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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아인슈타인을 놀라게 한 고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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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4-02 14:50 조회1,4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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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43화

아인슈타인을 놀라게 한 고등학생

2023년 3월 29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22년 11월 17일 앨벗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과 부인 엘사(Elsa)가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인들은 천재적인 리론물리학자와 부인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려행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나는 10,000번째 기념사진을 찍었다. 환영만찬은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머문 호텔의 녀성 종업원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거의 100여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절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본의 여러 대학을 순회하면서 상대성 리론에 관해 강의했다. 도꾜제국대학 강당에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일본 학계 인사들과 각계각층 청중들 1,000여 명이 몰려들어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열띤 강의는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순서가 되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 중에서 이 천재적인 리론물리학자의 복잡하고 어려운 강의를 제대로 리해한 사람이 있었을까? 질문이 나올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중석에서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인슈타인에게 질문을 했다. 그의 당당한 태도도 놀라왔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아인슈타인도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을 제기한 사람이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나이 어린 고등학생으로부터 받은 강한 인상을 려행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내 강의를 누구도 리해하지 못했지만, 어느 영특하게 생긴 청년만이 내 강의를 리해하고 내게 어려운 질문을 했다. 너무도 관심이 가길래 그가 누군가 알아봤더니 그는 조선사람이었다."

아인슈타인을 놀라게 한 조선사람은 19살 고등학생 도상록(1903~1990)이었다. 도상록은 오까야마시에 있는 제6구제고등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당시 일본 관립 고등학교는 7년제였다. 아인슈타인과 도상록의 짧은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도상록은 리론물리학 공부를 계속하여 1930년 도꾜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 조선인들이 차별과 천대를 받던 일본에서 그를 받아줄 연구기관은 없었다.

도상록은 조국으로 돌아와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교원생활을 하면서 량자력학(quantum physics)을 깊이 연구한 그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영문 학술지 '일본수학물리학회지'에 량자력학 관련 영어론문 3편을 발표했다. 도상록이 세계 물리학계에 명성을 떨친 결정적인 론문은 1940년에 집필한 '수소가스의 량자력학적 리론'이라는 제목의 론문이다. 그 론문에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다가 너무 어려워 포기했던 난제를 해명했다. 당시 그의 연구경험은 회고록에 이렇게 남아있다.

"나는 조선사람의 지혜와 슬기를 연구성과를 통해 보여주려고 굳은 맹세를 다지였다. (중략) 리론적 추상으로 원리를 세우고 수치계산을 하는 과정에 나는 수십번 단념하고 돌아앉았었다. 그때마다 나는 유구한 문화전통을 가진 우리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였다. 민족적 자부심, 이는 나의 가장 믿음직한 벗이였다. 이 벗과 더불어 나는 연구사업이 아니라 하나의 전투를 진행하였다. 드디여 론문은 완성되였다. 나의 젋은 시절의 정열의 소산이었다. Beach, Coulson, Duncanson과 같은 과학의 거장들이 달라붙었다가 손을 떼고 나앉은 테마였는데, 결국 조선사람이 이를 해명하였다고 모두 칭찬해주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기뻤다."

도상록은 8.15 해방 직후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경성대학(서울대학교 전신) 물리학부 교수로 취임하였으나 제자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야만적인 미점령군이 경성대학 도서관을 저들의 사령부로 강점했고, 대학 교사를 저들의 숙소와 야전병원으로 강점했기 때문이다. 미점령군이 경성대학을 강점하는 란동을 부리는 바람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소중한 장서들이 류실되었고, 수많은 과학실험설비들이 파손되었다. 경성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쫒겨났다. 미점령군의 만행에 분노한 도상록은 미군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가 대학 교수직에서 해임당했다.

미점령군의 폭압과 만행은 경성대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38도선 이남 전역이 미점령군의 군화발 아래 짓밟혀 피눈물을 흘렸다. 미점령군에 빌붙은 종미우익세력과 미점령군의 비호 속에 재기한 부일민족반역세력은 미쳐날뛰었다.

그런 참상을 목격한 도상록의 가슴에서 분노의 피가 끓었다. 그의 선택은 북으로 가는 것밖에 없었다. 도상록은 전평수, 손원록, 정근, 리용태, 리흥국을 비롯한 쟁쟁한 물리학자들과 함께 1946년 6월 어느 날 38도선을 넘었다. 물리학자들만 38도선을 넘은 것이 아니었다. 각계각층 인사들이 미점령군의 폭압과 만행을 피해 38도선을 넘었다. 그로부터 77년이 지난 오늘도 미점령군은 이 땅에서 북침전쟁연습을 감행하는 란동을 부리고 있다.

평양에서 새 삶을 시작한 도상록은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초대 학부장에 취임하여 핵물리학 연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3년 전쟁의 불길도 도상록의 연구사업을 멈춰세우지 못했다. 그의 핵물리학 연구는 피란지의 토굴 속에서 계속되었다. 그런 피타는 노력에 의하여 1959년 조선에서 연구용 원자로가 건설되었고, 립자가속기 베타트론(betatron)이 제작되었다. 세계 력사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베타트론을 제작한 때는 1940년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19년이 지난 시점에, 그것도 미국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화된 조선에서 도상록이 이끄는 핵물리학 연구진이 베타트론을 만들어냈으니, 어찌 세계 과학사의 '기적'이 아닐 수 있을까!

도상록은 핵물리학 연구사업과 교육사업에 한 생을 바쳐 조선의 핵물리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조선에서는 국가핵개발사업에서 그가 세운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김일성훈장 수훈자, 인민과학자, 원사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1990년 2월 13일 도상록은 두 눈을 감았으나, 그의 제자들과 후학들이 뒤를 이었다. 도상록의 제자들과 후학들이 국가핵개발사업을 계승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조선은 미국의 집요한 방해와 협박을 물리치고 마침내 핵강국의 대렬에 올라섰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총비서가 2023년 3월 27일 핵무기연구소를 현지지도한 소식을 전하면서, 소형화, 경량화, 규격화된 '화산-31형' 전술핵탄두들이 줄지어 보관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김정은 총비서는 도상록의 제자들과 후학들이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만들어낸 '화산-31형' 전술핵탄두를 두 손으로 쓸어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간고하고도 머나먼 핵보유의 길을 굴함 없이 걸어왔다고 감회 깊이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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