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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7. 지리산 빗점골을 찾을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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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8-08 08:39 조회9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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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7

지리산 빗점골을 찾을 때마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명산으로서 임진 조국전쟁, 갑오 농민 전쟁, 항일 투쟁, 조국전쟁 때 빨찌산 투쟁의 치열한 불길 속에서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하여 사랑도, 청춘도, 재산도 생명까지 다 바쳐 싸운 전적지임을 염두에 두고 빗점골 기행을 하기 바란다.


가는 길과 목적지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로 들어간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첫 번째 다리까지는 화개골이라 하고 그 이후부터는 대성골이라 한다.

빗점골은 대성골의 한 골짜기다.

빗점골은 빗점마을이 있으나 폐허 된지 오래 되었다.

빗점골은 왼골, 산태골, 절골로 나누어 있다.

위 세 골짝의 물이 합쳐진 곳에서 이 현상선생의 일행이 너들강을 건너는 과정에 경찰대들의 매복에 걸려 희생된 곳이다.

대성골과 빗점골로 가는 삼각지점이 의신마을이다. 여기 까지는 대형 버스가 들어간다. 이후부터는 봉고나 소형차는 마지막 삼정마을까지 들어간다. 여기서부터 차 통행을 차단하는 쇠사슬 줄이 가로 막고 있어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1953년 8월 박헌영, 리승엽 도당들의 미제 고용간첩사건이 발생하여 처형되었을 때 제 5지구당 자체 조직위원회 결정에 의하여 지구당을 해체하고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지도 간부들 5명이 자진해서 평당원으로 내려앉았다.

따라서 이현상선생도 평당원이 되었다. 당시 각 도당 산하 각급 당 단체와 일꾼들이 대대적으로 간첩도당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이 없는지 비판사업을 전개하여 당의 사상적 통일과 결속을 굳게 다지며 투쟁의 열의를 더욱 높여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당에서는 지구당을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존속시켜 사업을 계속하라는 지시문을 가지고 온 연락원이 적들의 손을 거쳐 전북 도당에 잠입해 들어 왔었다.

전북도당은 잠입한 연락원의 신분 확인을 위해 조사기간을 갖더라도 응당 상급당부가 지구당이기 때문에 보고는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데 대하여 왜라는 의문을 아직 까지 풀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사전에 알았다면 5지구당을 해체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생각하고 있다.

적들은 현상 선생 시신을 사진을 찍어 비행기로 지리산을 비롯해 남조선 빨찌산 지역에 삐라를 뿌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시신은 목을 잘라 현상선생 고향마을에 걸어놓는 만행도 감행했다 한다.

그 후 섬진강 모래사장에서 화장했다고 했었다.



이현상선생이 빗점골에서 희생된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당시 마지막 제5지구당 지리산 빗점골 아지트를 찾아갔다

1953년 9월 15일 섬진강 건너 광양 백운산에 있을 때 당시 전남 도당 김선우 위원장동지를 보위하고 지리산에 가서 구래군당부에서 일박하고 16일에 빗점골 현상선생 아지트까지 찾아가 하루 밤을 세웠다.

9/17일 아침을 들고 박영발 동지 일행과 함께 꽃대봉(지금 지도상에는 토끼봉으로 되어 있음)에 올라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의 삼도봉 밑에 임시 아지트를 마련해 놓고 17일 밤을 새웠다.

18일 새벽 4시에 꽃대봉 (지금 토끼봉) 정찰을 위에 올라 빗점골을 내려다 보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서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고 동이 틀 무렵 빗점골에서 총소리가 버글버글 골짜기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혹시 동지들이 매복에 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본대로 돌아와 보고도 했는데 오후에 현상동지 일행 중 한사람만이 살아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빗점골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 꽃대봉 (지금의 토끼봉) 전투에서 제 5지구당 김택유동지 소조가 백주에 서남지구 경찰대장을 사살하고 일개 대대를 생포하기도 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매년 9/18일이면 서울에서 이현상부대 문화담당지도원이었던 최순희 여사가 손수 제찬을 장만하여 빗점골 희생지를 찾아가 제를 올리기도 했는데 근년에는 노쇠한 관계로 일산 어느 요양원에서 요양하다가 안타깝게도 작고해 희생지 근처에 유분을 뿌리기도 했다.

그동안 뜻있는 어느 두 팀에서 매년 현장을 찾아 제를 올리며 기리고 있었다.

금년 기일에 두 팀이 우연하게 만나 함께 제를 올리면서 그간 상황을 나누기도 했다. 내년부터는 따로따로 할 것이 아니라 함께 하기로 했으며 현상선생을 비롯한 지리산에서 희생된 전체 열사들을 생각하면서 가급적 많은 인원이 함께 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대성골의 일화

1951년 제 1차 동기 공세 때 대성골에서 이현상부대는 경남 도당 성원들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 부대 활동으로 매일 토벌대는 꼬리를 물고 추격하기도 했다. 때문에 원능선을 넘고 넘는 치열한 전투 속에 많은 성원들이 희생되고 부상자도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1952년 1/19일부터는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속에서 대성골에 집결한 이현상부대와 경남도당부 각 단체 성원들은 적들의 집중적인 포위속에서 무차별 폭격은 물론 심지어 네이팜 탄까지 투하하여 약 2,000여명의 희생자를 발생케 했던 것이다.

이 공세속에서 현상부대의 주력군이 거의 희생되는 것은 물론 경남 도당부는 거의 희생되어 공세가 끝난 후 다른 도당부 간부들을 파견하여 도당부를 형성할 정도로 참화를 겪기도 했다.

대성골에서 이현상부대 지휘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부상당해 움직일 수 없는 전사들 30여명이 자신들이 희생되더라도 사령부를 구출해야한다는 결사옹위정신과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사령부를 위기에서 구출해 내었던 것이다.

30여명의 전사들은 입에 수류탄을 물고 터틀었는데 적들이 이곳에 화력을 집중하는 사이 방어망을 뚫고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일은 결사옹위 정신과 희생정신을 계승한 남조선 빨찌산 투쟁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자랑스러운 투쟁으로 기록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이는 그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동지의 증언임을 상기 시킨다.


빗점골의 사령부 아지트

이현상선생 희생지에서 약 30분 올라가면 지휘부 아지트가 나온다. 여기에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하고 터만 남아있다. 이 아지트에서 동서남북을 살펴보면 뒤쪽은 너들강 좌측은 백소령으로 오르고 우측은 토끼봉능선을 관찰할 수 있는 요충지임을 직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빗점골에 얽힌 사연을 윤곽이나마 살펴보았다.

진달래산팀은 매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빗점골 이현상 선생 기일을 맞아 제를 올리는 성의를 다하는 모범을 보이고 있다.


참고**** 이현상선생은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그의 반신상과 함게 안장되어 있다.

훈장은 “영웅훈장” “자주독립훈장“ ”국기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이 현상선생이 일제 때 감옥에 있을 때 박달 동지와 리재순동지를 만나 김일성장군의 항일로선을 알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서 이현상 선생의 말씀 중에 “운동하는 사람이 올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열성을 다하여도 한갖 종이장 위의 불과 같다”는 교훈을 받았다고 했다.

한번쯤 되새겨 보기 바란다.

이상 참고 하면서 지리산 빗점골을 기행하기를 *********.

2021. 7/31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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