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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자료]민주사회건설협의회 –유럽 민족민주운동 30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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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3-11 00:00 조회9,1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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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민건30돌과 유럽민민운동 30돌을 맞아 민건동지회(준)[임의길.박대원 공동대표]가 2004년 3월6일 후랑크후르트에서 개최한 기념행사에서 민족통신에 제공한 자료들입니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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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유럽 민족민주운동 30돌 맞이-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2004년 3월1일에,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이하 민건회)가 독일에서 조직이 된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해외민족민주운동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 1974년3월1일, 독일의 당시 수도인 본의 뮨스터광장에서 벌어졌다.

minkun-15.jpg [사진]1974년3월1일 본 데모에서, „한국의 파시스트 박정희도당을 타도하자!“는 프랫카드가 보인다. 연설하는 분은 이영빈 목사

이날 박정희 „유신독재타도“를 외치는 성토대회 및 시위가 있었으며, 이날 역사적인 „민건회 제 1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에서 독일동포사회의 각계 인사 55인은 „동포여! 사회구조의 모순과 국가의 위기를 철저히 인식하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또 „민족의 굴욕적인 예속이 다시 오기 전에, 국민이 영원히 한 독재자의 노예로 되기 전에 수수방관적 자세를 버리고, 일어나서 이성과 양심을 거스린 독재의 무리들을 물리치자!“고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참된 민주사회의 건설은 현실의 철저한 비판과 분석을 통해 반민주적이고, 반사회적인 요인을 찾아내고 이를 제거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우리를 깨우치고 있었다.

minkun-14.jpg[사진]"박독재 타도하고 민주사회 건설하자!"는 프랏카드가 보인다.-1974년3월1일 본 데모 시위장면

민건회가 본 반민주적이고 반사회적인 요인은 „박정권의 현 파쇼적 독재체제“였다. 민건은 바로 이 체제를 배격해야 하는 이유를 들고 있다.
1) „10월유신은 민주사회의 반역이다“ . 왜냐하면 „개인의 권력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헌법을 제멋대로 고쳐버렸기 때문이다“고 논거를 대고 있다. 2) „극도의 빈부격차와 부정부패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3) „굴욕적인 대일정책이 국민경제를 예속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4) „잔인무도한 정보정치는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다“고 박정권의 하수인인 KCIA의 방만함을 고발하고 있다. 특히 “죄없는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끌고가 법도 인도도 존재치 않는 정보부의 지하실에서 몽둥이로 치고, 불로 지지고, 불구로 만드는 마수의 집단이 김대중씨를 수은을 먹여, 현해탄에 던지려 했고, 최종길교수를 고문으로 죽게하지 않았는가? 무엇때문에 국민의 혈세를 바쳐 이같은 악의 떼들이 막대한 국가예산을 허비하게 하고, 또 공포에 떨어야 하는가?“
(민건회, „민주한국, 사설집“, 1984 프랑크푸르트, 110쪽)

그러면서 박정권의 붕괴후 올 수 있는 5년 뒤를 내다보는 예언을 하고 있었다.

minkun-16.jpg „박정희는 물러가라!“는 구호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라는 프랫카드가 보인다. 중앙에 후로이덴베르그 교수가 „외세 물리치고,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팻말을 목에 걸고 있다.(사진 뒤에, 1977년4월20일로 찍여있음)민건회 성원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 파울-게하르트 교회 앞에서의 집회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체제의 개혁이 없는 단순한 정권이나 인물만의 교체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구국을 빙자하여 일어날 지도 모를 제2의 군사쿠데타를 우리는 철저히 경계한다. 그것은 항상 민주사회를 배반하며 권력탈취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우리에게 유효한 충고를 당시에 벌써 하고 있었다.
„올바른 민주사회는 국민대중이 주권을 회복하고, 사회대중의 이익을 대변하여 국가와 사회의 권력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건설된다. 그리고 이것은 국민대중 스스로가 확고한 민주의식과 참여정신을 통해 지켜 나가야 한다.“

위 선언서에 서명한 55명은 누구일까?

minkun-4.jpg[사진]민건회의 잡지 <광장> 제3호의 표지(1975년3월15일)송두율교수의 „권두언“이 보인다. 또 „민주회복의 물결은 세차다“는 이삼열교수의 글도 보인다.

여기서는 몇분만 소개한다. 김길순박사(한국학술원 원장, 간병으로 병사), 박대원(현 민건동지회(준) 공동대표), 송두율교수와 정정희여사(초대의장, 뮨스터대학 사회학과 교수, 현재 감옥에 수감중)(송교수의 부인,국내에서 남편의 석방과 국보법철폐를 위해 분주희 뛰고 있음) 윤이상교수(한국인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약한 세계적인 작곡가, 고향에 돌아갈 꿈을 실현못하고, 독일의 수도 베를린 근교지역인 클라도에 묻혀있음) 이영빈목사와 김순환여사(민건이후, 기통회를 조직, 북과 대화의 통로를 처음으로 열었음), 이화선목사(이영빈목사와 함께 북을 방문, 북의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나눔), 임희길(현 민건동지회(준)의 공동대표) 이삼열교수(숭실대교수), 이지와 박소은(민건회의 막내로 참가, 이번 30주년행사를 준비했음) 등등.

55인의 명단은 위의 책 (111-112쪽)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민건회는 매체를 발간하여 국내의 민주화투쟁 소식을 전하고 연대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그 매체로는 „광장“(1974년7월15일 1호 발간)이 있고, 1976년1월 15일부터 „민주한국“으로 개편되었다. 그 개편을 알리는 소리에서 „종래의 ‚광장’을 민주사회건설의 방향정립을 위한 이론지로 편집의 방향을 바꾸고, 이러한 좌표설정에 필요한 자료와 의견을 그때그때 정리하여 속히 알리는 „민주한국“을 정기적으로 발간하기로 하였다.“고 쓰고 있다.(„민주한국“ 1976/1)

minkun-5.jpg[사진]민건회의 잡지 <광장> 제1호의 표지(1974년7월15일)

„민건회 창설 10주년“을 맞이하면서“라는 민주한국의 사설에서 „그동안 ‚민건회’ 발간문을 통해서 국내외의 상황을 교포들에게 알리고, 시위와 각종집회를 열어, 반민주적 ‚박정권’의 잔인한 인권 침해를 고발하는 사업을 주로 전개시키면서, 매년 수차의 토론회와 연구발표모임을 통해서 장래의 민주한국상을 그리고 또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문제의식 제기와 능력개발을 도모하였다.“고 활동상황을 알리고 있다.(위 사설집, 53쪽)

그러면서 우리 민족민주운동이 견지해야 할 논리를 쓰고 있다.
„’민중의 논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시인 김지하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단(斷)’의 논리다. 즉 더러운 과거와의 끊음, 또는 결별의 논리다.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지배자의 논리’와 ‚행적’을 구분짓고 있다.
„일본 <아베>총독에게 아부해서 군수 나부랑이 벼슬을 했던 자들이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에 아부해서 잽싸게 변신하고, 곧 이승만시기에는 <장관> 감투를 쓰고 나더니 짧은 <장면정권>를 차지하고, <박정희없는> 오늘에도 국사를 논할 수 있는 한국적 논리와 세계관(?)을 짜르지 못하는 한에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는 밝은 <민주한국>의 미래상은 없다“고 지적.(1980년3월10일 제27호 사설에서)

그리고 „단의 철학“의 정립과 이의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197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3.1운동> 60주년 및 민건회 창립5주년을 맞이해 <민건 제2선언>이 나온다.

minkun-3.jpg[사진] 민건회 잡지 <민주한국> 1976년1호의 표지 민건회 의장 송두율교수의 „<민주한국>을 내면서“란 글이 보인다.


„우리 남북한 5천만민족은 통일없이는 하루도 발을 펴고 잘 수 없고, 통일없이는 복된미래를 우리 후손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확신을 버려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남북의 분단문제에 시야를 돌리고 있다. 그러면서 10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1)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은 평화적, 자주적 그리고 민족대단결의 원칙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2)우리는 남북한을 통해서 비생산적인 군비경쟁을 지양하며, 이를 남북한 민중의 복지를 위한 사업으로 전환시킬 것을 주장한다. {당시로는 상당한 앞서있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3) 우리는 모든 정치적인 의사결정은 의회민주주의 원칙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우리는 자주성과 호혜평등의 원칙하에서 모든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우리는 지금까지의 외자의존 위에 진행된 수출산업 일변도의 모순된 경제체제를 시정하며, 부존자원의 최대활용과 내수시장의 확충위에 민중의 복지가 보장되는 자립경제의 건설을 주장한다.

6) 우리는 부의 직접적인 생산자이면서도 공평한 분배로부터 소외된 노동자, 농민 등 근로민중이 사회적 부의 분배에 공정히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을 주장한다.

minkun-20.jpg[사진]<민주한국 사설집>„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80년대에는 기필코 70년대에 이룩하지 못한 <민주, 민중, 민족혁명>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 우리 빛나는 해외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시다!“는 민건회의 의장 정규명박사의 글이 실려있다.(1984년3월1일)

7) 우리는 환경오염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보건, 도시행정 등의 사회개발정책의 제모순을 근본적으로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8) 우리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 신앙등 국민의 기본권적 자유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부분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민중시인 김지하씨를 비롯 수많은 지식인, 종교인 등을 그들이 발표한 시나 논문, 신앙고백이 독재체제의 비위를 거슬린다는 단순한 이유로 반공법, 국가보안법, 긴급조치의 올가미를 씌워 중형을 선고하는 만행을 전세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로 이 김지하를 석방하고, 사형에서 구출하는데 해외에서 무던히 애를 썼던 한 분인 송두율교수가 이제는 거꾸로 안양의 한 감옥에 갖혀 있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아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비록 25년전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국민의 기본적인 제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한 어떠한 개인이나 민족에게도 창의성은 기대할 수가 없다. 따라서 유신독재 이후의 새로운 민족적 정권은 다시는 국민의 민주적 제 권리가 유린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법의 제도적 보장을 해야 한다.“

9) 우리는 모든 국민이 교육에의 기회균등을 누리도록 제도적, 물질적으로 보장을 함과 아울러 학원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며,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인간부재, 민족부재의 교육을 지양할 것을 주장한다.
„이와같은 인간부재, 민족부재의 교육은 민주, 민중, 민족적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바탕을 깡그리 말살시켰으며 개인의 이기와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약삭빠르고, 비굴한 인간만을 키워온 것이 한국의 교육이었다. 교육내용은 민주, 민중, 민족적인 것이어야 하며, 학문과 연구의 자유도 보장되어야 한다.“

10) 우리는 신식민지적, 퇴폐적인 문화현상의 근절과 민족문화의 창조적 발양에 적극 힘쓸 것을 주장한다.“

이제까지 부분이 공적인 자료에 의한 관찰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내부에서 본 ‚민건회’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최초의 창립목표는 크게 „박정희 군부독재와 유신체제의 타도“에 두었고,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광장과 포름의 역할을 하는데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의 충분했던가? 라는 질문에는 보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르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한 민건회 구성원은 민건에 참여한 인사들이 –노동자, 유학생, 종교인, 지성인 등 –에서 보듯, 다양한 계층의 출신이고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의 방향 (예를 들면, 선통일 후민주냐, 선민주 후통일이냐) 또한 각기 달라, 후에 구성원들 사이에 분열을 초래하는 중심문제로까지 발전확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향점과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방향성에서 내부갈등과 분열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만일 당시에 이 문제를 놓고, 구성원을 더 확대하고 대중화시키면서 공개논의를 통해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더라면, 오히려 분열이 아니라 운동이 건전하게 발전하는 방향으로도 갈 수 있었지 않았을가 추측을 해 본다.

하지만 이것은 운동 내적인 문제이지만, 외적으로도 박정희 군사체제의 압박과 위협도 항상 상존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내적으로 영향을 미쳐 분열이 가속화되는 것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이곳 독일이 외국인에게 대해 제한과 억지정책을 썼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인자들이 거주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조건이 예초부터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유학생들이 학위뒤에 귀국함으로써 운동인자의 확대재생산이 아닌 축소를 가져와 조직기반이 약화내지 소멸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유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국내정치와 사회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고무하고 영향을 주는데 민건회가 많은 역할을 한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독일사회에 „한국문제“, „조선문제“를 계몽하고, 독일인과 연대하고, 일하면서 두 민족구성원간의 친교의 뿌리를 내리게 했으며, 이곳 사회에 한국과 아세아에 대한 인식지평과 심층이해를 촉발시키고, 유지시키는데 기여한 공헌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우리 해외민족민주운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백림사건“이란 엄청난 동포사회의 파괴의 경험을 겪었음에도 굽히지 않고, 다시 집결하여 끝내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붕괴시키는데 해외에서 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국내에서 할 수 없었던 통일의 대화를 바로 민건의 참여세력들 중 일부가 민건의 틀이 아닌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면서 (예를 들면, 기통회) 해낸 노력은 후에 „범민련“으로까지 확대되는 기틀을 제공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안석교박사, 윤이상교수, 김길순박사, 강돈구교수, 이소양선생 등 25명이 넘는 선배들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또 60여명이 넘는 유럽의 민족민주인사 들이 고국을 방문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자기희생 속에서 한국과 한반도의 모든 정치발전과정에 음으로, 양으로 지속적인 개입을 함으로써 한국의 운동사 흐름에, 또 민주, 민족, 민중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지금이라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개입정신“이 있었기에, 우리의 운동이 올바른 길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기 바란다.

[출처:2004.3.6 민건 30돌 기념식 준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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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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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에 대한 시위, 집회. „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는 글귀가 보인다. 뒤에 „살인마 전두환과 군정은 물러가라!“는 글귀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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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가두 시위광경, 1974.7.17일. „김대중을 구출하자“는 구호가 보인다.특히 이날 뿌려진 데모 선전물에는 „내 조국의 지성인들아! 청년학생들아! 종교인들아!, 민중의 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한 우리의 민족투사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으려나!“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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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6월5-6일까지 독일 본에서 한민련 유럽지역의 주최로 열린 „한국문제 국제회의“ 광경, 중앙에 윤이상 선생과 오른쪽 옆에 균터 후로이덴베르그 교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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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박 독재를 물리치자!“라는 독어 구호가 보인다.오른쪽에 서 계신 분이 안석교박사 (민건회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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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A는 꺼져라!“ „연좌죄는 철폐하라!“는 구호가 보인다.마이크를 들고 연설하는 분이 윤이상 선생.1977년 11월6일, 서백림지역 민건회원들의 시위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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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5월의 한 시위광경. 투쟁하는 광주시민들과 연대하는 집회 „김대중 선생을 처형하지 마라!“ „민주적인 헌법을 도입하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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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베를린의 반 전두환 시위 광경. 독일경찰의 호위속에서 시가 행진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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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학살자 전두환에게 사형을!“이란 독어 팻말이 보인다. 베를린의 화사넨 거리 표시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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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스피커를 폭스바겐 버스에 걸고 거리데모를 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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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이라 쓴 현수막이 보인다. 윤이상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

minkun-7.jpg
1979년10월30일 본이 한국대사관에 40여명의 반체제인사들이 진입, 농성, 성토대회.박정희가 살해된 뒤, 전 외무장관 최덕신장군, 이영빈 목사 등이 조문객으로 위장, 본의 대사관에 진입하여 박정희살해사건과 관련된 한국정세에 관해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고 시위와 성토대회를 가졌다. 독일 일간지<슈트도이취짜이뚱> 1979년10월31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계엄령을 즉시 해제하라!“, „유신헌법 철폐하라!“, „모든 정치범을 즉시 석방하라!“, „외국정부는 한국의 현정권을 지원하는 모든 행동을 즉시 중단하라!“ 등의 요구를 내세웠다고 한다.

minkun-6.jpg
발행인 정철제, 편집인 오석근 등 남북사회문제연구회가 펴낸 계간 <주체> 3호(1974년7월15일 발행) „머릿말“에 „우리 노동자들도 이제 권리를 찾아 궐기할 때는 왔다. 글종이 미덕으로, 인내가 질서확립의 구실로 조작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러한 뜻에서 이번 <주체> 제3호는 노동문제를 특집으로 했고, 여기에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경제 자립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고 쓰고 있다.

minkun-2.jpg
<민주한국> 1976년2호 표지: 이영빈 목사의 „기독교와 공산주의“란 글이 실려있다.또 „김지하 어머니의 호소“란 글도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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