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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정종희 선생과 송송학 선생을 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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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9-01 09:46 조회1,0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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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정종희 선생과 송송학 선생을 기리면서

[민족통신 편집실]


정종희 선생을 기리면서

[제1신] 오늘(2021년 8월 29일) 전국묘소답사반은 보성군 회천면 정종희선생 묘소를 답사했다.

정종희 선생은 1933년 8월에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찌기 반일사상을 갖게 되었다. 1947년 광주서중학교를 중퇴하고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정종희 선생의 묘소를 찾은 전국묘소답사반


1950년 7월 23일 인민군 진격에 의한 해방을 맞이하여 희천면당부 선전부 사업을 전개하였고, 미제를 비롯한 16개 침략군의 침공에 의하여 9.28후퇴를 맞아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했다.

마을 뒷산인 일림산에서 1년간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다가 적들의 포위작전 공격에 불의의 기습을 당하였다. 이때 두 눈에 총탄을 맞아 실명되어 평생을 앞 못 보는 심봉사가 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적들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지 자수로 인정해 문제 삼지 않았다.

그후 가족들은 한 눈이라도 볼 수 없을 까 유명한 병원을 찾아 수술을 했으나 끝내 눈은 소생하지 못하고 마지막 운명하는 그날까지 두귀와 팔다리가 눈이 되어 살아가야만 했다.

그가 불굴의 투지와 인내로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어둠의 터널속에서 사는 과정에 한줄기 빛을 맞게 되었다. 1955년 5월에 “윤점순“이란 처녀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정씨 집안의 명성과 정종희 선생의 덕망에 감동하여 극적인 결혼을 이루어 장장 50여년 동안 부부인연을 맺고 5남매를 두고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는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사모님의 집안도 독립운동가의 당당한 내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란한 가정에 풍파가 몰아 닥쳤다. 눈을 잃은 17년이 지난 1967년 5월 북에 올라간 정해진 큰조카가 집을 찾아와 극적인 상봉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해진 조카는 6.25해방 때 서울시 인민위 선전부장을 했고 9.28후퇴 때 북상해서 중앙당 대남 연락부 부부장이었던 것이다.

가족들이 모여 만약의 경우 발각될 때에 큰조카의 셋째 아들인 정춘상씨가 모든 책임을 담당하기로 결의 했었다. 그후 불행하게도 1980년 전두환정권 때 발각되어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갖은 고문 끝에 간첩죄인 간첩 방조죄 국가보안법 위반제를 붙여 재판에서 정춘상씨와 정종희선생은 사형 정길상은 15년 등의 구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가족과 가산 등은 파산직전에 이르는 피해를 보게 되었다

결국 정춘상씨는 사형이 집행되고 정종희선생은 12년을 받고 정길상씨도 10년을 받게 되었다.

정해진씨는 무사히 월북했었다. 사실 이에 앞서 1965년에 찾아 왔고 2차로 1967년 5월에 정해진씨가 집을 찾아왔다.

일차 때는 큰조카가 살아 있어서 만약의 경우 큰조카가 책임을 맡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조카가 운명하고 없었기 때문에 큰조카의 셋째 아들인 정춘상씨가 맡기로 해서 결국 사형 집행당하는 비극적인 기록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정종희 선생은 감옥의 독방에서 인간 이하의 고통을 안고 적과 사투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한줄기 희망의 불빛으로 남민전 건으로 들어온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분들이 일상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주어 고통스러워도 희망과 용기를 갖고 부닥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특히 몇 년전 운명한 박석률 동지의 헌신적인 도움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동지애로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987년 민중 항쟁에 의해 감형을 받아 1988년 12월 22일 형집행정지로 8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에도 연이나 다름없이 반제 반미 자주 통일 정신을 잃지 않고 남은 생을 후대들을 위해 무언가 교훈을 남기고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오는 과정에 감옥에서의 적들의 무지막지한 각종 고문 구타 후유증이 발생하여 뇌종양이란 병명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유족들은 정상 회복을 위하여 있는 성의를 다하였으나 세월은 지켜주지 않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008년 9월 1일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특히 앞못보는 일상생활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면서도 민족자주정신을 확고하게 간직하고 아름답게 최후를 마감했다는 것은 후대들에게 산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특히 반려자인 윤점순 여사의 아름다운 삶은 후대들의 등불이 되고 있다. 윤점순 사모님은 생존해 계시나 치매로 인하여 요양원에서 요양중이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불굴의 투사인 정종희 선생이시여!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회고 할 때에 저들은 두 눈이 실명된 한사람의 인간을 감옥 독방에서 장장 8년의 세월동안 잔혹하게 전향을 강요하였습니다. 이는 인류의 국가 감옥 역사상 미제의 점령통치하의 소위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기록을 남겼고, 그것을 이겨낸 유일한 정종희 투사임을 자랑스럽게 길이길이 새길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남은 동지들이 있어 늦게라도 이렇게 묘소를 찾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자제들도 아버님의 정신을 올곧게 이어받아 조국의 자주화 투쟁전선에서 열심히 뛰고 있으니 모든 아픈 시름을 잊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참고*** 오늘 묘소답사반은 정종희선생 막내 아들과 둘째따님이 함께 했으며 특히 보성출신으로 전 전국농민회장을 했으며 현 진보연대 공동 상임의장을 하고 있는 문경식님이 참여하여 빛나는 의미를 되새겼다.

묘소@@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3구 678번지(뒷산 일림산)

2020년 12월 00일, 2021. 8월 29일 전국묘소 답사반 올림



송송학 선생을 기리면서

[제2신] 오늘(2021. 8/29) 오후 1시경 전국 묘소 답사반은 집중 폭우속에서 송송학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송송학 선생은 경남 삼천포에서 동학 혁명의 불길속에 뛰어들어간 조부님의 피를 안고 1930년 3월 5일(음력)에 출생했다.

일제 때 반일 학생운동하다 체포 되어 1년 징역을 살기도 했다.

1945년 미제의 점령통치를 반대하여 3형제가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투쟁과정에서 큰형은 전사하고 동생은 살아남았다.

송송학 선생 묘소를 찾은 전국묘소답사반



1950년 9.28 후퇴 후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했다.

여러 부대를 거쳐 최종 경남 도당 보위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다 1953년 12월에 지리산 조계골 지하 아지트에 도당위원장 조병화 동지와 같이 있다가 적들에게 발각되어 생포당했다.

그후 남원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고등군법에 회부되어 형을 받고 전주감옥으로 이송되어 형옥을 치루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출옥해 가정을 갖고 생활 하였다. 그러나 초심을 잃지 않고 사회 진보와 민족자주 통일 운동전선에서 투쟁하면서 마지막까지 경남 빨찌산 투쟁의 산역사를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진주 mbc 빨찌산 다큐 작성을 위해 필자와 같이 경남 빨찌산 출신들인 김교영 선생과 한창우 선생들과 함께 지리산 조계골 조병화 경남도당위원장 동지의 지하 아지트 답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비트 찾는 데는 실패하고 추정된 곳에서 인터뷰 한 대목이 다큐에 나오기도 했다.

어쩌다 만날 때면 “경남도 전남과 같이 투쟁했던 동지들이 합심해서 경남 빨찌산 투쟁사를 남기자”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존자 동지들 중 지도력을 갖고 아우를 동지들이 없어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선생은 살아생전에 마지막 하고픈 것이 경남 빨찌산 투쟁사를 남기는 것이었는데 이루지 못한 한을 품고 드디어 2016년 4월 7일(양력)에 운명하고 말았다.


마지막 까지 한 길을 걸어온 송송학 선생이시어!

비록 삶에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초심을 잃지 않고 마지막 생을 마감 했다는 것은 우리 후대들에게 내 조국과 인민을 위한 투쟁이 그 얼마나 간고한 투쟁이었는가를 산 교훈으로 남기었습니다. 모든 아픔 시름을 잊고 못 다한 위업을 남은 후대들에게 맡기고 평안히 주무시며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참고 @@ 오늘 폭우속에서도 남해 농민회장과 사무국장, 진보연대 의장이 참여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창원의 이성묵님의 알선에 힘입은 바 크다는 의미에서 고맙게 생각한다.

참고@@ 묘소는 경남 남해 신지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빈소까지 찾아가 참배하고 송철용 아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었으나 금명간 한번 통화하고 지금껏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2021. 7월 00일 2021년 8월 29일 전국 묘소 답사반 일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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