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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초기생활 험난 했던 독일동포들(2)<br><br>《재독한인 광부인권협회》투쟁 승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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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6-19 15:41 조회2,1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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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 특파원]투쟁없이는 개선 없고, 운동없이는 미래가 없다.
이 말은 《재독한인광부인권협회》의 투쟁을 두고도 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다.한국정부,
즉 박정희 군사정권은 파독광부들과 파독간호원들을 인질로 차관을 얻어내려는 공작에 몰두하기도
했다. 말로는 인력수출이라고 해 놓고 한국정부가 파독광부들이나 파독간호원들을 지원한 근거들은
없다. 한국정부 당국은 오히려 파독동포근로자들을 돕기 보다는 광산경영주들이나 병원경영주들의
편에 선 입장이었다고 돌이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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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초기생활 험난 했던 독일동포들(2)

《재독한인 광부인권협회》투쟁 승리역사




[독일=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 특파원]현재는 과거의 거울이며 미래는 현재의 반영이 되는 경우가 역사의 물결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상호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뿌리없는 나무가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운동의 원로가 있기에 오늘의 후진들이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들과 후배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질 때만이 올바른 역사가 정립될 수 있다고 믿는다. 변혁의 역사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을 아끼고, 후배들이 선배들을 존경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성공한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 되고 있다.

그리고 투쟁없이는 개선 없고, 운동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말도 우리 시대에 귀담아 들을 귀중한 교훈이다. 이 말은 독일동포 역사에서 차지하는 《재독한인광부인권협회》의 투쟁을 두고도 말할 수 있다.

한국정부, 즉 박정희 군사정권은 파독광부들과 파독간호원들을 인질로 차관을 얻어내려는 공작에 몰두하기도 했다. 말로는 인력수출이라고 해 놓고 한국정부가 파독광부들이나 파독간호원들을 지원한 근거들은 없다. 한국정부 당국은 오히려 파독동포근로자들을 돕기 보다는 광산경영주들이나 병원경영주들의 편에 선 입장이었다고 돌이켜 볼 수 있다.

3년계약직이 끝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했던 것이 파독광부들과 파독간호원들의 처지였다. 바로 그런 절박한 시기에 태동되어 활동했던 한인광부들의 지원조직이 《재독한인광부 인권협회》이다. 이 조직은 1979년 11월17일 발족하여 1981년 2월5일께 해산공고를 알린 비정치적 인권쟁취 운동조직으로 투쟁의 승리를 아로 새기고 사라진 단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조직이 투쟁의 수단으로 그리고 소식지로 제작된 것이 《새 활 동》이라는 제목의 기관지이다. 1979년 12월15일 1호가 발행되었고, 그 직후부터 보쿰대학에서 인권협회 회원들이 한인대학생들과 함께 파독광부들의 노동조건 개선과 함께 계약직 파기후에도 직업을 알선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같은 운동은 독일 신문 디-노이에(Die Neue)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이 신문은 “한인광부의 현실과 한독협약 및 노동계약의 부당성, 비인간성을 통열히 비난, 심지어 현대판 노예무역이라고 공격”(새생활 총정리호 192쪽) 하는 내용을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루르지역 한인기독교 망년회 참석자들의 서명운동을 위시하여 여기 저기서 서명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의 카토릭노동청년회(가토청) 기관지(Aktion)에 크게 게재되기도 했다.

1980년 1월들어 알바이터 프레쎄 지에도 한인광부들을 위한 서명운동이 보도되었고, 그 이후 독일신문들과 방송 및 테레비죤 방송들이 너도 나도 앞다투어 경쟁보도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2월1일에는 파독광부들과 파독간호원들이 최초로 공동 가두서명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만들어 졌다. 이들은 가두에서 첫날 3백여명으로부터 서명을 받는 업적을 기록했다.

인권협회는 동포광부들과 간호원들의 협조를 얻어 1천여부의 서명운동 협조의뢰서신과 함께 독일말 도큐멘타를 독일의 각 언론기관 및 사회단체들에게 발송하였고, 그 결과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권협회 회원들은 연거퍼 3일째 본의 보틀러 광장에서 가두서명운동을 벌인 결과 추가로 7백여명의 서명을 받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독일 신문과 방송들이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보도로 일관해 주었다.

인권협회는 3월1일과 2일 계속하여 뒤스불크 함본에서 개최한 독일카톨릭청년회 주최 제3세계 행사장에서 무려 1,03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광산이 있는 곳에서 동포광부들이 일하는 곳이면 그 지역신문들이 크게 보도해 주었다.

인권협회는 4월5일과 6일 에센 가토청본부 회의실에서 그동안의 활동들을 총평가하고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는 연구회 개최, 인권활동이 무르익어 감에 이것을 마무리 짓는 준비로서 《새 활 동》2호를 발행하기도 하고 향후 활동을 독일 각 사회단체들과 종교단체들에게 과녁을 맞춰 실행하기로 의견들을 모았다.

이러한 새방향으로 실천해 나가는 동력으로서는 ‘독일가노청’이 큰 몫을 했다. 당시 루르광산주측이나 독일광부노조측은 아주 비협조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이 터졌다. 독일언론들은 너나 할 것없이 광주대학살의 현장을 반영하면서 전두환일당과 학살에 참여한 한국군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파독광부들과 파독간호원들 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1980년 8월5일 《새 활 동》2호가 발행되었다. 8월14일 독일연방내무성과 연방사회성의 합의로 동포광부의 3년이상 장기노동 및 체류, 그리고 광산 이외의 다른 직장에서 취업이 허락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18년간의 동포광부들의 소망이 이뤄지고 인권활동의 목표도 달성되는 시대로 전환된다.

그 결과 1981년 1월3일 《재독한인광부인권협회》 박세환 회장이 자기 임무를 모두 수행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사퇴했고, 정식수리되었다. 1월17일 총회를 개최하여 임원제를 없애고 인권협회 해산시기까지 집단운영제를 채택하여 총정리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마지막 기관지 《새 활 동》총정리호가 우리말과 독일말 2중언어로 발행되었다. 이 시대에도 언론은 큰 몫을 차지했다.


<##IMAGE##> ■윤영탁선생(71): 1941년 11월7일 경기도 용인태생으로 한국에서는 철광회사 노동자로 5년동안 일하다가 1977년 9월 독일광부로 이주했다. 한국서 올 때 한 비행기에 탄 광부들이 같은 광산에서 일한 사람들이 38명이 된다고 돌이켜 본다.

한국의 서독 광부이주는 1961년부터 시작되어 1977년 12월에 마지막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윤영탁선생은 1977년 9월에 와서 광산에서 일하다가 그 이듬해인 1978년 6월에 광산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한 사람은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한다.

윤영탁선생도 그 사고당시 척추(흉추) 12번이 타격을 받아 그 통증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아 왔다고 말한다.

그는 광부로 오기전 5년 전 서울태생인 부인 김명희여사와 결혼하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3년계약으로 서독광부로 이곳에 이주했으나 한해 정도 광부로 일하고 사고 후유증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어서 간호직으로 신분을 바꾸어 이 분야에서 30여년 일해 왔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해 왔다.

그는 자녀교육에 철저했다. 교육지침은 (1)절대 골내지 말라, (2)기죽지 말라, (3)울지말라는 3대구호였다. 자녀들은 커서 큰 아들은 신경과 의사, 작은 아들은 신장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IMAGE##> ■김진향선생: 경북 칠곡 출생이다. 양목초등학교, 왜관중학교, 김천간호고등학교 나와 영주초등학교 양호교사를 하다가 대구 한독병원 육아실저 근무했고, 영남대학(구 청구대학) 재학중 중퇴하고 1966년 파독간호원으로 갔다. 10월5일 베를린 도착하여 시립병원서 근무하다고 1971년 신문사에서 일하던 독일사람과 결혼해 2남을 낳았다. 장남은 변호사이고, 차남은 공학박사이다.

1985년부터 1년동안 재독한국여성모임 총부, 1987년 녹색당 당원, 1988~89년 한독문화협회 부의장,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재무담당, 1989~1991년 독일 진보적인 재정후원단체 함께하는 세계를 위한 재분배재단에서 활동, 1990~1991년 해외 범민련 국제연대 담당, 1991~1992년 범민련 유럽본부 사무국장, 1992~93년 범민련유럽본부 부의장, 1994년 재독한국여성모임 국제연대담당 및 세계한민족네트워크, 6.15유럽지역위원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다음에 계속...)


*동영상 보기- 파독광부 이야기(4분)






*독일서 고행했던 동포광부들과 동포간호원들---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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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자료 보기



한국 정부가 자칭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전하면서도 알권리를 차단해 왔습니다. 남측 당국은 한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이 이 보도 자료들을 볼수 없도록 인터네트 열람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한국 독자들이 twitter 와 facebook을 통하여 이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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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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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보도자료(아래 짤각해 들어가 열람하세요!


동백림 사건의 진상을 설명한 관련보도자료---여기를 짤각해 열람하세요!

지난 보도자료(아래 짤각해 들어가 열람하세요!


[기획]초기생활 험난 했던 독일동포들(2)
"오월민중제는 유럽동포애국운동 발자취"



[기획]초기생활 험난 했던 독일동포들(1)
"애국열은 그 어느 해외동포에 못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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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보도-[기획-14]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독일 김대천선생 뇌수술후 회복중


*관련보도-[유럽]독일 보흠서 6.15선언 12주년 기념행사

*관련보도-러시아동포들 특별대담

*관련보도-독일의 리준식 민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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