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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칼럼] 진화하는 노예근성 투표로 저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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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4-03-12 21:13 조회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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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노예근성 투표로 저지해야!

김상일


한국에서 인구 감소의 원인과 이유가 부모들의 생활고 그리고 자녀들의 미래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흑인들의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를 좀 이해하기 힘들다. 노예해방이 있기 전 1860년까지 향후 10년간 백인의 증가율이 12.33%지만, 흑인은 무려 그 배에 가까운 23.39%였다. 이 조사 결과는 1863년 버지니아 리치몬드 지역 개신교 목사 95명이 서명한 탄원서에 따른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손과 발 그리고 목에 쇠고랑을 차고 배 막창에서 짐짝같이 실려와서는 노예상들의 손에 팔려 갈 때는 강제로 가족들이 헤어지기도 한다. 하루 종일 백인 노예주들의 채찍을 맞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노역하는 와중에도 흑인 인구 증가율은 백인의 배가 되었다니 이해하기 힘들다. 생활고와 인구감소의 인관관계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흑인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에는 역설적으로 흑인들의 미국 생활이 아프리카 때보다 행복했다는 데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흑인들이 미국의 노예 생활를 즐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 사실을 발견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 안의 적’ 즉, 노예근성이라고 했다.

흑인들은 비록 열악한 노예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며 살던 때보다는 미국 생활이 더 풍유롭고 좋았다 하는 흑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흑인 여자들이 출산하면 거의 백인 여자들이 받는 대우와 동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흑인 인구 증가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임신한 흑인 여성을 백인 같이 대우해 준 이유는 그 아이를 노예로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백인들의 음모에 속는 줄도 몰랐다. 킹목사는 이를 두고 ‘내면의 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흑인들의 노예근성이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금 한국 사람들 가운데는 “일정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하는 인구가 여론 조사에서 30% 이상 나온다고 한다. 노예라도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도 이런 인간들이 다수였다고 한다.

인간들은 이런 근성을 이용해 야생동물들을 길들여 가축화한다. 주인이 주는 사료를 받아먹고 야성을 잃어버리고 가축화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늑대가 야성을 잃고 가축화된 것이 개다. 지금 고양이는 가축이 되기 위해 문턱을 넘고 있다고 한다.

흑인들이 링컨에 의해 해방은 되었지만 노예근성 자체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1945년 해방을 되었지만 노예근성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1865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시켰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노예근성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그래서 1960년대 마틴 루터킹 목사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백인이 아니고 흑인들 안에 있는 내면의 적, 즉 ‘노예근성’이라고 한 것이다. 백인들이 주는 사료 받아먹고 거기에 안주해 버리려는 근성 말이다. 지금 흑인들과 원주민들은 미국정부가 주는 연금 혜택과 복지 혜택을 누리면서 그래도 아프리카에 사는 것보다 좋다고 한다.

모세가 400여 년간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동족을 해방시켜 출애급Exodus 할 때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의 폭정 아래 노예 생활에 익숙해진 노예근성이었다.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바로의 후계자 훈련을 받고 자랐지만 자기가 노예의 자손인 것을 자각한다. 거리에서 자기 동족 한 명이 이집트인과 싸우는 것을 목격, 그 이집트인을 돌로 쳐 죽인 다음 도망을 쳐 나오면서 “바로 왕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동족과 함께 고난받겠다”(‘출애굽기’ 중에서)고 말한다. 그러나 탈출하기는 했지만 무리들 가운데서는 여전히 우리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집트에서 물고기 생선과 빵을 배불리 먹고 자식들 기르며 잘 살았을 터인데 왜 이 고생시키느냐는 불평불만의 목소리는 모세를 가장 당혹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우리 안에 “일정시대가 좋았다”고 하는 인구가 우리 안에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학계에서 ‘식민지 근대화’라는 사관으로 버젓이 주류 사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입증이 된다. 식민지 근대화 사관을 지지하는 소위 뉴라이트 사관은 노예근성이 정론이 되고 있다. 친일파를 등용한 이승만과 일본 장교 출신 박정희가 가장 추앙받는 대통령이 되는 것 하나로 미국 흑인의 사례가 남의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인구가 5% 정도는 당연히 있기 마련이고, 이 정도는 국가 민족 존폐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에 20%가 넘으면 그 공동체는 심각한 존망의 위기에 처할 수 있고 결국 그런 무리의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고 한다. 아니면 가축화가 되든지.

그러면 우리(남한) 안에 이런 인구의 비율은 과연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그 콩크리트층 인구가 33% 이상을 상회하고 이에 동조하는 인구는 인구 과반에 접근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지방 자치단체장들을 선출할 정도이다. 지구상 유례없을 정도로 식민지배 국가를 찬양하며 “일정 때가 더 좋았다”고 하는 인구가 과반에 접근하는 곳은 없다.

진정한 국가 민족의 지도자는 구성원들의 노예근성, 즉 내면의 적과 싸우는 데 앞장서야 한다. 루터 킹 목사와 말콤X 그리고 잭슨 같은 인물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바마가 나오고 상하원 의원과 심지어는 대법관까지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같이 일정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하는 흑인 인구가 20%를 넘었더라면 오늘날 흑인들의 지위가 이만큼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해지는 것은 우리 안의 노예근성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돼 이명박과 박근혜를 거쳐 지금 윤석열에게 와 그 정점을 찍고 있다. 그 진화의 속도는 가속도가 붙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주류 언론이 지금같이 심하게 노예근성을 부채질 한 적은 없다. 재벌이 잡고있는 조중동을 비롯한 주류 언론이 먹고 사는 비결은 우리 안의 노예근성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 그 유례가 없는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언론의 저 대담한 보도 태도를 보라. 과거 어느 정권 때도 이 정도로 과감하지는 않았다. 이는 진화하는 노예근성을 잠재울 기제 장치가 하나도 없이 다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 오늘도 성조기와 일장기를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여 힘을 과시할 정도로 우리 안의 적들은 진화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대담해졌는지 보자.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일본을 지지하는 것, 일본 해산물 수입을 용인하자는 것, 지도에서 독도를 제거해 버리자는 것, 일본 천황 생일 축하 행사에 일장기를 공공연히 걸어 놓고 서울 한 복판에서 행사하자는 것, 우리 해군들이 일장기에 거수 경례 하자는 것, 일본 자유대의 국내 진출을 허용하고 한미일 군사 동맹을 강화하자는 것, 일본 군함이 독도 근해 해상 훈련을 허용하자는 것, 홍범도 장군 동상을 육사에서 이전해야 한다는 것.

어느 하나 숨 막힐 지경 아닌 것이 없다. 이런 것들을 모두 용납하고 허용하자는 우리 안의 적들이 단순히 심리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현상이 돼 대통령도 만들고 국회의원도 만든다고 할 때 밤에 잘 수 있겠는가?

모세와 킹 목사는 이런 노예근성이 20% 이상 넘지 못하게 차단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안에도 이런 지도자가 있는가? 지도자가 있어도 따라가는 인구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

2024년 4월 10일,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군사보호구역 해제등 민생현안에 대한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지금 대선 때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지금 야당 지도자가 당선되면 알량한 자기 아파트값 떨어진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이런 인구가 과반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오늘의 흑인이 이 정도 지위에까지 오는 데는 그들의 지도자들이 몸을 던져 이 내면의 적들이 20% 이상이 넘지 못하도록 차단했기 때문이다.

2024년 4월 10일. 어쩌면 이날이 1919년 3월 1일, 1960년 4월 19일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보다 더 중요한 날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노예근성이 지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300여석 가운데 20%는 60석이다. 유구한 우리 역사와 국가민족의 영구적인 행운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선을 넘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안의 노예근성이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할 것이다.

전 한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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