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백: <5·18로 깨어난 해외동포, 세계화에 앞장서다> > 통일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3월 2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통일

위인백: <5·18로 깨어난 해외동포, 세계화에 앞장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7-20 02:43 조회3,038회 댓글0건

본문

광남일보 2019년  7월15일자가 해외동포사회에 관한 글을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필자는 위인백 광주여대 교수이며 한국인권교육원장이다. 그의 글은 또 민족통신이 제정한 제2회 평화사회정의상 수상단체인 <한민족유럽연대>와 관련이 되어 이 글을 여기에도 게재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한민족유럽연대의 최영숙의장과 김진향 부의장은 오는 11월9일(토) 로스엔젤레스에서 진행되는 민족통신 창간20주년 행사에 참석하여 제2회 평화사회정의상을 수상하는 한편 이곳 민족민주진영 회원들과 해외동포 운동에 관해서 토론의 장도 가질 계획이다. [민족통신 편집실]

민족통신20주년-2019년5월민중제.jpg
*사진은 2019년 베를린에서 열린 5월민중제가 끝나고 기념촬영한 사진(교포신문 자료)







 


 

 

5·18 깨어난 해외동포, 세계화에 앞장서다.


*글: 위인백 광주여대 교수

(제38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


오늘날 위대하고 숭고한 5·18항쟁정신이 세계화로 발전해나가는 것은 의로운 청년· 학생들은 물론 해외동포,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재유럽오월민중제의 역할이 크다


필자는 1988년에 이어 올해 39주년 재유럽오월민중제의 초청을 받아 정범구주독 대사와 위르겐 핀츠페터 부인 150여명과 광주mbc 참여한 가운데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통일에 대한 기조강연을 하고, 뒤이은 부대행사를 통해 동포들에 대한 눈물어린 감명을 받았다.

 

재유럽오월민중제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를 비롯한 유학생들이 영화택시 운전사 널리 알려진 위르겐 핀츠페터기자에 의해 광주의 참상보도를 접하고, 공분한 나머지 같은 30 600여명이 베를린 거리를 누비며 광주학살을 알리고 규탄하는 데모로 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동포들은 독일어로한국 민주주의한글로는광주민주화투쟁을 지지한다.’라는 현수막을 펼치며 데모를 하고, 유럽 곳곳에서 성명을 발표하면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이를 보도토록 함으로서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렇게 시작된 재유럽오월민중제는 현재 한민족유럽연대, 베를린 노동교실, 민중문 화모임, 코리아협의회 4단체가 주관하면서 행사경비도 참가자들 각자 15만원 상당 참가비로 충당하면서 원거리인 500~700킬로미터씩을 자비로 달려와 모든 일을 원봉사로 23일의 짧지 않는 일정을 39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진행해왔다.

 

오늘날까지 오월민중제를 주관하고 있는 간호사와 광부들은 광주참상을 보고나서 사회운동에 눈을 뜨고,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오면서 때로는 친북좌파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국내시민단체와 호흡을 맞추며 엄동설한에는 손발에 동상이 걸려가면서까지 음식을 만들어 파는 돈을 모아 없이 국내로 송금했다.

 

더욱이 독일인 균터 프로오이덴베르그 교수는 5·18항쟁과 동포들의 진정어린열정에 감탄한 나머지 죽기 100 마르크의 거대한 유산을 한국의민주화를 위해 쓰도록 기부한바 있고, 독일연방 유우겐 마이어 녹색당의원도 적극적인 연대활동에 이어 5·18행사에 참석하려다가 국내입국을 못하고 강제출국당한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국제적인 연대로 5·18 세계화에 앞장서 왔다.

 

 돌이켜보면 국내에서 최초로 19888주년 재유럽오월민중제에 초청을 받았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엄혹했던 시절이라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고, 날자가 임박해서야 허가를 해줘 출국했으며, 동포들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았지만, 그들의 활동모습을 보니 환대가 거꾸로 되었음을 깨닫고 송구스런 마음이 앞섰다.

 

그때 금남로와 도청에서 날밤을 새운 항쟁과 505보안대에서 고문으로 의식을 잃고 국군통합병원응급실로 후송되어 시간 만에 깨어나 2개월 넘게 입원치료를 받고, 상무대영창과 교도소에선 읽을 책은 물론 면회도 없이 겪었던 생지옥의 나날을 증언 하자 동포들이 달려 나와 껴안고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음악가로써 동백림사건으로 곤혹을 치룬 윤이상선생께서 광주의 참상과 정신을 기리며 1981년에 작곡하신광주여 영원히 테이프를 제게 주시면서 오월관련자로서는 처음으로 찾아왔다며 광주를 대표해서 주신 감회가 새롭다.

 

5·18항쟁동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해외동포들의 헌신적이고 눈물겨운 투쟁에 감동을 받아 오월문제해결에 매진하여 5·18기념재단을 설립하고, 동포들과의 가교역 할을 하면서 30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연대사를 보냈으나 동포들의 노고를 위로하 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의 노고를 어루만지고 위로할 때가 되었다.

 

오월정신을 계승 하다 아직까지 귀국을 못한 , 그리고 강제출국당한 분들을 내년 40주년 행사에는 반드시 초청해 위로하고 감사하는 자리를 마련함은 물론, 해외동포들에 대한 투쟁의 역사도 조명되도록 기록해야 것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