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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7. 빨찌산 투쟁에서 동지애는 어떻게 발휘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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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3-20 20:13 조회1,0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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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7.

빨찌산 투쟁에서 동지애는 어떻게 발휘되었는가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동지애란 동지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뜻을 같이하고 한 길을 걸어가면서 신뢰와 우정을 함께 가지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과정에 동지애는 발현된다. 그래서 사회진보와 조국통일운동은 동지를 획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투쟁을 통해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얻게 되고 이로부터 동지가 획득되면 조직을 이루어내야 한다. 조직이 일구어지면 투쟁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서 투쟁의 구체적인 방법 즉 투쟁전술을 채택하고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이 사회적 운동형태로 나타나 변화발전하면서 진보와 통일운동의 목표를 향해 한걸음한걸음씩 전진하는 과정속에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 빨찌투쟁속에서 동지애는 어떻게 발휘되었는가. 빨찌산 시절의 동지애는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적과의 치렬한 전투속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우선 조직적 사상적 단결이 되어야 투쟁을 성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조직적 사상적 단결을 위해서는 사상학습을 통하여 배워야한다. 배운만큼의 실천투쟁을 통해 구현시켜야한다. 구현되는 만큼 성과물로 나타난다. 그 성과물은 양이 적던 크던 실천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보고 투쟁을 구체적으로 평가받게 된다.

빨찌산의 일상적인 생활은 상황에 따라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에 유동성이 많다. 그것은 적들이 산상에 주둔하고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다르다. 적들이 기어 올라와 고지 능선을 주둔하고 있을 때나 없을 때나를 막론하고 불침번과 동초는 반드시 세우고 새벽 정찰을 반드시 한다. 이는 일상화 되어 있다.

적들이 주둔해 있을 때는 동초, 전방보초, 후방보초를 세우고 새벽에 전후방 정찰을 파견하여 부대 대렬을 안전보장한다.

그런데 매일 전투하고 밤 행군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부대성원들이 아무리 젊은 성원들이라 하지만 피로가 쌓이고 쌓이면 행군할 때마다 좀 쉬었다하면 졸음이 와 앉자마자 코를 골든가 잠에 녹아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동지애를 발휘하는 동지도 있었다.

이런 때 자기의 피로를 딛고 오는 잠을 극복하면서 동무들을 대신하여 보초를 서면서 티내지 않고 동지들을 쉬게 하는가 하면, 저녁에 모두 곤한 잠에 떨어져 있는 상태속에서 특히 한밤중에 보초를 서고 있는 동지가 곤한 잠에 떨어져 있는 동지를 깨우지 않고 20-30분을 더 서준 동지도 있었다. 본인은 자고 일어나서야 알게 돼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모른다. 이런 때는 적들이 없고 동초만 섰을 때이다. 사실 동초는 전후방 보초 교대를 시간맞게 깨워서 교대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리고 밥솥에 밥을 해먹게 되는 경우는 취사반 성원들이 알아서 취사할 화목까지 준비하여 무장투쟁하는 동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게 되어 있지만, 그 누적된 피로속에서도 자기 총을 메고 주위 나무밭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화목을 한다발씩 해서 불지피기 좋게 가지런히 잘라서 한다발씩 묶어 가져다주는 것도 항상 수고하는 취사반 동지를 위해 발휘되는 동지애였었다.

밥솥에 해놓은 밥을 각자에게 나누어 줄 그릇이 없어 양판대기나 배자치에 퍼서 몇 동무씩 함께 먹을 경우가 많다. 배고픈 조건에서도 한 숟갈 덜 뜨고 옆 동지보고 남은 밥을 다 들라고 수저를 놓고 일어나는 뜨거운 마음도 동지애의 발현이었다.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과정에 동지애의 최고 형태는 동지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바치는 것이었다. 그런 동지애가 진짜동지애였다.

전투 중 적탄에 맞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당하여 곤경에 처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서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들어가다 희생되는 것을 보고서도 구출을 위해 뛰어들어가 짊어진 배낭에 수발의 총탄자국을 남기면서 결국 구출해 내는 동지도 있었다.

산상에 적 주둔지를 튼튼하게 쌓아올린 보루대를 공략하기 위해 적의 화구를 막거나 부숴야 함락될 수 있는 조건에서 전투성원 중에서 자발적으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자원하는가 하면 1-2-3차돌격전에 들어가다 쓰러진 시체를 딛고 적화구를 무력회시켜 함락시키는 전투속에서 발휘되는 동지애도 있었다.

이러한 동지애로 뭉쳐진 무장부대는 위훈을 날렸고 그렇지 못한 부대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적들의 포위속에 사선을 뚫고 나가는 경우 적구 정찰을 해가면서 전진하는 그속에서도 내가 앞장서 나가겠다고 자원하여 나가다 적탄에 맞아 희생되는 것을 보고서도 또 다른 동지가 앞서나가겠다고 하여 전진해 나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동지애가 아니고는 헤쳐나갈 수 없었던 위기의 국면도 다반사였었다.


1950년 9. 28 후퇴 시기 북상하는 인민군대 여단장 000동지는 북상도중 며칠을 굶은 채 행군중에 배가 고파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분산 후퇴를 하며 본부대를 찾아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밤에 여단장 연락병이 단신으로 인근 마을에 내려가 먹을 것 한줌을 구해가지고 본 아지트에 와서 여단장에게 바치었다고 한다. 연락병은 자기 입에 넣어도 차지 않는 구해온 양을 바치었는데 여단장은 자기먹을 것은 먹고 가져온 줄로만 알고 우선 배가 고파 먹고 나서 알고 보니 그 연락병은 너무 적어서 참고 여단장동지를 위해 바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비판에서 “나는 여단장 자격이 없고 연락병이 진정 여단장 자격이 있다"고 고백했다는 소식을 감옥에 한방에 있으면서 듣게 되었다. 이 사실도 뜨거운 동지애가 아니고는 발휘될 수 없는 것임을 참고로 올린다.

전쟁 전후 시기 빨찌산 투쟁에서 발휘된 동지애는 항일 무장투쟁에서 발휘된 혁명전통을 거울삼아 직접투쟁속에서 단련된 동지애로 승화하여 일심단결을 일구어낸 것이었다.

오늘날 미제의 압살책동속에서 조선의 일심단결로 뭉쳐진 힘은 핵무력보다 강하다. 저 미제 이리떼들의 핵무력의 공포와 위험속에서도 반제 반미 자주화 정신으로 철석같이 하나된 단결투쟁을 본다. 우리들도 오로지 활활 타오르는 횃불처럼 뜨거운 동지애로 미제를 타승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2021. 3/17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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