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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진 칼럼]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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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6-19 07:16 조회1,510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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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권력투쟁"이지, 김일성장군을 령도자로 모신것은 실질적으로 100% 인민들의 선택이였다. 해방후 절대다수의 인민들은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쳤고, 자발적으로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아무도 박헌영의 노래라던가 김두봉의 노래, 려운형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않았다. 전설적명장, 항일의 절세애국자, 인민의 해방자, 농사지을 땅을 나눠주신 분, 녀성들을 해방시킨 분, 조국과 인민을 위해 불같이 헌신하는 분, 무상교육과 의료를 주신 분, 지략과 인덕을 갖추고 사리사욕없이 인민들을 돌보시는 분, 친근하고 인자한 인민의 일군... 흠이라곤 도무지 찾을데 없이 완전한, 우리 민족의 절세위인이자 영웅을 도대체 어떤 놈이 반대하고 적대하겠는가 말이다." 력사 외곡과 조선 악마화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진실과 유리되고 거짓으로 세뇌되었음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김웅진 박사의 글을 싣는다. [민족통신 강산 기자]


[김웅진 칼럼]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김웅진 박사 (통일운동가)


중세암흑기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수백년동안 "사탄"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백만이 처형되였고,

20세기 남녘에서는 반공반북의 무리들이 수십년간 수백만을 학살하였다.

(물론 대부분이 무차별학살, 묻지마학살, 정적학살, 재산을 탐한 살인이였지만 말이다.)


력사외곡과 조선악마화 77년.

남녘 사람들이 세뇌된 수준은 중세유럽인 광신들보다 더 심각하다.

그러다나니, 나름 력사적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소위 "객관적"인 자료에 접근하고 리해하려 힘쓰는 사람들조차 조선에서 일어난 력사적사건들을 보는 시각이 오염된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극악한 보안법의 해악과 남녘양아치들의 죄악은 영원히 단죄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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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게 소위 조선의 건국과 "권력투쟁"에 대한 편견이며, 그 중에서도 박헌영에 대한 자의적인 편견이 유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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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줄수 있는 조언:

자료부족으로건, 씻을수없는 편견으로 인해서건, 만일 조선의 진술과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면, 반드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였음을 자각해야 한다. 조선은 력사를 날조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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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흔히 소련군정 측의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식의 얘기가 많은데 엄밀히 말하면 공산당 내부에서의 심각한 토론 끝에 당 결정이 내려지고 이를 소련 당국이 추인했다고 볼 수 있다. (...) 2월 8일 임시위원회가 수립될 때에는 소련군 지도자들은 방청하기만 했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 북조선임시위원회의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한병옥이 각각 선출되었다."

1946.2.27 농민대회 소집

1946.3.5.토지개혁법령 공포

1946.3.23. 임시위원회 위원장(김일성) 저 유명한 20개조 정강 발표 (김장군께서 만주 시대 부터 준비해 온 것으로서 친필로 직접 작성. 소련 개입설은 허무맹랑한 낭설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2014)》 -- 박병엽 증언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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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권력투쟁"이지, 김일성장군을 령도자로 모신것은 실질적으로 100% 인민들의 선택이였다. 해방후 절대다수의 인민들은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쳤고, 자발적으로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아무도 박헌영의 노래라던가 김두봉의 노래, 려운형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않았다. 전설적명장, 항일의 절세애국자, 인민의 해방자, 농사지을 땅을 나눠주신 분, 녀성들을 해방시킨 분, 조국과 인민을 위해 불같이 헌신하는 분, 무상교육과 의료를 주신 분, 지략과 인덕을 갖추고 사리사욕없이 인민들을 돌보시는 분, 친근하고 인자한 인민의 일군... 흠이라곤 도무지 찾을데 없이 완전한, 우리 민족의 절세위인이자 영웅을 도대체 어떤 놈이 반대하고 적대하겠는가 말이다.

물론 해방후 몇년, 북조선도 반동들과 극우테로분자, 미제특무들로 들끓는 상황이였으니, 폭탄테로도 발생하고 내부 교란도 일어났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잘 아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수 있을것이다. 놈들의 북조선 교란과 테로공작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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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 1972 기간, 남녘은 북조선으로 7,726 명의 간첩을 북파했다고 2002년 남녘당국이 고백했다. 이는 날마다 한명 이상의 간첩을 북파한것에 해당된다.."

그 후 동아일보는, 40년기간동안 북파한 간첩수가 13,835 라고 발표했다.

남녘은 심지여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주석을 암살하려고 사형수 등 범죄자들로 구성된 209부대 2325그룹을 1968년 조직하였다.

1972, 1991, 2000 등 회담과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남괴는 1970년대와 1990년대에 테로와 내분을 목적으로 2천명이 넘는 간첩들을 북파했다. (동아 . com) "

p. 29

《The Great Conspiracy against People's Korea》 (Dermot H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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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쏘련파니 중국파니 하는 인물들이 핵심지도부 선택에서 제외된 과정은 100% 인민의 뜻이였고 100% 민주적이였다. 힘(권력)이란 인민들에게서 나오는것이니까.

박헌영이 미제첩자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지목한 측은 항미원조전쟁당시 중국지원군과 팽덕회사령이였다.

박헌영의 수하에는 물론 무전수도 있었고, 그가 가는곳 마다 미군의 공습이 발생했다.이로 인해 지원군은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 미제특무들의 암약에 대해서는 중국련속극 《三八线》에서 잘 소개됐다.

팽덕회사령이 인민군측에게 "박헌영을 조심하라. 미제특무가 분명하다"고 제보하자, 김일성수상께서는 오히려 박헌영을 옹호하시였다. "사람을 함부로 의심해서 쓰나.."

그러나 숨길수 없는 간첩행위는 결국 전쟁종료후 재판을 치르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오래 지속된 공판과 수만페지의 조서..

.

더 길게 쓰지 않겠다. 다시 강조한다. 자신의 생각이 조선의 공식립장과 다른점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이 잘못임을 즉각 깨달아야 한다. 이 법칙을 준수하면, 엄청난 시간랑비를 줄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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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abel1303님의 댓글

abel1303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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