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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4. 안동감옥에서의 생활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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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2-02 19:10 조회7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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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4.

안동 감옥에서 생활의 실태

[민족통신 편집실]


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



김천소년 감옥에서 대인이 되면 무조건 안동감옥으로 이감 간다.

전쟁 때 모든 감옥은 일재 때 지은 감옥이다.

지금은 일제 때 지은 감옥을 옮겨서 새로 지은 감옥들이다.

안동감옥은 지방에 있는 감옥이라 지방세가 농후하다. 김천에서 안동감옥으로 이감 온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은 한둘 뿐이다.

안동감옥에 살면서 공장에 출역한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소위 우리 죄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당시 안동감옥에 있는 재소자들 중 무기수는 우리 3사람이다.

하나는 담양이 고향인 고흥석 씨이고 순창이 고향인 이준원 씨이다. 이 두사람은 필자와 같이 무기수였다.

당시 안동감옥은 전향 비전향이란 말 없이 징역을 살았다. 이감 온 사람들은 며칠 있지 않아 공장에 출역한다. 그래서 이감온 사람들은 먼저 출역해 자리를 잡은 끝발 있는 사람들이 간수 소개를 통해 자기 맘에 맞는 사람들을 고르면 틀림없이 그 공장으로 출역한다. 그래서 나는 지물공장으로 출역했다.

나가보니 공장에서 제일 대접을 받고 사는 사람인 울산에 고향을 둔 박대수 동지를 만났다.

이 박대수 동지는 군당간부인 것 같았다. 가장 경우 바르고 매사에 침착한 목소리로 말도 잘 한다. 아는 것도 많아 선생으로 모시고 생활했다.

지물공장은 가구만드는 공장이다. 한 단위에 5명씩이다. 다이반장은 오래되고 기술 있는 사람이 하고 있었다.

내가 속한 지물반장은 경북 출신인데 일밖에 모르는 농촌 토백이었다. 차차 생활에서 낯익어가고 친해지니까 나에게 빨찌산 활동한 것을 물어서 내가 겪은 대로 들려주고 나중에는 학습도 했다. 학습 자료는 “위대한 조국해방전쟁”과 "8.15해방의 조선“이었다.

그리고 판플랫이나 기억나고 머리에 담겨진 짤막한 구호들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당시만 해도 내 인기가 제일 좋았다.

이렇게 생활하다가 1956년 말경에 전향 비전향 문제가 법무부에서 하달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교무과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찰라에 안동감옥은 무기수를 수용하지 않고 전부 대전감옥으로 이감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 당시 무기수는 3명뿐이었다.

그리하여 1956년 11월 28일에 고홍석씨와 이준원씨 필자 3명이 무기수 였기 때문에 대전감옥으로 이감을 가게 되었다.

고홍석은 전남담양이 고향이고 1951년 동기 공세 때 일찍 체포되었고, 이준원은 전북 쌍치가 고향인데 역시 동기공세때 일찍 체포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안동 감옥에서 아는 사람은 백운산에서 한부대에 있다 1954년 2/20일에 생포 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조정섭씨인데 구례 간전면 출신이고 구빨찌 출신이다. 박 아무개는 경남 빨찌산 총사령관 이영희 동지 연락병인데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 두동지 밖에 모른다.

이름은 잊어버려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동지 말에 의하면 1953년 의령해방 투쟁을 승리로 장식하고 두 부대가 있었는데 한 부대는 남고 한부대는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모동네 마을을 지나는데 적들의 매복할 위험이 있으니 경각성을 높여야하였는데 이영희 사령관은 대원들 앞에 전진하다 적들이 쏜 유탄에 맞아 희생되었다고 하는 말을 직접들었다.

그후 이동지들은 어떻게 생활하다 출옥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 안동감옥 이감 차량은 영국제 “오스톤”이란 짐차인데 이 차에 우리 무기수 3명이 타고 간수부장 1명과 간수 3병이 탔었다.

날씨도 좋은 날인데 경북 문경 논들판 한 가운데 도로길 중간 쯤에서 차가 전복되어 도로가 논에 옆으로 넘어져 차에 실은 기름 통이 굴러내리는 바람에 이준원동지 머리를 들이 받고 논에 떨어졌다.

만일 차가 거꾸로 뒤집어졌다면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으나 옆으로 넘어져 사람들과 짐들이 함께 논에 퍼부린 것이다.

그 결과 이준원동지는 입에서 붉은 피가 흘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래도 간수부장과 나는 한참 후에 깨어났는데 아무 다친데가 없었다.

사고 원인은 운전수 말에 의하면 브레이크를 밟아도 듣지 않아 다행이 논에 전복 되어 옆으로 누웠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이감을 중단하고 안동감옥으로 돌아와 치료기간을 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치료기간이 끝나 1957년 1/27일에 다시 대전으로 이감 오게 된 것이다. 다음은 대전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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