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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주의 생활에세이] 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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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10-24 15:25 조회9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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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주의 생활에세이] 외가

반상구별은 완전히 사라졌다. 반상구별이 사라지고 이젠 전적으로 돈이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전쟁 이후 이 남쪽 땅에서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화가 생겼다. 고도성장의 파고를 맞으며 수천 년 동안 의구했던 산천은 이제 옛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산천조차 의구하지 못한데 인걸은 의구할까....농촌 공동체로 묶여 그런대로 서로 정을 주고받던 뜨뜻한 공동체 문화는 의구한가....사람들의 마음을 갈갈이 찢었던, 그러나 지금은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에서 다 잦아든 것으로 보이는 그 상호 간의 처절한 증오와 갈등은 다 해결되었는가...산천은 다만 침묵할 뿐이지만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실은....세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 이범주.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출처: 게티이미지]

내 외가는 충북 중원 소태면의 오량골이라는 궁벽진 시골동네다. 엄정 논강리 갈매기 강현마을 내 고향집에서 자재기 고개를 넘고 우측으로 개천 따라 죽 올라가면 도착하는 곳. 나는 자주 가지 못했다. 내 기억에 대여섯 살 무렵 아직 20대를 넘지 않은 젊은 어머니 따라 걸어갔던 적이 한 번 있고 그 이후에는 초등학교 때 두 번, 중 3 때 한번 가 보았다.

자주 가 보지는 못 했지만 외가집에 대한 기억은 강렬하다. 동네의 가옥 배치, 개천, 뒷산 쪽의 정경 등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기억된다. 바로 옆집 도령이 형, 내 친구 도성이는 지금도 잘 있을까. 도령이 형은 60 중반은 되었을 거고 도성이는 60이겠지. 서울에서 내려와 어리버리하던 나하고 잘 놀아줬던 착한 외가 동네 친구들이었다.


[사진출처: 게티이미지][사진출처: 게티이미지]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외가가 내 마음의 고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어머니가 늘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과 당신의 부모님(내게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그리고 당신의 외가에 대한 이야기를 늘 하시기 때문이다.

얼마 전 외삼촌을 만나 다시 확인한 사실로서 어머니, 이모들 혼인할 당시만 해도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다고 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한 준수한 청년이 큰 이모를 그리 짝사랑했는데도 그 사람이 양반이 아니라서 애초부터 ‘맺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되어 애를 그리 태우다 결국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모부 만나 늘 행복한 삶을 살아오신 이모님께서도 그 사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하셨으니 당시로서는 청춘 남녀였을 그 분과 이모의 마음 사이에 적잖은 사연이 오고 갔을 것임에 틀림없을 터.

양천 허씨...그 유서깊은 양반댁 규수인 젊고 아름다웠던 어머니를 무일푼 극빈 가정의 아버지는 오로지 전주 이씨 양반의 후예라는 것과 특유의 무모한 유들유들한 기세로 가약을 맺으시고는....평생 고생을 시켜 오셨다.

외삼촌 말씀에 의하면 안 오량골과 바깥 오량골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로 안 오량골 사람들에는 거의 모조리 과부들만 있었다고 했다. 안 동네에는 상놈들이 살았고 바깥 동네에는 양반들이 살았는데 인민군이 밀고 내려 왔을 때 아래 오량골의 청년들이 세상 바뀐 줄 알고 설치다가 인민군이 다시 쫓겨 올라가면서 모조리 월북하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삼촌, 죽은 사람은 없었어요?”
“다행히도 죽지는 않았다. 다 도망가 버렸거든”

영진 아재 아버지는 월북하지 않고도 살아 남았는데 그분이 완장찼을 때 죽을 운명의 아래 오량골 양천 허씨 사람들을 놔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학’ 딱 그 내용이다. 그때 어머니의 막내 외삼촌도 그 사람들 따라 월북하고는 다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월북하신 그 외삼촌이 공부도 제일로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아 똑똑하고 인물도 젤로 잘 났다고 했다. 그 분이 아마도 당시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하셨을 거라고 난 짐작한다.

어느 인류학자가 쓴 책 중에 (내 기억으로는) ‘마을로 내려온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전쟁 전만 해도 조석(朝夕)으로 안부인사 나누고 술과 음식도 같이 먹던 정다운 마을 사람들이, 한국전쟁 과정에서 전선(戰線)이 위아래로 이 땅을 톱니 썰 듯 이동하면서, 서로 죽고 죽이며 철천지 원수가 되었는데...지금도 자기 부모, 조부모를 살해한 원수들과 한 마을에서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런 처참한 사연이 이 나라 평온해 보이는 방방곡곡, 구석구석마다 지천으로 널려 있더라는 거다.

그런 사연이 내 고향 갈매기 강현마을에서도 없지 않았던 걸로 나는 안다. 아버지 말로는 피난갔다 와서 제 전답 분여(分與)받아 부쳤다는 이유로 제 누나, 매형, 조카까지 쏴 죽였다는 일가 미친 놈이 있었다고 했고, 평생 머슴일과 고된 소작 노동으로 일관하셨던 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사유로 모진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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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구별은 완전히 사라졌다. 반상구별이 사라지고 이젠 전적으로 돈이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전쟁 이후 이 남쪽 땅에서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화가 생겼다. 고도성장의 파고를 맞으며 수천 년 동안 의구했던 산천은 이제 옛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산천조차 의구하지 못한데 인걸은 의구할까....농촌 공동체로 묶여 그런대로 서로 정을 주고받던 뜨뜻한 공동체 문화는 의구한가....사람들의 마음을 갈갈이 찢었던, 그러나 지금은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에서 다 잦아든 것으로 보이는 그 상호 간의 처절한 증오와 갈등은 다 해결되었는가...산천은 다만 침묵할 뿐이지만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실은....세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처: 통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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