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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발표 논문] 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 개괄</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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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3-08-04 00:00 조회2,4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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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는 2003년 8월2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이날 이자리에서 창립기념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된 논문들중 양은식 박사의 발제내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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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

차례

1 이민100년 민족운동 100년
2 민족운동의 역사적 성격
3 민족운동의 이념문제, 쟁점, 조직운동
4 민족운동과 미국의 운동환경
5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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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민 100년 민족운동 100년

yangeunsik-1.jpg한인이민은 올해 100년을 맞이한다. 20세기는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유례없는 격동의 시대였다. 이러한 충격은 19세기말 동아시아 전체가 서방제국주의 충격 속에서 청, 일, 미, 영 ,러, 독, 불이 이해를 다투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 결과물이었다. 약 250만 한인들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루는 시기, 만주로, 시베리아로, 하와이, 멕시코, 일본으로 대량 탈출한다. 이런 정치소용돌이 속에서 약 2만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이민으로 들어온다. 아시아 이민배척으로 이민 물결은 하와이 이민을 끝으로 중단되었다가 1960말 새 이민법 통과로 해마다 약 2-3만명의 새 이민이 들어와 현재 200만명에 가까운 한인이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민에 있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새 땅에서 경제적 사회적 정착을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한인이민 사회는 정착문제와 함께 조국의 정치적 숙제에 투쟁적 참여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민역사 100년이 민족운동역사 100년이다. 1903년 미주이민들이 하와이 상륙과 동시에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하와이 뜨거운 태양아래 사탕수수 농장에서 피땀으로 한 달에 번 돈 16불 중 10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쾌척한다. 전체 동포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일어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광복 후 잠시 중단되지만 조국에서 군사 폭력이 휩쓸자 민주화운동(1960-1989)으로, 외세와 국내극우 보수세력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라와 민족이 영구분단의 조짐이 보이자 통일운동(1980-현재)으로 민족운동은 다시 이어진다.

이러한 역사현상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한국사람들은 실로 정치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일까.

조국에서의 대형 민족 탈출이 생기는 것은 조국이 결코 그들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먹고 살만한 환경을 마련해 주지 못한 까닭이다. 초기 이민사회에는 한인들끼리 서로 돌봐주고 도와주는 동포적 정서와 문화가 있었다. 한인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음에 대한 남다른 정서가 "우리"로 결합한다. 특히 피지배계층 사이에 이런 정서가 지배적이다. 정치에 깊은 관심은 보다 깊은 한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정치적 압제에 대한 공통적 분노, 이것의 상관작용이 정치적 반응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전혀 다른 지정학적 판도를 경험한다. 중국의 조공국으로 안전을 보장받고 문화와 선진 경제의 일방통로로 안정되었던 이조는 다원적 제국주의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 태풍 속 조각배와 같은 체험을 갖는 것이다. 20세기 동아시아 역사는 가히 룰도 없는 열강의 황야의 결투장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한국정치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을 철처히 체험한다. 호랑이 등에 탄 사람처럼, 요술쟁이 손에 들린 접시처럼 소용돌이 격류속을 헤엄친다. 지난 100년 역사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세에 농락 당하면서도 아무런 대책도 없는 봉건군주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반군주 반외세의 햇불을 드는 것이다. 민족의 대각성이 곧 민족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 식민지로의 전락, 세계대전,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 미군주둔, 남북분단,분단국가출현, 6.25 전쟁, 냉전의 전초기지, 군사독재, 남북 군사긴장 연속, 핵전쟁의 위기. 한국인의 정치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은 이 소용돌이는 외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하고 민족자결로 정치적 숙제를 푸는 배타적이면서 포용적 민족주의는 이렇게 하여 탄생한다.

2. 미주 민족운동의 역사적 성격

민족운동은 기본적으로 군주주권을 부인하고 국민주권국가를 수립하는 역사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별개로 이해하지 말고 근대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전체 역사과정 속의 한 부문으로 조감할 때 각 단계마다 역사적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강만길.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142-143) 이 견해에 따르면 "독립운동에서 복벽주의는 항일운동의 사명은 다 할 수 있어도 근대 민족주의적 사명은 다 할 수 없었다" 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가 옳다고 본다. 그러면 미주동포 민족은 한국현대사의 한 r터 일 뿐인가.

미주 동포 민족운동은 첫째 특성은 조국의 운명과 정치적 과제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주동포 민족운동은 한국현대사의 한 장으로 취급되어야 옳을는지 모른다. 이민으로서 절박한 생활환경 개선 내지 이민정착을 외면하고 동포들을 조국의 이슈에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민족운동이 내거는 조국운명/과제와의 일치화는 한(조선)민족 통합 역활을 하는 기능이 있다. 미국사회라는 거대한 대양 속에 동화될 운명의 개개인을 한민족으로 묵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 초기 독립운동 시절의 민족운동은 분명히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주 민족운동의 둘째 특성은 민족운동이 내 세운 기치와 실천면에서 식민통치에 대한 치열한 저항, 군사독재 반대, 민주주의 고양, 민족화해/평화통일 등 세계적 인류 보편가치를 높이 든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이 미주한인 이민들의 정착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미국역사의 한 장이라는 점이다. 한인 이민은 유럽이민의 선례를 무조건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차원 높은 다원문화의 미국시민으로 등장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민족운동 리더쉽은 천 갈래 만 갈래의 미국문화 흐름 속에서 한국 민족사의 흐름과 일치시키며 인류 보편문화와 통하는 큰 강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3. 민족운동의 이념, 쟁점과 조직운동

독립운동 초기 운동의 목표는 단순히 "국권회복," "노예된 동족의 자유회복" 또는 "삼천리강산의 완전 독립"을 못토로 한 항일운동이었다. 출중한 민족지도자들이 있은 까닭에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이 되자 이민사회 전체가 결집하여 일어난다.
비록 독립운동의 실천노선은 달랐으나 3.1운동이 일기까지 한인 사회는 독립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단결된 힘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지도자들이 중국으로 가자 리더쉽은 <대한인 국민회>로 옮겨간다. 조직의 중심은 비교적 젊은 층으로 옮겨졌으나 이념은 전기 지도자들을 계승 한 것이었다. 이념과 운동목표에 공통성을 가졌으나 국민회와 동지회 사이에는 단결과 협력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1920년 이후 독립운동은 점차 조직 이기주의와 패권경쟁으로 민족운동의 효율과 단합이 비생산적인 파쟁에 함몰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도학생 중심의 새로운 조직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 청년들의 열기와 이념의 다양화로 새로운 활기를 찾지만 기성독립운동이 이를 포용하지 않자 독립운동은 보수와 진보/좌우로 갈라진다. 국민회 동지회등 보수진영은 국권회복이라는 이념을 고수 <신한민보>를 통해 홍보하며 동포사회를 계속주도하나 진보진영은 정세연구모임, 기관지 <독립>을 창간, 진보적 관점을 동포사회에 주입하려 노력하면서 조국의 국권회복을 넘어서 독립 후 새나라의 건국이념에 대한 토론도 편다. 국민회가 <애국금>을 걷어 외교부와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데 반하여 진보진영은 중국에서 군사활동을 위해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을 지원한다.

이러한 활동전개에서 국민회와 진보진영은 독립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있으면서도 민족운동 프로그램 측면에서는 대립한다. 민족혁명당 회원들도 초기에는 국민회 회원들이었으며 사상의 뿌리는 같이 안창호에 두고 있었으나 서로 적대관계가 되면서 민족혁명당은 당시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들여 더욱 좌경화 하게된다. 회고컨대 이념과 조직의 차이가 같은 목적을 가진 독립운동에 극히 파괴적인 부정적 결과를 낳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임을 남겨 놓았다.
이념과 사상의 골짜기는 광복과 더불어 남에 미군이, 북에 소련군이 진주하며 2개의 분단국가와 정부가 창설되면서 더욱 깊어진다. 보수진영은 이승만과 그의 동지들이 남으로 귀환하고 민족혁명당 사람들 중 몇은 북으로 돌아가 건국사업에 참여한다. 국민회와 흥사단 회원들은 이승만이 집권하자 남한에 돌아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다. 이념의 차이, 조직의 다름이 결국 독립은 찾기 위한 길에서 자신을 버려 헌신한 생애가 반세기 분렬과 미움의 상처를 민족역사에 남기고 간다.

미주 동포사회의 민족운동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새로운 쟁점을 들고
불이 지핀다. 6.25전쟁이 휴전을 맞고 미국의 맥카시 선풍이 자자들고 늙고 지친 동포사회는 정치에서 떠났으나 해방 후 대거 밀려온 한국 유학생과 1960년대 말 2차 이민 물결로 한인동포 사회가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되는 지음 남한에는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군사독재를 강화, 60년대 한일협정, 삼선개헌, 통일혁명당 사건을 조작,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반대 세력을 가차없이 투옥 고문, 정치 테로를 강행하자 남한은 독재반대 민주화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학생을 선도로, 종교인, 언론인, 학계, 법조계, 정치인들이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기치를 든다.

이에 응하여 미국의 대도시 한인인구 밀집지역 로스앤젤리스, 뉴욕, 워싱턴에도 군사정권 반대 투쟁 집회와 시위가 일어나고 점차 조직화된다. 1972년 박정희 3선에 대항해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김대중의 납치가 미주 동포사회에도 폭팔적인 거점을 마련했다. 뉴욕과 워싱턴에서는 김재준, 임창영 중심으로 로시안젤리스에서 김상돈, 차상달등이 주도로 이끌어 나갔는데 초기 민주화운동은 본격적 조직운동 보다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었다.
민주화운동은 1980년 광주에서 군부의 총칼아래 수 천명의 사상자가 보도되자 질적으로 조직적으로 혁명적 전환을 가져온다. 광주 후 미주동포 사회에서의 집회와 시위의 열기는 충천하였으며 미국정부기관들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민주화운동이 범 교포적으로 확대 발전되자 남한 유신정부는 70년대 중반부터 한국 중앙정보부를 미주동포 민주화 운동 저지 파괴 공작에 조직적으로 투입한다. 박정희 정부를 반대하는 인사는 "공산주의자""반한" "친북 인사"로 규정하고 남한 방문은 물론 친척들에게 까지 공포를 주고 동포사회에서 노골적인 격리를 획책한다. KCIA의 대 미주동포사회 공작은 매우 치밀하고 악랄하였다.

한국정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이룩한 해외민주화 운동의 성과는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이 77년에 동경에서 결성 된 일일 것이다. 이로서 해외 각 지역에서 각기 하던 운동은 세계적 운동연대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무엇보다 80년대에 들어서자 민주화운동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에 대한 한국민중의 인식에 혁명적 전환이 온 것이다. 80년 5월, 박정희가 죽고 "한국 민주화의 봄"이라는 기대 속에 진행되던 민주화 전개과정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전두환이 이끄는 한국군부의 공수부대에 의해 수 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한국정국은 또 한번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광주로 한국군 병력 이동을 허용 한 것이 주한미군 사령관 윅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남한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반미감정이 폭발한다. 반미감정은 1982년에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85년에는 대학생들의 서울문화원 점거하는 사건으로 확대된다. 광주문제는 결국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일제에서 해방시키고 6.25전쟁에서 남한을 구한 은인으로 인식하던 미국은 이제 점령군으로, 한국 식민지 대부로 보는 시각이 운동 진영을 넘어 일반대중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이러한 미국에 대한 인식전환은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하여 한국사회 변혁이론으로 더욱 심화되는 현상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사회구성체 이론, 변혁운동의 방법론연구에서 한국을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한다.

미주 민주화운동에서 남한의 변혁이론 수용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나타나지만 미주운동에서도 이미 77년 민주화운동 노선을 "자유민주주의"에 두느냐 "자주"로 하는냐는 대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1: 서정균. 변혁과 통일303-304) 미주운동은 70년대에는 자유민주주의 노선이 대세를 이루다가 80년에 이루러는 자주노선이 점차 대세로 굳어졌다고 보여진다.

1980년 초에 미주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화와 관련한 전략방안에 새로운 주장이 나타난다. "한국의 민주화를 성취하는데 방해가 되는 최대요인은 남북대결이다. 유신독재정부는 남북분단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박정희를 반대하는 사람을 친북인사로 몰아 부친다. 미국도 이 현상을 최대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민주화는 통일을 달성 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성취된다."

미주운동에서는 한국의 경우와 전혀 다른 측면에서 민주화/변혁운동에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미주와 유럽의 인사들 30여명이 비엔나에서 북조선의 인사들과 기독자간의 대화라는 대형 회합을 열었다. 이것은 분단 35년만에 처음으로 있은 해외인사들과 북조선인사들과의 만남이었다. 집회의 주제는 조국의 통일문제였다. 이 회의를 계기로 미주에서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겹치면서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북과 미주동포간에 대화는 이듬해에는 헬싱키에서, 다시 비엔나에서 회합을 거듭하면서 북과 학술 교류, 이산가족 방문, 경제인교류로 확대된다. 미주운동의 초점은 통일운동으로 바뀌면서 일본의 진보적 동포학자들과 해외동포학자 민족통일 심포지움 운동도 조직, 유럽, 일본, 미국 등지에서 열면서 통일문제의 쟁점을 보다 대담하게 확대시켜 나갔다.

미주에 본격적 통일운동 조직이 하나 둘 생겨난다. 그중 특기 할만한 조직은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와 한국청년연합(한청)이다. 한청은 주로 청년들을 결합시켜 남한운동과 유사한 형태의 민주화/통일운동 의식화에 힘쓰는 한편 통협은 40년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상봉을 북과 협의 주선, 4-5천명의 이산가족을 찾아주고 만나게 했다. 미국의 동포학자 6명 방문단의 북한방문기는 남한 지하출판으로 복제되어 특히 운동권의 교재로 널리 읽히면서 점차 한국사회의 "북한 바로알기" 운동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충격은 반공의 동토에 통일의 씨를 뿌린 결과가 되었으며 남한의 군사독재타도를 넘어 남북통일, 반미자주가 운동의 핵심 강령으로 전환되는 계기에 영향을 미쳤다. 미주와 유럽운동이 북과 대화를 열어놓은 것은 지리적 이점이 유리한데도 있지만 위험이 따르는 일에 희생을 각오하고 나선 인사들의 용기 탓이다.

90년대 들어서면서 통일운동은 더욱 조직적 형태를 갖추게 되지만 통일운동의 남북 해외 3자 연대 문제가 주요문제로 등장, 남한 운동권내에서 협의하였으나 북과의 연대운동은 아직 이르다는 소극적인 결론 속에 통일운동을 남북해외 3자 대 연대로 시도했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제한적 연대운동은 범민련 중심으로 나갔다. 범민련은 해마다 평양, 동경, 심양, 판문점 등지에서 통일대축전을 개최했다.

미주 통일운동은 선구적인 역할은 하였으나 정작 미주 동포사회에 통일운동 대중화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한정부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동포사회 차단정책에 밀려 동포들을 통일운동에 가담시키는데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대부분 보수적인 동포사회 환경속에서 통일운동은 친북운동으로 낙인되고 동포들은 공포로 외면하게 되어 통일운동이 대중화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통일운동 내 조직간에 협조 내지 연대가 잘 되지 않는 점, 운영재정 마련이 매우 어려운 이유 등으로 운동이 엘리트운동에서 더 크게 나가지 못한 점이다.


4. 민족운동과 미국의 운동환경

한인 해외동포들이 현재 미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지난 100년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특별하다. 한국전쟁이후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혈맹관계 라 한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점차 반미화 되고 있는 것은 미주동포의 입장에서 볼 때 불행한 일이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은 미국이라는 정치, 사회 환경 속에서 전개된 민족운동들이었다. 미국은 다민족 이민으로 구성된 나라인 까닭에 미국사회에서는 각 민족 운동이 수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민족운동은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정부는 미주한인동포 민족운동을 어떻게 받아드렸나. 전반적으로 보면 미국의 태도는 미국의 정책과 국익에 기초한 판단에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일반적으로 미국 내 사회 질서에 영향을 주는 사안이 아닌 한 무관심, 불개입의 입장을 보이나 미국의 외교안보와 사회 안전에 관련된 사안에는 예민하게 반응을 나타냈다.

독립운동 초기, 로스앤젤리스 소재 일본총영사관이 한인들은 일본 국민이라고 주장, 관활권을 주장한일이 있었다. 국민회는 즉각 미국무성에 "한국인들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 전에 떠났다. 따라서 자신들은 한국인이며 자신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고 반박하고 망명정부의 지위를 요구 한 적이 있다.( ) 국무성은 한인을 일본국민이 아닌 특수신분으로 대우했다. 국민회는 일종의 대사관격의 역할을 인정받는다. 일본과 미국이 점차 적대관계가 되는 1930년대에는 한인동포사회와 미국정부는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서 미국무성으로 보낸 외교적 청원은 대부분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이승만이 광복 후 귀국문제와 대통령추대에 미국이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반공 일변도 입장이 미국 냉전정책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은 독립운동에 대하여 느슨하고 소극적 협조의 입장을 보인 반면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서는 보다 예민한 관찰과 반응을 보인다. 미국은 헌법정신과 정책으로 민주주의를 고무하지만 때로는 군사독재를 지원하는 모순을 들어낸다. 김대중 구출문제에 미국이 개입하고 한국 군사정부를 견제하나 광주민중항쟁에서 보듯이 미국의 안보정책과 직결 될 때는 독재정부를 지원한다. 민주화항쟁 시기, 미국의회는 수 없는 청문회를 열어 독재정부 비리와 인권문제에 개입하지만 미주동포운동이 북조선과 관계가 심화되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미 정보당국은 이를 주요 사찰 대상으로 삼는다. 예정웅사건이 하나의 예이다. 6.25 전쟁당시 민족혁명당 간부들을 "비미국인 활동 미의회 조사윈원회"에서 연행 조사한 일이 있다. 한국에서 여중생 사망사건이후 반미정서가 급속히 확장됨에 따라 촛불 시위가 미주 동포사회에 번지자 미국정부는 특히 예민한 반응을 나타냈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 주류언론의 경우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미국에 대하여 애국적이냐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느냐가 잣대이다. 반면 민주화 운동이나 통일운동에서 미국 진보적 이념단체, 종교단체나 개인들은 동정적인 연대와 협력을 보였다. 그러나 본질적 문제에 그들의 협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5. 마치며

한인이민 동포사회는 본국의 국내정치, 주변국가들과의 관계에 매우 예민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것은 자신들이 탈출한 동기가 본국의 어지러운 정치적 산물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조국의 대한 향수 혹은 조국의 정치에 대한 희망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에 기인한다. 20세기 후반 미국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고 한인 동포들의 자본주의 인식, 이기주의, 잘살기에 대한 갈망 등이 높아지는 가운데 2차 이민이후 민족운동은 범 동포적 지지의 터전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에 불리한 사회환경에 처한다. 운동에 대한 동포들의 지원이 독립운동 시기와 전혀 다른 동포사회 환경이었다. .

100년의 민족운동이 무엇을 성취했던가. 미주동포 운동의 목표는 조국의 국권회복, 민주주의 정부, 통일이었지만 미주운동은 실상 이 거창한 목표를 직접 성취할 수단도 자원도 갖고 있지 못하다. 독립운동의 경우 현대화에 성공한 일제와 싸워 이길 군사력은 물론 미주는 전략적, 지리적으로 본질적 중심부에서 격리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희생과 노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역사는 자신에게 부여된 환경을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의해 발전한다. 독립운동이 없었고, 민주화운동이 없고 통일운동이 없었다면 한국현대사에서 민족국가 창설의 기본 쟁점화도 없었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를 수용하고, 군사독재를 받아드리고, 분단을 받아 드리고 약소국 중 약소국으로 치욕스런 역사를 반복하는 나락으로 떨어져 갔을 것이다. 운동은 민족의 발전이 물질적 바탕에 의해 결정되기 보다 어떤 정신적 문화바탕을 가지느냐에 달려있다. 이길은 인류보편적 가치를 선양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화의 선진 후진은 이러한 가치에 기본을 둔다.

이러한 가치를 미주 민족운동이 민족대행진의 반열에 서서 더러는 선두에서 또는 국내동포들과 한 대열에서 길고 긴 조국의 현대민족국가 창설에 참여 한것이다. 민간운동은 각각 자신들이 선 자리에서 부분적인 역할로 시작한다. 그러나 부분들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이 뭉쳐 큰 하나를 이룰 때 힘을 가진다. 민족운동의 목표물은 같다. 민족이 어디에 살던 자신들이 처한 입장과 환경에서 목표물을 향하여 각기 가는 것이다. 미주의 운동은 그것이 국제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미국이라는 땅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뜻에서 국내국외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해외 어느 지역의 운동보다 상징성이 강하다.

미주 운동은 항상 국내 정치 위기에 대한 저항의 진원지 혹은 교두보였으며 이것은 한국정치사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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