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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1. 전남 영암 국사봉에 얽힌 사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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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5-17 12:01 조회1,1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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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1

전남 영암 국사봉에 얽힌 사연으로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영암 국사봉은 해발 604m이다.

영암국사봉은 갑오 농민전쟁 때 전투장이 되기도 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1945년 광복 후 빨찌산투쟁의 전적지의 하나다. 1950년 조국전쟁이 일어 난 전후에 적과 싸움에서 마지막 후퇴의 종착지점의 역할을 돈독히 해내었다.

영암 국사봉 산은 너무 펀펀해 갈대가 우거진 산으로 일상적인 투쟁의 거점은 아니다.

이 국사봉은 유명한 영암 월출산과 맞보고 있다. 그러나 월출산은 기암절벽이 많아 빨찌산 투쟁의 전적지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9.28후퇴후 잠시 초기에 영암군당부가 있다가 금정재 넘어에 아지트를 옮기어 투쟁했다.

장흥 무지개재 능선에서 바라보면 영암국사봉이 사람 한길 되는 갈대숲으로 덮여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1951년 2월 21일에 영광 불갑산 거점을 포기하고 장흥 유치내산으로 이동하여 동나주 다도면 도동리 도롱굴 마을에 지구당이, 골짝마을에 지구 사령부가 거점을 쓰고 있을 때다.

이 땅을 재 침략한 적들은 골짝 산간마을에 이르기까지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여 점령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때가 1951년 6월경이다. 적들의 하기공세에 지구당지도부와 지구사령부가 함께 12개 골짝을 거쳐 무지개재 능선에 올랐다.

이 때 적들은 계속 꼬리를 물고 따라 붙으며 추격해 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영암국사봉까지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사령부산하 14연대 무장연대가 있었으나 우리 후퇴 일행과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적들의 대대적인 추격공세에 거리 시간상 연락하여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당시 당 지도부와 사령부 합하여 무장 성원은 10여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비무장성원들이었다. 후퇴인원은 30여명 가까이 되었다. 그래서 추격하는 적들과 한판 붙어 싸워보지도 못한 체 영암국사봉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의 난관이 조성되었다.

그것은 지구사령관인 박정현동지가 다리에 퇴역(신경마비현상)이 나타나 한발자국도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업고 가다 팔다리 사지를 4사람이 들고 적들의 추격에 생사의 운명이 절정에 달한 때를 극복해나간 처절한 싸움의 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들이 내부 정탐을 통해 당지도와 사령부가 함께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악착같이 따라 붙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사령관동지를 여러명이 달려붙어 들고 가면서도 다리를 주무르기도 했으나 시간만 지연시켜 적들의 추격은 후방 감시의 총격에 바짝 따라 붙지는 못하였는데 국사봉 갈대밭에 다달아 한 길 되는 갈대가 우리의 정체를 감싸주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러나 적들은 악착같이 따라붙어 총격을 가하고 우리 후방 감시 전투원은 맞받아 총격을 가하고 있는 과정에 박정현 사령관 동지는 나 때문에 안전한 후퇴가 지연되어 피해를 당할 수 있으니 자기를 쏟고 무사히 일행들이 안전지대까지 후퇴하라 하면서 여러동지들의 부축을 마다하며 한동안 씨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동지들의 사령관동지를 목숨으로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꺽을 수는 없었다. 김용우 당위원장 동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령관동지를 끝까지 구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데 이의를 단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러다 시간은 석양으로 해는 기울어지고 갈대숲은 엄호의 빛이 되어 굽이굽이 돌고 돌아 영암국사봉을 면전에 두고 국사봉 중간까지 적이 따라 붙어 추격하던 것을 멈추고 후퇴하는 바람에 우리 후퇴 대열은 무사했다. 적이 추격을 멈추었을 때쯤엔 박사령관동지 다리도 후퇴하면서도 계속주물러서 정상으로 돌아 왔다.

그러니까 도롱굴마을에서 영암국사봉까지 가는 동안 하루해가 다 간 것이었다. 이는 장흥유치내산이 얼마나 넓은 것인가를 말해 주어 유격활동에 보탬이 많은가를 상징해 주고 있다.

박정현 지구사령관 동지는 그후 전남 빨찌산 총사령부 총참모장으로 발령나 화순 백아산으로 이동했다. 총참모장으로서 1951년 11월에 백아산 토벌에 침입한 적들을 물리치는데 전략전술가로서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아프게도 백아산에서 모후산으로 가는 한동산에 총지휘부를 두고 토굴에서 연대 간부들과 작전토의를 하는 과정에 적이 쏜 포탄이 토굴에 명중되어 연대간부들과 함께 최후를 맞게되는 비운의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박정현 동지는 구빨찌로서 용맹을 떨치기도 했으며 6.25합법 때 나주 군당위원장을 했으며 9.28 후퇴 후에는 영광 불갑지구 사령관을 거쳐 장흥 유치내산 제 3지구 사령관을 하다 전남 총사령부 총참모장으로서 투쟁 중 희생되었다.

남조선 빨찌산 투쟁에서 몇 안대는 전략전술가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으며 아버지도 도당 간부로서 지리산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부자가 지휘간부로서 이 땅을 침략한 미제를 구축하고 조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한줌의 흙으로 산화하여간 수많은 혁명열사들과 함께 조국통일의 길위서 영생하기를 기원하면서 영암 국사봉에 얽힌 사연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2021. 5/13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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