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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서거 70돌 <민족대단결>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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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6-27 00:51 조회3,2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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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한지 오늘 2019년  6월26일로 70주년이 된다. 김구의 생애는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에 김구선생의 가장 값있는 삶은 생의 마지막 시기였다. 그것은 반공의식을 깨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김일성주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민족대단결>의 역사를 이뤘던 업적이다. 소수의 이승만 세력을 제외하고는 전민족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남북연석회의는 우리민족사에서 <민족대단결>의 빛나는 등불이었다. 바로 그같은 <민족대단결>의 역사가 가장 아쉬운 때가 바로 지금이다. 좌우를 초월하여 우리민족끼리 손을 잡고 8천만의 염원이며 소원인 조국의 평화적 자주통일을 실현해야 할 가장 절실한 시기가 지금이다. 김일성주석과 함께 <민족대단결>의 역사를 아로새겨준 김구선생의 생애를 서거 70주년은 맞아 돌아본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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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에 도착한 김구 선생과 일행(1948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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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연석회의서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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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연석회의서 김일성주석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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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김일성주석과 김구선생 모습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한지 오늘 2019년  6월26일로 70주년이 된다. 김구의 생애는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에 김구선생의 가장 값있는 삶은 생의 마지막 시기였다. 그것은 반공의식을 깨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김일성주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민족대단결>의 역사를 이뤘던 업적이다. 백범선생의 생애를 돌아본다.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김성수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위키백과에서 소개한 백범김구선생의 가문과 삶의 족적은 다름과 같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1]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2][3]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4],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5]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편집]

38선에서 모습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197]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도 반대하였다.[198] 그리고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198],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99]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렘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99]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99] 는 공격을 당했다.

남북협상 참여 당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200]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가 방북할 뜻을 표현하자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교장 앞에 와서 못가십니다 를 외치며 가로막았다. 김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지만 학생들이 물러나려 하지 않자,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에게 북행길을 포기한다 하고 발표하고는 담을 넘어서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김구의 출발 소식이 알려지자 북행길을 주저하던 김규식 역시 출발한다.

4월 김구 북행을 결행하려 하자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일행들은 '이승만 박사와 노선이 분열되면 안 된다'며 경교장에 드러누워 김구의 북행을 저지했다[201]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그러나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와서 북행길은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철승 등 청년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갔다. 청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일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북한으로 갔다.

남북협상 참여[편집]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202]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193]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203]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
왼쪽부터 선우진김규식, 김구, 원세훈 순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204]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05]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조국분단의 위기를 만구하기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한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며 ...(이하 중략)...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206]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202]

남북협상의 실패[편집]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고 확신했다는 것이다.[207]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도산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5월 10일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208] 고 했다.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할 수 없이 탈당[208]'하였다. 김선 등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208]'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208]'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208]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208]'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208]'라며 조롱하였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209]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자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210]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210]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편집]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211]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212]

-서울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212]

-자유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212]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213]"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213]"라고 밝혔다.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213]"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이범석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이범석 총리는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212]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신을 극우파로 지적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월 27일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211][214]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와 한성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4]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215] 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그 극우가 대체 누구냐며 윤치영에게 따졌고, 윤치영은 누군지는 알수 없지만 극우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며 응대하였다.

칩거 생활[편집]

김구 (1949년)

한편 김구는 분명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닫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216] 비록 정치도덕가는 아닌 김구였지만 그러한 조선 민족의 희생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그는 김규식과 함께 타협하여 민족통일을 이룩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리처드 로빈슨에 의하면 '두 김씨의 입장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216]' 한다.

1948년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217][218]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217][218]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219]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219]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219]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편집]

김구는 민족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민족의 반역자인 친일파들은 반드시 처단해야한다며 반민특위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그일로 악랄한 친일파였던 장경근김창룡김종원안두희, 등의 모든 친일파들의 입장에선 김구는 신경이 거슬렸던 존재였다. 이일로 인해 암살할 명분이 생기기도 했다.

암살[편집]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193]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220]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193]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221]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21]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221]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222]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222]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222]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암살의 배후[편집]

김구의 묘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223]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224][225][226]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216] 고 진술하였다.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추도사[편집]

암살 직후[편집]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216] 6월 27일 이승만은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216]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216]

김구의 장례는 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독당 측에서는 민족장을 고집했다. 정부에서 이범석과 신성모허정 등을 경교장에 파견하자 조완구조소앙 등은 너희가 죽여놓고 너희가 국장을 하느냐며 흥분했고 실랑이와 몸싸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측이 보낸 사절단과 한독당인사 간에 마찰이 빚어졌고,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거행되었다.[227]

김구의 국민장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고,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후[편집]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228]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229][230]

기타 약력[편집]

1910년대 이전[편집]

임시정부 활동[편집]

광복 이후[편집]

  •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236] 그러나 뒤에 김구는 취임을 거절했다.
  • 1945년 11월 김구는 임시정부를 정부의 자격으로 귀국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각각 임시정부 송별연을 베풀어 줌.[237]
  • 1945년 11월 2일존 하지 중장,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236]"라고 말함.
  • 8.15광복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임정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
  • 1945년 11월 24일 존 하지 중장,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
  •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 1945년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기도 하였다.[238]
  •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주제의 방송담화(엄항섭 대독)에서 강력한 국방군의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239]
  •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명(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했다.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좌익성격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같은 날 천도교 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행사를 축소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156][240]
  •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된 데 이어,[241]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241]
  • 1946년 3월 1일 이승만과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 1946년 6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유골을 찾아,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였다.[193] 한편 방응모등의 재정적 후원을 얻었다.[출처 필요]
  •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발표하다. 그러나 이때 김구는 탈장증세로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242]
  •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식에 참석,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43]
  •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193]
  • 1947년 1월 전국반탁학련 반탁 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46년과 같은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대대적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만류와 존 하지의 경고로 보류하였다.[243]
  • 1947년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인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에서 참석하여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244]
  •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맡음.
  •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자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다. 이때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245]
  •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193]
  • 1948년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발표
  •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 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여,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 1948년 3월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 자격으로 미군정청 재판정에 출두하였다.[246]
  •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김일성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1948년 8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 장남 김인의 유골을 봉환하고,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 천장식을 하고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다.[193]
  • 1949년 1월 서울특별시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 1949년 3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193]
  •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향년 74세.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등록문화재 439호~442호로 등록

의혹과 논란[편집]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가 쿠데타를 계획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쿠데타를 기도하였다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이범석은 그가 극좌파와 손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주장했다.[211] 그리고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여순 사건 당시 극우 정객이 극좌파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하여 그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212] 그러자 김구는 조선일보에 사설을 발표, 여순 사건에 극우 관련운은 이해난(이해하기 어렵다.)이다고 맞받아쳤다.[212] 그러나 이후에도 김구의 쿠데타 준비설은 계속 나타났다.

국군 내에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김구를 추대하려는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 CIC는 김구가 정부 전복 쿠데타를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의 첩보기관 CIC의 보고에 의하면 1949년 그는 염동진과 손잡고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개입한 증거[247]' 가 미군 방첩대에 입수되었다. 한편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225]

한편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중 제4연대 소속 장교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울 계획을 짜기도 한다.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 과정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보다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토로되었으며,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247] 이에 따르면 이 정부는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북한군 내부의모든 친소장교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장교들과 경찰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요원은 이승만 배후에 미국의 세력, 권력과 위신 때문에 비록 현재는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는 결코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이 재건하고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국가들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247]'는 것이다.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같이 관여[225]하였다. 염동진과의 쿠데타 기도는 곧 미군 방첩대와 당시 대한민국 총리인 이범석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고, 염동진과 김구의 쿠데타 시도 관련 문건이 미국 방첩대에 전달되면서 그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었다. 염동진은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역할을 해왔다.[247] 그런데 염동진이 국군내 자료를 김구에게 전달하고, 군내 불만세력과 김구의 사이를 연결 목적으로 작성한 서신이 미군정 방첩대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군대내 파벌은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247] 한 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247] 이후 이 문서는 미군정 방첩대 수중에 들어간다.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 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이루어졌다.[247] 그러나 한편으로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225],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225]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248]

한편 김구가 암살된 직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구의 암살 배경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어느 고위층이 외국 언론에 김구의 쿠데타 미수 계획을 발설하였다.[216] 이 익명의 고위인사는 외신 기자들에게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밝혔고, 바로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216] 라고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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