린 서기장은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조선인민군이) 두말할 것 없이 계속 진격해야 한다. (남조선) 해방이 앞당겨질수록 (미국의) 개입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고 썼다.

그러나 1950년 6월 현재, 일본을 점령한 미국 원동군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백악관에서는 한반도 전쟁계획이 준비되었다. 당시 미국 원동군사령부 관하에는 정규군 14,300명과 주방위군 6,000명이 있었고, 폭격기, 전투기, 정찰기, 수송기를 비롯한 작전기 1,040대가 있었고, 항공모함, 중순양함, 구축함, 잠수함을 비롯한 군함 26척과 해군항공기 140대가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관하에는 정규군 175,000명, 프로펠러식 전투기를 비롯한 소형 작전기 239대, 그리고 어뢰정과 경비정을 비롯한 소형 함선 16척이 있었다.

프로펠러식 소형 전투기밖에 갖지 못한 조선과 제트엔진식 전략핵폭격기를 보유한 미국의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형 어뢰정 6척밖에 갖지 못한 조선과 항공모함, 중순양함, 구축함을 보유한 미국의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래식 무기밖에 갖지 못한 조선과 핵폭탄을 보유한 미국의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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