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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28. 빨찌산 매복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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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1-19 08:45 조회9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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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 한다 28

빨찌산 매복전에서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전남 백운산에서 유격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이다.

1954년 1-2월 사이다. 눈도 많이 와서 산야가 눈으로 쌓여 있고 거센 찬바람에 부딛치는 눈발에 눈을 뜰 수 없고 손가락이 시리어서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맹추위 속에서 따리봉 너머 간전골 중턱에 이동해 온 지 하루만에 매복전을 펼쳤다.

매복전술은 항일 빨찌산 투쟁 전술 중 기본핵심중의 하나다.

적아 간에는 준비태세 없이 매복을 당하면 당황하게 되어 손 쓸 사이 없이 당하게 되어 많은 피해를 보게 돼 있다.

매복전은 적을 시야에서 내 앞쪽으로 당기면 당길수록 피해 없이 백전백승할 수 있다. 그러나 멀어질수록 적구는 당해도 본부대의 빠른 동작으로 재진격해 아군의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복전에서 피해를 입었다하면 거리관계를 무시했거나 노획품을 많이 하려 했거나 이 두가지 중의 하나이다.

우리 전남부대는 매일 밤이면 빨찌산 전술토론을 갖기도 했다. 필자는 매복의 명수란 칭찬도 받았다.

그곳의 지형지세는 따리봉에서 섬진강쪽으로 뻗어내린 중바위등 능선이 있다.

1월 초순에 소위 토벌대 5명이 중바위등 능선을 타고 따리봉까지 정찰을 하기 위해 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매복전을 결정했다. 간밤에 내린 눈은 그대로 족적없이 산야에 덮어 있었다. 적들은 올라 올 때는 거리보장을 해서 앞에 총을 하고 따리봉까지 갔다가 오른 길로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 올 때는 아무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맘 놓고 총은 메고 5명이 거리보장도 않고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앞만 굽어보고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전남부대는 이런 호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5명의 소조가 중간에 매복지점을 선택하고 맨 앞에 조그만 바위들 새로 보이는 곳에 엎드려 발사하면 집중 사격하기로 했다. 기다리는 중 5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첫발 총성과 함께 집중 사격을 가했다. 맨 뒤에서 내려오던 적만 살아나갔다.

뒤에 올라오는 적정은 없기에 맘 놓고 총 실탄 옷 신발등을 노획하고 무사히 진지로 돌아왔다. 진지 그 자리에서 하루밤을 자고 적정을 보니 그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간 놈이 알려주었던 것인지 이튿날 11시경에 포성을 울리며 기어 올라와 매복지점까지 다다랐다.

간밤에 너무도 눈이 많이 와 모든 족적은 눈에 묻히었다.

그들은 주위 골짝에 포와 기관총 사격을 가하면서 땡땡 언 시신을 수습해서 내려가고 말았다.

연이어서 백운산 상봉능선에서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 800고지에서부터 상봉까지 오른 적들은 다시 한재 민세등까지 전선을 펼치려고 지나갈 것을 짐작하고 진상골에서 상봉능선을 넘는 지점에 매복전을 전개했다. 이곳은 바위 너들강들이 많아 적구 한명밖에 칠 수 없었다. 적구는 선두와 약 5m정도 간격을 두고 앞에 총하며 오고 있고 그뒤에 본부대가 행군해 오고 있었다. 바위를 엄폐물로 삼아 시야 가까운 거리에 오는 것을 거꾸려뜨리고 총과 실탄만 노획하고 백암골로 후퇴했다.

또 연이어서 다합마을 옆 쑥쟁이 골로 추수사업을 나가서 다합에서 쑥쟁이로 오는 도로가에 조그마한 똥섬처럼 된 봉우리에 올라 정의영 동무를 데리고 중초선에서 다합마을을 감시하고 있는데 야간에 주둔한 토벌대는 2명이 쑥쟁이마을 앞도로를 따라 순찰을 하기 위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모퉁이 돌아와 가까운 시야에 나타나자 발사했다. 두놈 중 한놈만 꺼구러지고 한놈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기에서 총과 실탄을 노획하고 추수사업을 접고 진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위의 세군데 매복전이 체포된 후 적들에게 발각 되어 1954년 4월 28일 남원고등군법에서 사형언도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럼 어찌하여 적들이 알게 되었는가.

우리전남부대는 당시 1중대와 3중대 밖에 없었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김원섭이란 20대 후반의 청년이 있는데 입산 후 광주 무등산에서 잘 싸워 무등산 부대 부대장까지 했고 용사칭호를 두 번 받은 용사였었다.

당시 도당위원장이었던 김선우 동지는 잘 싸운 동지 김원섭을 간부보존 원칙에 의하여 큰 산인 백운산으로 이동시켜 전남부대 3중대 부중대장의 직함을 갖고 투쟁하게 했다.

이때가 바로 1953년 10월이었다. 그러니까 10월부터 1954년 2월까지의 부대행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전 행적은 모르고 있었다. 그자는 1954년 2월 20일 전남부대가 옥용골에서 국군 5사단의 토벌공세에 전멸할 때에 생포를 당했다.

그자는 자기 빨찌산 행적도 있고 해서 살아나기 위해서 이용당하는 과정에 전남부대 1중대 성원들의 행적을 밀고해서 들통이 났다. 이로말미암아 중대장은 군법에서 무기형을 받고 광산사는 김재복동무는 10년을 받아 전주감옥으로 넘어갈 것인데 이 밀고 건으로 다시 재판을 받아 1중대장 권영용 동지는 사형을 받고 김재복 동무는 무기형을 받았다.

권영용동지는 합법 때 강진군당 당책과장을 하다 9.28 후퇴 후 지리산 도당학교에서 공부중 제1차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속에서 살아남아 1952년 4월에 지리산 전투지구당부 조직지도원으로 투쟁했다. 1953년 1월에 백운산으로 이동하여 도당 88건위대 문화부 중대장을 했다 전남부대로 편성될 때에 2중대 문화부중대장을 했다.

우병철 중대장의 중상으로 권영용 동지는 1중대 중대장을 하다 1954년 2월20일 옥용골에 생포되었었다. 결국 1중대장은 사설변호사까지 대었지만 1954년 12월 24일 대구 수색사형장에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총살 집행되는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고 말았다.

권영용동지는 필자의 조선노동당 입당 보증인이기도 했다.

필자는 소년수였기에 무기로 감형되어 장구한 비전향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대내 밀고자에 의하여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고 있어 아무리 잘 싸워도 체포된 후 고문투쟁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자기일생의 총화가 된다는 것을 -----...

2021년 1/15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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