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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8. 감옥내 비전향말살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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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5-18 11:33 조회8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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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8. 감옥내 비전향말살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이 글은 김영승 선생이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동안  비전향 말살을 위한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을 과거사위에 제기하여 결정 통고를 받고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 자료입니다. [민족통신 강산 기자]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불법적인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실태'

저는 중학교 재학 중 전쟁을 맞았고 9월 28일 인민군대의 후퇴함에 따라 산에 입산하여 빨찌산 활동하다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고 대구 김천 안동 대전 목포 대전 광주 형무소를 거쳐 청주 보안감호소에 사회안전법 폐지로 비전향 출옥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비전향말살책에 의하여 심지어 살인 폭력 깡패 재소자들까지 동원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고문구타 등의 갖가지 방법과 수단에 의한 인간이하의 열악한 환경과 처우 속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을 아래와 같이 게제합니다.

1957년 1월 27일 안동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무기수 대전 집결에 따라) 비전향수들의 사방인 제4사에 수감되었습니다.

대전에서만 인간 이하의 열악한 처우 속에 도합 16년을 살았습니다. 밥은 5등식인데 4등분하면 네 입에 다 먹는 적은 양의 밥덩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소 의무과장이었던 안상현은 이 5등식을 먹고 3년 살기 힘들 것이니 전향하지 않으면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한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적은 밥덩이에 반찬은 개가 보고 하품한다는 소금에 절인 싱대(대가리는 크고 살은 적은 물고기)를 밥찬으로 주는데 배가 고파 먹고 나면 목이 타 물을 달라고 하면 제때에 주지 않고, '전향하면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데 감방에 쪼그리고 앉아 귀찮게 하느냐'고 담당 교도관은 전향을 강요합니다.

목이 타 죽겠다고 고함을 지르면 관에 반항한다는 이유를 붙여 조사실로 끌어내 사방 간수부장을 위시하여 몇 명의 간수들이 달라 들어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묶어 몽둥이 타작을 당하고 하는 것은 일상사였습니다.

개중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전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한철을 빈대 때문에 밤을 설치기도 합니다. 교도소가 목조 건물이라 천정에서 빈대가 떨어지기도 하고 이불은 일제 때 마대 포대로 만든 것인데 솜은 수년을 덮었기 때문에 뭉치 솜으로 되어 있어 속에 빈대가 숨어 있다가 밤이면 기어 나와 살갗 피를 빨아먹는 바람에 가려워 빈대 잡느라고 잠을 설치게 됩니다.

아침이면 방벽에 빈대 죽인 피가 얼룩져 있기 때문에 사방 간수는 높은 사람 순시 때 걸리면 안 된다고 피 닦는 빼빠를 들어 보내 주면 그것으로 피 자국을 지우게 되는 것도 매 여름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방이 통풍이 되지 않아 더위에 시달려야 합니다. 목욕탕 물은 손을 넣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끓어 들고 나가는 데 10분이라 목욕탕에서 때를 벗길 수 없어 감방에 들어와 때를 벗기면 때 벗긴다고 불러내 때려 패고 목욕시간 적다고 하면 반항한다고 때려 패며 전향을 강요합니다.

겨울이면 칠푼 송판위에 가마니 한 장 깔아주어 그 위에 낡은 국방색 담요 한 장 깔고 일제 때 독거용 이불을 한 장 주면 그것으로는 도저히 겨울 추위를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걸레 하라고 들여 준 것을 찢어 끈을 만들어 이불 끄트머리와 가마니를 묶어 침낭 속에 들어가듯 몸을 집어넣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 야간 순시에 걸려 문을 따고 가위로 끈을 잘라버리면 이불이 들려 차가운 바람 때문에 밤잠을 잘 수 없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끌려나가서는 주는 대로 덮지 않고 변조한다고 두들겨 패면서 큰 이불을 덮고 편하게 살 수 있는 데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전향을 강요합니다.

가족 면회는 가족들이 전향을 권고하겠다고 하면 한번은 시켜주는 등 전향공작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아픈 환자에 대해서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외부 진찰이나 의무과에 입원시켜주고 가족을 동원시켜 전향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무과에서는 사회 참관이다 하여, 또는 반공목사나 신부 대학교수들을 동원하여 한 사람씩 불러내어 설득작업을 하거나 불의에 사회 참관을 시켜주고 감상문을 쓰라고 합니다. 쓴 감상문이 당국의 의도대로 쓰여 있지 않으면 이를 트집 잡아 때려 패며 전향강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밥에 모래가 많아 씹을 수 없는 상태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높은 사람 면담을 요청하면 문제를 해결 해주기는커녕 불러 내 선동하고 반항한다고 때려 패는 것은 거의 일상사가 되기도 합니다.

5.16 쿠데타 후 1961년 9월 여름 4사에 복역 중 매일 감방 내 변기통을 내는 데 (구형무소) 변기통에 성경책을 넣었다고 억지 트집을 잡아 사방 관구 부장을 비롯한 몇몇 간수들을 동원하여 일반 잡범 사방 공방에 집어넣고 뒤 대각수정을 채워 성경책을 넣었다는 것을 고백하라고 했다가 전향을 하고 나가면 이런저런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전향하라고 고문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빈 방에 들어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963년 3월 특별사 5사 3방에 전방 가 있을 때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하는 상황에서 형무소 수용중인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전향강요가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전향장기수들을 길들여 전향시킬 목적으로 감방에서 들고나가는데 10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강제로 소위 재건체조를 시켰습니다. 이에 노인들은 재건체조를 반대하고 자유시간을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관구부장 이응하는 관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고 선동한다고 계호과 조사실로 끌고 가 수정을 채우고 포승으로 묶어 시키는 대로 복종하지 않고 반항한다며 발로 차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면서 전향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반발하자 감옥 중의 감옥(먹방)인 징벌방에 처 넣고 전향을 강요하여 도저히 당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점심을 먹으라고 수정을 끌러 주는 틈을 이용하여 뒤 유리창을 부수어 유리칼로 손목과 배를 가르는 순간에 담당 간수에게 들켜 15일간 죽을 고통을 당하며 전향을 강요당했습니다.

대전형무소는 일제 때 감옥 그대로이고 규율도 거의 일제감옥 규율이었습니다. 심지어 간수들은 비전향자들에게는 인간 이하의 인격적 모독을 하는 것은 일반사이고 하나의 짐승으로 취급해 다루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에게 육두문자만 쓰는 못된 간수들도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삼대 후레자식이란 별명까지 받고 있었겠습니까?

1968년 4월 비전향수 분산 조치에 따라 대전에서 목포로 이감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모든 처우와 일상이 전향수단으로 행해지고 있어서 집단단식도 했습니다.

1969년 5월에 목포에서 대전으로 다시 이감되어 대전 특사 제5사 독거 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일상적인 전향강요를 당하는 과정에서 1973년 8월에 (중앙정보부, 법무부, 내무부 합동으로) 국가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비전향 말살책이 자행되었습니다. 당시 나의 전향 담당관은 신학운 교회사였습니다.

1973년 9월12일 경에 사방 조사실로 불러내 의자에 앉혀 놓고서 앞으로 전향을 하지 않는 한 물리적 방법이 동원될 것이라고 공갈 협박을 당한 지 2일 지나서 이경남씨란 비전향장기수가 끌려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사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젠 본격적인 고문구타에 의한 비전향말살책이 자행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경남씨는 전향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윽고 1973년 9월 15일 대전에서 광주형무소로 20명이 이감 갔습니다. 이후 특별사동인 광주 제2사에 수용되었는데 총 64명이 있었습니다.

광주형무소도 8월에 전향공작 전담반이 조직돼 교무과에 6-7명의 교회사들이 있었는데 악명 높은 강철영 교무과장 이하로 교회사는 문승호, 김무웅. 박종오, 이규연, 김영술. 정일봉 등이며 보안과에서 파견된 김홍렬과 박채옥 등의 간수들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11월 14일 오후에 관구부장(이름미상)은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각방은 들어라! 지금부터 전방 준비하라, 각자의 소지품은 싸서 그대로 놔두고 몸만 나온다."하고서 "오늘부터 운동, 목욕, 접견 서신 독서, 의무과 진찰치료 등을 중지한다"고 했습니다.

몇 분 후 간수들이 떼로 몰려와 각방 문을 따고 북쪽 편 0.75평 방에 12-13명씩을 집어넣었습니다.

서로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다리를 펼 수도 없이 앉혀 놓고 각자는 시찰구만 바라보고 앉아 있어야 하며 고개를 숙이거나 옆과 뒤를 돌아보지도 말며 옆 사람과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11/15일 오후 2시 민방위 훈련이 끝나자마자 살인 폭력 깡패 재소자들이 들어 닥쳤습니다.

알고 보니 폭력 깡패 재소자 정무종은 어깨에 떡봉이(떡을 찢는 방망이)란 마크를 달고 손에는 감방 열쇠를 쥐고 허리에는 수갑과 포승, 곤봉을 차고 심지어 담배까지 입에 물고 피우면서 악한 인상을 쓰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외 같은 부류인 원삼실, 노상기, 이준원 서원배 등의 깡패 재소자들이 설치기 시작합니다. 정무종은 군 특무대에서 근무 중 고문경험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각종 고문 구타를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각방을 돌아다니면서 감방문을 자그락 따고 왜 옆을 돌아보고 있으며, 왜 옆 사람과 말을 하며, 왜 서있으며 왜 뒤 창문을 바라보고 있느냐 탈옥하려고 궁상하느냐 하는 등의 각종 구실을 붙여 곤봉으로 때려 패고 끌어내 엎드려 받히게 해 놓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타작을 자행했습니다. 매일 반복적인 타작으로 전향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방담당은 정화선 간수였는데 이 자는 점호 때나 높은 사람 순시 때나 나타나고, 무법천지의 깡패 세상 속에 아이고 죽겠네 하는 고함소리와 매타작 소리만으로 사방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정무종과 원삼실은 본인을 불러내 0.75평 공방에 집어넣고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뒤수정을 채우고 여기에 포승으로 묶은 뒤 철창과 앞 시찰구 창살에 포승줄을 연결시켜 놓고 양쪽 발 뿌리만 감방 바닥에 닿을 둥 말 둥 해 놓고서 포승줄을 당겼다 늦추었다 하면 양 어깨가 빠질 듯 아파 죽는다고 고통을 호소하면 전향 할래 안 할래 교무과장 면회 할래 안 할래 하면서 곤봉으로 때려 패고 고함을 지른다고 재소자 옷을 찢어 입을 틀어막고 거의 2시간동안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자 지독한 놈이라 하면서 포승줄을 풀어주고 양어깨를 두 놈들이 주물러서 본 위치로 돌아오게 한 후 사방 지하실로 끌고 같습니다. 그때 감방 동요들은 주리를 트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지하실에서는 빨가벗겨 놓고 양 손목을 포승으로 묶어 천정에 매달아 놓고 곤봉으로 타작을 하고 심지어 포승줄을 또아리를 만들어 물에 적신 후 온몸을 치고 잡아당기면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대나무 고쟁이로 항문을 쑤시기도 합니다. 이로 인하여 치질이 발생해 현재에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깡패 놈들은 오늘은 내가 졌다 다음 또 보자며 감방에 들어 보냅니다.

몸에 피멍이 들고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동료 중 강원도 사는 정병기씨는 '나는 몸도 약한데 김영승이처럼 고문당하면 죽지 살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튿날 전향하고 동료들의 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깡패 정무종은 12월 중순쯤 다시 불러내 사방 지하실에 끌고 갔습니다.

목공장에서 맞춰 온 고문틀에 눕혀 놓고 맨 위족에 움푹 패인 곳에 목을 넣은 후 꼼짝달싹 할 수 없게 곤봉으로 가로질러 빗장 지르면 머리는 뒤로 젖혀치게 됩니다,

양손목은 널판자 뒤로 수정을 채우고 로프로 널판자와 몸을 감아버리면 전신을 요동할 수 없게 해놓고 한 놈이 배위에 올라타 물에 적신 타올 수건을 얼굴 전체를 덥고 10리터 주전자 물을 코 부위를 살살 붓습니다.

그러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몸부림치면 타올 수건을 살짝 들어 올려 한번 숨을 쉬게 한 후 덮고 물을 붓는 등 반복해서 10리터 주전자 물이 다 떨어질 때까지 물 고문을 자행하면서 전향을 강요합니다.

깡패 놈들은 오늘은 내가 졌다 하고 감방에 들여보내고 다른 동료들을 차례로 물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깡패들은 매 타작 고문은 상처가 나기 때문에 물고문만 해도 된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실제 물고문으로 많은 전향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1974년 1월 초순에는 또다시 공방에 집어넣고 양 앞뒤 창문을 열어놓고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2-3시간 동안 동태고문을 자행하며 전향을 강요했습니다.

1974년 4월 28일이 만기 날이었습니다. 8명의 만기자 중 제가 일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꺾으면 다른 동요들도 전향할 줄로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했습니다.

만기 1개월을 남겨놓고 갑자기 불러내 교도소 의무과 병실로 이동시켜 공방에 넣고 전향자 차양진(전향공작 자문위원)과 다른 전향자 한 명과 같이 기거하도록 해놓고서 매일 나의 동태보고를 했습니다.

그래도 전향을 거부하자 당시 살아 계셨던 큰형님과 큰누나를 종용해 전향공작을 감행했습니다. 그후 만기 일주를 남겨놓고 나를 고문 구타한 정무종과 원삼실 그리고 전향자 차양진을 동원시켜 반공법 위반 건을 조작해 냈습니다.

일인당 5건씩을 조작해 총 15건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전향하지 않으면 고발 조치해 출옥을 못하고 징역을 더 살아야 한다고 공갈 협박하면서까지 전향을 강요했습니다. 당시 사건 조작 담당은 정일봉 교회사었습니다.

만기 날 살아 있었던 가족 친지들이 교도소 정문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오후 해가 질 무렵에야 마중 나온 가족 친지들을 뒤로 한 채 중앙정보부 광주지구 지하실로 직행하여 전향을 강요당했습니다.

당시 조사관은 류시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출옥하지 못하고 반공법 위반을 들어 2년형을 더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전향하지 않으면 만기가 되어도 출옥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전향을 거부한 동료들에게 보여 주기위한 정권의 정책적 조치에 의한 것이었음을 세상이 다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2년형의 만기도 1976년 5월 6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기 전 5월 3일에 악법중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전향 거부한다는 이유로 보안감호 처분을 받았습니다.

2년형을 살 때 교회사는 신학운이었습니다.

이자는 2년 만기가 가까워오자 교무과 지하실로 끌고 가 전향 권고를 하고 이를 거부하자 미친 듯 날뛰며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뜨려 놓고 구두발로 사정없이 차고 목을 밟아 숨조차 못 쉬게 하며 우측갈비를 차서 달포동안 꼼짝 못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몇 번이나 자살까지도 하려고 했습니다.

출옥 후 신촌 병원에서 시티 촬영을 해본 결과 우측 갈비뼈 한 대가 부러졌다가 이은 자국이 있다는 소견을 받기도 했습니다.

1975년 11월 22일 같은 사동에 수용중인 신춘복씨가 고문 및 구타를 극복하지 못하고 철창에 목매 자살했습니다. 잘 아는 동료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에 담당 간수를 통해 입관할 때 저를 입회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를 묵살하는 것 외에 불려 나가 전향을 않고 선동한다는 구실을 붙여 고문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1975년 여름부터는 고문 구타에 동원되었던 깡패 재소자들을 교체했습니다.

이 때 들어온 다른 깡패 재소자인 전호찬과 이건종이고 담당 간수는 문홍술이었습니다.

옆방에 양희철씨가 있었는데 통방했다고 불려 나가 사방 관구실에서 가스파이프 대로 온몸을 관절만 찾아 두들겨 패면서 전향을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양희철씨도 고문구타를 당해 업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이상은 대전과 광주 형무소에서 전향강요 고문구타 당한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1974년 여름에 같은 동료였던 서준식씨가 일본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이은평 소장실에서 면회했는데 여기에 일본의 사회당 국회의원이 동석한 자리에서 광주교도소 비전향말살을 위한 고문구타 행위를 상세하게 말한 것이 일본 아사이 신문에 게재됨으로써 국제적으로 폭로된 사실로 인해 갖은 제제와 고통을 당하기도 한 사실을 당시 옆방에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고문구타 당시 서준식씨는 자살하려고 손목 동맥을 끊기도 했으나 제 때에 발견함으로써 생명을 구하기도 한 사실도 있었음을 단적인 증거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후 만기에 출옥 못하고 청주감호소로 직행했습니다.

이 글은 비전향 말살을 위한 인권침해 당한 사실을 과거사위에 제기하여 결정 통고를 받고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권은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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