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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그 비석에 새겨라, 반미혁명전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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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4-06 21:07 조회1,3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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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44화

그 비석에 새겨라, 반미혁명전쟁이라고

2023년 4월 4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제주시 4.3평화공원에 4.3기념관이 있다. 아무런 글씨도 새겨지지 않은 흰 비석이 기념관 바닥에 놓였는데, 비석 옆에 서 있는 표지판에 쓰인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온 제주 4.3은 올바른 력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장장 6년 동안 지속된 제주도 전쟁은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75주년을 맞았다. 제주도 전쟁은 누가, 무엇을 위해 싸운 전쟁이었던가? 이 물음에 진실하고 분명하게 답변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1) 제주도에서 현지취재를 벌인 조선일보 기자는 1948년 6월 4일 기사에 "구름 속 높이 솟아있는 한라산 속 무수한 동굴에는 당지에서 인민해방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조직부대가 출몰하고 산간부락에는 끊임없이 총성이 은은하다"고 썼다. 이 보도기사는 제주도 전쟁의 주체가 인민해방군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명백하게도, 제주도 전쟁의 주체는 인민해방군이었다. 1948년 5월 15일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제주도 인민해방군은 "인원수 2,000여 명이 조직적, 계획적 무장봉기를 하여 실전경험이 많은 지도자가 지휘하고 있다. 무기는 죽창, 일본도, 기관총, 장총, 소총, 지뢰, 수류탄 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인민해방군에는 "지식층, 청소년이 많다"고 하였으며, "봉화를 신호로 매일 3~4개소를 습격하고 있는데, 5.1 메데(5월 1일 세계로동절)에는 성대한 기념식을 하였다"고 하였다.

2) 제주도 인민해방군이 6년 동안 맞서 싸운 주적은 미제국주의 점령군이며, 따라서 그 전쟁은 반미혁명전쟁이었다. 인민해방군의 부적은 리승만 종미우익정권이었다.

2-1) 제주도 인민해방군을 진압하고,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살인마 전범은 당시 미군정 군정장관 윌리엄 딘(William F. Dean, 1899~1981)이었다. 당시 미국 육군 현역 소장이었던 그는 '토벌군'을 동원하여 인민해방군을 진압했고, '토벌군'의 량민학살을 지휘했다. 1948년 6월 8일 대한일보 보도기사에 의하면, "국방경비대 제9련대장은 선무공작으로 화평진압책을 주장하였으나, 딘 장관의 명령으로 (1948년) 5월 8일 제9련대장 경질과 동시에 무력행동을 개시하였다"고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일보 보도기사에 의하면, 윌리엄 딘은 "단시일 내에 사건수습을 하라고 지시하고, 불응자를 무차별 사살하라고 (국방경비대 제11련대에) 명하였다"고 한다.

2-2) 1948년 12월 8일 당시 국무총리 리범석은 국회 본 회의에서 1948년 4월 14일부터 12월 7일까지 제주도 반미혁명전쟁을 진압한 '토벌군'의 전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 장교 116명과 사병 2,968명으로 편제된 륙군 제9련대가 19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 해군 전투함선 7척이 제주도 해상을 봉쇄하였다.

국무총리 리범석은 제주도민 다수가 인민해방군을 지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유감"이라고 하면서, 인민해방군에 협력하는 자는 철저히 처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가 말한 '철저한 처단'은 제주도민을 잔혹하게 살륙한다는 뜻이다. 윌리엄 딘의 명령을 받은 '토벌군'은 1948년 10월부터 제주도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내륙에서 통행하는 사람은 무조건 폭도로 간주해 사살했다. 윌리엄 딘은 1948년 11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량민학살범위를 제주도 전역으로 확대했다.

윌리엄 딘은 '토벌군'에 명령을 내려 한라산 산간마을주민을 해안지대로 강제이주시켰고, 이주명령을 따르지 않고 마을에 남은 주민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사살하는 귀축 같은 살인만행을 저질렀다. '토벌군'의 이주명령을 따라 해안지대로 이주했더라도 가족 중에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행처가 밝혀지지 않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목을 걸어 사살했다. 1949년 3월 4일 연합신문 보도를 보면, '토벌군'이 1949년 2월 말까지 학살한 제주도민은 약 20,060명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윌리엄 딘의 명령을 받은 '토벌군'은 마을을 불태웠다. 1949년 3월 4일 연합신문 보도에 의하면, '토벌군'은 제주도 96개 리에서 농촌가옥 20,280채를 불태웠고, 73개 리는 마을 전체를 완전히 불태웠다고 한다.

2-3) 윌리엄 딘은 제주도 반미해방전쟁 진압상황을 수시로 일본 도꾜의 원동군사령부와 워싱턴의 륙군성에 보고했다. 그는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작전지시를 받았다. 윌리엄 딘은 1950년 7월 14일부터 21일까지 벌어진 대전전투에서 자기가 지휘하던 미륙군 제24사단이 조선인민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궤멸되자 혼자 도주했다가 조선인민군 병사에게 생포되어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1953년 10월 4일 판문점에서 포로교환으로 풀려났다.

2-4) 제주도 반미혁명전쟁 기간 중 남조선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관 관리들과 미국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제주도에 가서 토벌작전현장과 학살현장을 시찰하고 각자 자기 상부에 보고하였는데, 보고서에는 현장을 촬영한 사진들이 첨부되었다.

제주도 인민해방군은 사랑하는 조국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그 남부 지역을 총칼로 강점하고, 신식민주의 폭압통치를 자행하는 제국주의 점령군을 반대하여 싸웠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재분할하기 위해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충돌했던 제국주의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제국(American Empire)이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광분하던 시기에, 누구도 제국주의 점령군과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었을 때, 제주도 인민해방군은 용감히 싸웠다. 1948년의 제주도는 제국주의 세계대전 이후 미제국의 폭압을 뚫고 반미혁명전쟁의 봉화를 가장 먼저 추켜든 혁명의 섬이었다.

미제국의 신식민주의 통치가 종식되지 않고, 종미우익정권이 사라지지 않는 한, 4.3기념관 바닥에 놓여있는 비석에는 글씨가 새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해야 한다. 그 비석에 '제주도 반미혁명전쟁 1948~1954'라고 새겨넣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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