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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3. 투철한 혁명적신념 없이는 최후의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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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6-12 22:43 조회1,2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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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3.

투철한 혁명적신념 없이는 최후의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투철한 혁명적신념 없이는 최후의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

이는 항일 빨찌산 투쟁에서 얻어진 결론이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 전 후의 빨찌산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항일 빨찌산 투쟁의 혁명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투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로부터 오늘의 미제에 이르기 까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투쟁전선에 나섰다가 무장 투쟁과정에서 희생된 동지들은 모두가 혁명열사들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끝까지 투쟁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자수하는 동무들도 있었다. 아무리 잘 싸웠어도 마지막 끝을 잘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적들과 전투 중에나 수색작전에 체포되는 동무도 많이 있었다.

체포되는 경우에는 어찌할 수 없이 불가피적으로 체포되는 경우와 손들고 나와 체포되는 경우가 있다. 후자가 체포되는 경우의 절대 다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체포된 상태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자수하는 경우는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부닥친 고난을 극복할 수 없어 자수하되 마음은 변치 않는 경우가 있고, 둘째로, 적들에게 이용당하여 자수하되 동무를 쏘아 죽이고 자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극히 희소하다.

재산시 교양에서 당에서 주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어떤 경우라도 체포되지 않고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는 것이 원칙이고, 체포된 후 적들의 고문투쟁에서 자기 조직의 기밀을 불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감옥 생활에서 자기 혁명적인 신념을 올곧게 지키는 것이 원칙이다. 이를 두고 혁명하는 사람들의 3원칙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재산시 1951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공세 때 선이 떨어져도 제 때에 소속기관을 찾아가 결합하는 것이 기본원칙인데 이를 지키지 않고 동기공세가 일차 끝난 후 휴식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고 선 떨어진 몇몇 사람들이 모여 외톨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일명 “곰부대”라고 명명했다. 특히 지리산에서 이현상 부대에 있다가 전투중이나 적들의 수색작전에 분산되어 전투가 끝난 후에도 본 부대로 돌아오지 않고 끼리끼리 남아서 자체 보급을 하며 피신생활을 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자수하면 죽임을 당할 것 같고, 즉시 돌아가지 않고 나중에 찾아가면 총살 당할 것 같아 돌아가지도 않고 남아서 보급만 해결하면서 산생활 하는 것을 1952년 여름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된 연유는 이렇다. 지리산 대소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 구레군 광의면으로 보급 사업을 나가기 위하여 마을 가까운 기슭에 잠복하고 있는데 면당 정보선에 의하면 몇몇 사람들이 내려와서 반동집 유가족집 가리지 않고 식량을 약탈해서 여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입수하였다. 당시 지구당 산하 단체나 무장부대성원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급을 나가도 지하정보에 입각해서 보급문제를 해결하고 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고 몇 주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지점에 나타난다는 정보에 입각하여 사전에 자주 다니는 통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통과할 수 있는 지점을 선택하여 매복전을 벌린 결과 3명중 한사람을 생포했었다. 아지트로 동행하여 자초지종을 심문한 결과 이현상부대 소속임과 동시에 전남 00군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그 후 종적을 감추어 다시 나타나지도 않고 해서 조용해졌다.

또 하나는 백운산에 있을 때 우리 전남부대가 진상골 잣나무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다.

때는 1953년 가을이다. 국방군 제정 5사단이 야지에서부터 백운산을 포위하고 좁혀 들어오는 과정이었다. 영암출신의 김재규라는 3중대 대원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 싸웠다. 그가 중상을 당하여 다리가 절럼발이가 되어 무장투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중대에서 3중대로 가서 도당지도부와 우리 부대간의 연락사업을 맡아 하고 있었다. 적들이 산상에 주둔해 있을 때도 연락사업은 잘 수행했다

보통 해가 석양에 걸터앉을 때 출발해서 밤 11시 전에 돌아오곤 했었는데 어느날 돌아오지 않아 이상히 여기고 이튿날 내가 직접 도당지도부를 찾아가 문의한 결과 레포를 전달하고 전처럼 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수했다는 정보도 없고 해서 이상히 여기고 본 아지트를 다른 골짝으로 옮기고 비상선을 나가서 감시해 보아도 이상 반응이 없었다.

보름 후 정보에 의하면 구구식 총을 들고 자수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부대에서는 비판사업이 진행 되었다.

그 일을 알게된 후의 일이다. 백운산 골짝을 돌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88도당지도부 중초선 능선타고 내려가다 보면 큰 암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서 아지트를 쓰는 때도 있었다.

동기공세 때 88 도당지도부 골짝에서의 도당산하 각 기관 단체 성원들이 모두 100여명 가까이 되었는데 정공대 무장세력의 엄호하에 중허리를 돌아가는 과정에 큰 암바위 밑에 도착했으나 앞에 적들이 공격해 와 다시 뒤돌아 간적이 있었는데 그 때부터 이 큰 암바위를 “바꾸바위”라 불렀다.

이 바꾸바위 밑에서 우리부대가 하루밤을 새우기 위하여 당시 불을 피운 화독에 찬 재를 쓸어 버리려고 뒤지는데 그 재속에서 레포를 발견하고 보니 자수한 김재규씨가 써놓았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입산해서 누구 못지않게 잘 싸우려 노력했으나 전투 중 중상을 당하여 무장투쟁을 못하고 동무들에 피해만 끼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껴, 차라리 없는 것이 동무들의 맘에 부담감을 주지 않겠기에 적들에게 자수하더라도 맘은 변치 않을 것임을 믿어달라는 것이었다.

그후 내가 54년에 체포되어 남원수용소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로 이동되었는데 알아보니 그는 형을 받지 않고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평소에 잘 싸우는 동무들은 말빨도 세고 칭찬도 많이 받지만 그렇지 못한 동무들은 말빨도 서지 않고 냉대하는 측면도 있었다. 더군다나 부상을 당하여 전투에 동원되지 못한 동무들에게 대한 태도는 너무도 무성의 했다. 위에 열거한 측면들이 있었는가를 자아비판하고 앞으로는 뜨거운 동지애를 발양하겠다는 의지적 결심을 굳게 다지고 투쟁했다.

재산시에 내가 속한 단체나 부대에서 자수자가 발생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후 체포될 때까지 항일 무장투쟁의 치열한 불길 속에서 어떻게 동지애가 발양되어 한사람의 낙오자 없이 최후 승리를 구가 했는가를 밤이면 교양을 받았었다. 생사를 같이하는 투쟁 속에서 믿음과 신뢰를 굳건히 하고, 서로 밀어주고 앞서 잡아 주는 동지애로 더욱 결속을 다져주었다.

총체적인 결론은 무장투쟁에서 발휘되는 동지애는 조직적 사상적 결속을 다지고 투쟁의 불길을 치솟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오로지 혁명적 신념으로 오늘의 고난에 찬 투쟁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하며, 혁명적 신념이 없는 사람은 낙오자나 변절자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사상적인 무장을 튼튼히 해야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2021년 6월 10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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