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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8. 전남 유격투쟁의 사령기지인 백아산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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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8-13 10:46 조회1,0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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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8

전남 유격투쟁의 사령기지인 백아산을 아는가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서언

전남 유격투쟁의 사령기지인 백아산의 지형지세와 빨찌산 투쟁의 첫 횃불이란 제하의 글을 참조하면서 이 글을 읽기 바란다.

아시다시피, 백아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무등산, 남쪽으로는 화순 동북 경계인 독재, 북쪽으로는 곡성 오산면 경계, 동쪽으로는 곡성 겸면 삼기 석곡면 등 산간마을들이 넓은 영역에 걸쳐 빨찌산 해방구에 들어와 있었다.

백아산은 전남 빨찌산 투쟁의 사령기지로써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미제를 비롯한 16개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치열한 빨찌산 투쟁의 전적지 임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넘도록 제대로 된 답사 한 번 해 보지 못했다.

그동안 다른 전적지는 비교적 여러 번 답사와 역사기행을 통해 다소 알려지기도 했으나 백아산 전적지만큼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 당시 활동하던 노 선배들이 고령으로 답사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후대들에게 바른 역사기행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염원에서 뜻있는 젊은 일꾼들의 협조하에 답사의 첫 닻을 올리게 되었다.

앞으로 대를 이을 젊은 일꾼들, 뜻있고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왜곡으로 점철된 빨찌산 투쟁의 역사성의 단면이라도 올바로 인식시켜주고,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되기를 바라면서.......


2) 백아산을 향해 출발하면서

우리 답사 일행은 광주교도소 공영주차장에서 만나 반가운 인사와 함께 화순 북면 노치리(갈갱이)를 향해 달렸다. 달리는 차창을 통해 펼쳐지는 가을 단풍으로 물들은 산야를 보면서 전쟁시기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적지나 무죄한 민간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었던 곳을 지날 때마다 “살아남은 너희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으며 우리의 염원을 잊지 않고 있는가?”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에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동시에 결코 잊지 않고 이 땅에서 미제를 몰아내기 위하여 자주적 통일전선 투쟁에 사력을 다하여 투쟁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첫 종착지인 갈갱이 부락에 도착했다.


3) 김규환 열사 묘지 참배

소년 빨찌산 전사 김규환 열사(애명 똘똘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9.28후퇴 후 입산하여 소년 전사로서 전남 빨찌산 총사령부 오금일 부사령관 연락병이었다.

이 소년 전사는 일반 전사 못지않게 용감하게 잘 싸웠으며 너무도 영리하고 똑똑해서 ‘똘똘이’란 애칭까지 받았다.

심성이 착하고 아름다우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실천 투쟁으로 관철시키면서 부사령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보위하였다.

간부들이나 일반 대원들에 이르기까지 칭찬이 자자했으며 동지적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앞으로 유능한 간부로 발전할 수 있는 소양과 기질 그리고 투쟁력을 갖추고 날로 발전하는 투쟁 과정에 오발에 의하여 갈갱이 부락에서 최후를 맞는 아픔과 상처를 안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시신은 갈갱이 부락 뒷산에 장례를 치르고 묘를 만들었다.

당시 함께 있다가 최후를 맞은 김규환 열사 묘를 아는 사람은 이복순 여성 동지와 사령부 아지트로 썼던 집 주인 김용식씨 뿐이다. 그동안 김용식(당시 77세)씨가 묘를 관리해 오늘에 이르렸다. 김용식씨는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백아산에서 투쟁했던 생존자 중 이복순(당시 75세) 여성 동지만이 알고 있기 때문에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강행해서 묘소까지 동행했던 것이다.

김용식씨의 안내를 받아 이복순 여성동지가 준비한 제찬을 묘소 앞에 차려놓고 간단한 추모제를 지냈다.

우리 모두는 엄숙한 마음으로 김규환 동지가 못다 이룬 위업을 온몸으로 받아 안고 ‘우리 민족끼리’란 이념의 기치하에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고수 이행 관철투쟁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짐했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승리를 위하여 소년 전사로서 고귀한 생을 마치고 전남 유격사령 기지인 백아산 갈갱이 뒷산에 묻힌 김규환 혁명열사여 고이 잠드시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기울어져 가는 석양빛을 받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했다.


4) 전남 빨찌산 총사령부 아지트

9.28후퇴 후 백아산 일대에 해방구를 가지고 있을 때 갈갱이 부락 김용식씨와 서대석(당시 87세)씨는 집 위아래에 맞닿아 살았다. 먼저 김용식씨 집에 있다가 서대석씨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두 분은 사령관 동지와 함께 기거하면서 한집 식구처럼 지내며 정성으로 수발했다고 한다. 당시 적들이 주민들을 강제 소개시켜 외지로 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나가지 않고 함께 했다고 했다.

두 분은 20대 3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총사 보위대에 들어가 투쟁하다가 지리산으로 파송되었다

지리산에서 싸우다 체포되어 수용소에 있다 석방 되었다.

그 후 군에 입대하여 서씨는 군속으로 김씨는 포병부대에 배치돼 일선에서 근무하다 제대 후 이곳 갈갱이에서 타버린 집터위에 집을 짓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했다.

그리고 서씨는 동생도 지리산 노고단에서 희생되었다고 했다.

서대석씨 부부도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54년 김선우 사령관의 죽음을 비행기로 뿌린 삐라를 주워보고 알게 되어 눈물까지 흘렸다고 회고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그리고 갈갱이에서 사령관과 함께 했던 감격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파란만장한 내외분의 이야기를 시간 관계상 다 들을 수가 없어 다음을 기약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면서 솔치 부락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시골 통닭구이에 소주잔을 나누면서 다음 산행을 준비했다.


5) 솔치마을

이 마을은 전쟁 전 90여 호가 살았다 한다.

적들은 침공해 들어올 때마다 강제 소개시키고 집들을 소각했다. 특히 9.28후퇴 후 빨찌산 거점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 집도 남김없이 미제 전폭기에 의해서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 후 이곳에서 살았던 민간인은 한 사람도 들어오지 않아 쑥대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1994년도에 민박집 하나만 허가 받아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광이나 피서 온 손님들을 받고 있다 했다.

40대의 민박 주인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 그 당시 상황을 들려주어서 대강 알고 있다고 하면서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복순 여성 동지는 집주인의 부모님을 잘 알고 있었다.

참고 @@ 현재는 솔치마을 골짝이 저수지로 만들어 져 있다,

솔치재는 화순과 곡성의 경계에 있는 재이고 지금은 수도원 건물 2채와 주차장이 있고 주위는 과일나무를 심어 놓고 있다. 건물 짓기 몇 년 되었는데 드디어 금년 3월 27일에 완성되어 20여명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

기행하는 사람들이나 청소년들의 학습장이 되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쯤 찾아가 백아산 빨찌산 투쟁 사령기지의 기를 듬뿍 담아가기 바란다.


6 )하늘바위

이 하늘바위는 수리에서 갈갱이로 들어가는 입구 고랑 우측에 엄청나게 큰 바위산으로 뽀족하게 우뚝 서 있었다. 그래서 하늘바위라고 부른다 한다.

하늘바위 밑 골짜기에 어떤 건물을 짓고 있었다(민박집). 지금은 민박집이 들어서 있어 기행 때 숙박하기도 했다.

당시 미제 전폭기가 떨어졌던 위치를 김용식씨가 알고 있었다. 이 분의 안내를 받아 떨어진 위치를 확인했다. 하늘바위 밑 골짝 길 좌측 산 언저리였다. 그때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고 잡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미제 전폭기가 격추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51년 여름(7월 20일), 적들의 수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적아 간에 치열한 전투 속에 많은 사상자를 낸 적들은 전폭기를 동원해 백아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때 곡성 매봉고지에서 진지를 사수하고 있던 총사 보위대원 위종근 동지는 기필코 적기를 격추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자신을 완전히 적기에 노출시켰다. 이때 적기는 능선이나 고지 가까이 접근하여 기총소사를 감행하고 있었다.

이때 장총을 들고 노출된 상태로 매봉고지를 향해 오는 적기를 향해 쏜 결과 날개에 명중되어 갈갱이 골짝을 배회하다 골짝 길가에 처박혔다.

미조종사 2명이 죽고, 기관포 6문과 실탄 등 군수품을 로획 했다.

기관포는 병기과에서 수리하여 총사 15연대 기관포 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인민군 총사령부 전과 보도에 나왔으며, 전남 빨찌산 신문에도 보도되어 재산 성원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 동지는 이 공로로 빨찌산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그 후 용감히 잘 싸우다 애석하게도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7) 백아산 전략 고지인 삼각고지

우리 답사반 일행은 솔치 민박에서 일박하고 11월 13일 7시 30분경에 솔치재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이복순 동지는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답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민박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민박집에서 솔치재까지는 1.8km다.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트럭이나 승용차 밖에 지나갈 수가 없었다.

집주인의 배려로 집주인 트럭에 몸을 싣고 솔치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곡성에서 올라오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화순과 곡성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은 포장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길 없는 수목을 헤치며 삼각고지를 향해 깎아지른 급한 경사를 올라 삼각고지에 도달했다.

현재는 솔티재 좌측에 “쥬신공화국”이란 집 2채가 지어지고 주차장도 있다. 용도는 백운산 기행자를 위한 것도 있다고 하는 데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삼각고지는 백아산의 사령기지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갈림길에 선 생명고지였다. 삼각고지는 화순과 곡성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곡성 매봉 중봉, 뒤로는 한동산으로 이어지고, 화순 매봉까지 이어진다. 이 전선은 총사 기동연대 15연대와 1연대가 합동작전 할 때 담당했다.

북쪽으로는 보름재, 수산재를 이어 차일봉, 검단산까지 이어진다. 이 전선은 곡성유격대가 담당했다.

서쪽으로는 중봉, 상봉, 마당바위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 전선은 광주유격대(540부대)가 담당했다.

삼각고지에서 총사고지, 후방고지, 병기과 고지, 문바위재까지는 총사 보위부대가 담당했다.

이 능선을 사다리 능선으로 불렀다.

사다리 능선 좌우로 전남도당 산하 각 기관과 광산, 곡성군당 등의 각 기관과 유격부대들이 일시적 해방구를 설치하여 대중정치공작사업을 하면서 싸웠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적들은 사력을 다하여 삼각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력을 총동원하여 침공을 감행했으나 그때마다 패퇴를 거듭하던 끝에 미전폭기 편대를 동원하여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이 와중에 1951년 여름에 미제는 국제전투법규를 무시하고 네이팜탄과 세균탄까지 투하했다. 네이팜탄 투하 범위는 직경 30~50미터쯤 되는데 무려 4회나 저공으로 날아와서 삼각고지 참호에 투하했다. 고지를 사수하고 있던 전사들은 2,000도 열 때문에 검은 숯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 파편들은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실로 가공할만한 살상무기였다.

이로 말미암아 까맣게 타버린 전사들은 누가누군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살아남은 전사들은 복수의 통곡을 하면서 시신을 수습해 묻어야만 했다.

그 후 적들은 고지 능선들을 점령하고 수색작전을 펼쳐 비무장 성원들, 환자아지트의 부상자들, 재귀열병에 걸려 거동 못하는 환자들, 입산한 인민들을 닥치는데로 무차별적 학살 만행을 자행했다.

당시 빨찌산 전구에서 100여 명의 유격전사들과 700여 명의 부락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답사반은 당시의 참상을 회고하면서 사다리 능선인 총사고지, 후방고지, 병기과고지, 문바위재까지 길 없는 가시밭과 무성하게 자라난 산죽을 헤쳐가며 문바위재에 도착했다.


8) 마당바위 능선

이 마당바위 능선은 오사공(540)부대가 지키었다.

이 능선 좌우는 깎아지른듯한 낭떠러지다.

여기에서 적아간의 대치전에서 서로 휴전하자는 데까지는 합의했으나 담판자들의 무장해제 문제로 결렬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했다.

적들은 생포자들을 바위 난간에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난사하여 떨어져 죽게하는 만행도 서슴치 않고 감행했다.

그리고 마당바위와 상봉사이에 구릉진 곳이 있다. 여기에 샘이 있다. 이 샘물은 적아 간에 점령하고 있을 때는 쉼터로서 밥도 해 먹고 주둔도 했었다.

적들이 상봉을 올라오면서 이 구릉진 곳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적들이 안심하고 구릉진 곳을 통과할 때 매복전으로 섬멸적 타격을 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9) 전남 유격대 총사령부 기동연대 투쟁

총사 기동연대는 1연대, 3연대, 7연대, 15연대로 편성되어있다. 그리고 광산유격대, 곡성유격대, 화순유격대 등 각 유격대는 총사령부 지휘하에 싸우고 있었다.

총사령부 산하 무장유격대들은 화순, 순천해방작전과 이양철도 기차 전복 투쟁, 광주시 주둔 기마대 본부 섬멸작전, 8사단 주둔지 습격작전을 통해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51년 광주감옥 해방작전은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작전 중 한동산 참호에서 작전을 토의하던 중 적들의 포탄공격으로 박정현 총사 참모장과 연대 참모장, 문화부 연대장 등 군사간부들이 희생당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박정현 참모장은 탁월한 전략전술가로 백아산 해방구를 사수하는데 명성을 떨친 정치군사간부였다,

이로 말미암아 심한 전력 손실의 타격을 받기도 했었다.


10) 해방구 내의 당 정치사업

일시적 해방구내에서 당은 인민대중과 밀접한 연계속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고 같이 생활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대중정치 공작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지구 내에 당학교와 군관학교를 개설하여 당 정치 일꾼들과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병기과를 개설하여 각종 실탄과 수류탄을 제조하여 무장부대에 보급했다.

의무과를 개설하여 부상자들과 재귀열병 환자들을 치료했다. 환자아지트는 중환자와 경환자를 분류하여 따로 아지트를 마련하여 치료했다.

특히 적들의 침공 때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싸웠던 박대화 의무과장 동지가 한 팔을 잃으면서까지 사수했던 공로로 빨찌산 영웅칭호를 받기도 했다.


11) 적들의 백아산 고지 점령

백아산 해방구를 사수하기 위하여 전진후퇴를 거듭하는 결사항전을 전개했으나 적들은 입산자 가족들을 강제로 동원시켜 총알받이로 앞세워 침공을 거듭한 끝에 각 고지마다 참호를 구축하고 방어했으나 적들의 무차별적 폭격과 수색작전 속에서 더 이상 진지를 사수할 수 없었다.

이미 이를 예견하고 1951년 4월부터 도당 산하 기관들은 서서히 보다 안전한 유격기지인 백운산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김선우 사령관 동지는 1952년 11월에 백아산 전구를 오금일 부사령관에 위임하고 백운산으로 옮겼다. 그에 앞서 박영발 도당위원장은 8월에 백운산으로 옮겼다.

오금일 부사령관(1953년 5월에 사령관으로)은 1953년 가을, 희생될 때까지 사령기지를 사력을 다하여 지키었다.

그리하여 백아산은 오금일 사령관의 희생으로 조직적인 무장투쟁은 종막을 고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도당의 조직적 당 정치공작 사업도 1955년 3월 박갑출 부위원장의 지하 아지트에서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당조직 사업도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12) 하산하면서

지금 백아산은 등산로가 만들어져 일반 등산객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들은 백아산에 얽힌 역사적 사연을 아예 모르거나 구전으로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일면 간단한 설명도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전쟁 때 당 산하 각 기관들이 있었던 웃새목은 휴양림으로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골짝을 큰 동화사골이라고 부르고 소능선 넘어는 작은 동화사골이라 부르고 있었다.

동화사 골 중간에 빨찌산 아지트가 있는데 여기에 표지판이 새워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휴양림 속에 세워진 6.25전적지 판에 의무과와 병기과 아지트가 표시되어 답사하려고 급히 들어갔으나 민박집이 있고 또 민박집을 짓고 있었다. (작은 동화사골)

골짝 깊숙이 들어가야 답사할 수 있었는데 철망이 처 있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고 어둠이 찾아와 시간관계상 답사하지 못하고 후일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발걸음을 뒤로하고 출발했던 민박집으로 되돌아왔다.


13) 글을 마치며

이번 백아산 답사는 시간관계로 아쉬움을 남기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나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런대로 핵심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생각한다.

백아산에 얽힌 피어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백아산이 왜 전남 유격투쟁의 사령기지가 되었는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백아산 역사기행의 단초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전쟁시기 미제의 침략성과 잔악성을 되새겨 볼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하 항일 무장투쟁의 전통을 계승한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 빨찌산 투쟁의 역사성을 똑바로 인식하고 이 땅에서 미제를 몰아내는 것만이 무명의 화초 밑에 한 줌 흙으로 산화하여 간 수많은 혁명열사들의 위업을 온몸으로 받드는 길이다.

오늘날 우리민족끼리란 이념도 열사들의 투쟁 속에 뿌리를 두고 있음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열사들의 투쟁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대를 이어 애국적 충성으로 조국의 자주통일 위업을 실천투쟁을 통해 구현시키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짐하기 바라면서....


참고@@ 이 글은 지금부터 20여년 전에 처음으로 답사해 관심 있는 분들의 백아산 기행의 참고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을 그간 변화된 양상을 첨부해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2021년 8월 8일 필자 ㅡ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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