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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23. 버스 정차 기습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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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2-30 17:44 조회8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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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 한다 23.

버스 정차 기습전에서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때는 1953년 8월 20일경이었다.

전남 광양읍에서 진상면으로 오는 기동로인 다합면 다합마을 앞 도로이다.

백운산 전남부대는 소조투쟁을 하고 있는 과정에 빨찌산 토벌을 하기 위해 광양읍에서 진상면 소재지까지 번질나게 군용차량 등이 다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소조투쟁을 세웠다.

당시 진상면 소재지에 백운산 빨찌산 토벌대들이 일상적으로 주둔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백운산 깊숙이 토벌에 올라와 고지 능선을 점령하고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원래 기동로 매복작전은 매복지의 지형지세와 후퇴로를 감안하여 매복작전을 펼친다. 그리고 매복지에서 기습작전 시간과 안전지대까지 시간을 충분히 고려하여 매복지를 선택한다.

우리 소조 5명은 다합마을 앞 도로에서 마을 쪽으로 70-80m거리에 있는 약 2-3평정도 삼밭을 선택하였다. 사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도 안되고 매복지에서 적들의 군용차량을 적어도 100-200m에서 확연히 발견할 수 있는 위치이어야 한다. 이때 매복지를 선택하기 위해 초저녁부터 주위 정찰을 충분히 하고 삼밭을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백운에는 적정이 없었고 진상면소재지에 한 개 중대세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군용차량이 번질나게 다니고 있었는데 이 때 때리면 좋기는 한데 시간적으로 해질녘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적과 전투시간이 길면길수록 불리한 조건에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오후 3시 넘어서 오는 군용차량을 선택하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날샐 무렵에 5명이 배를 깔고 삼밭대 사이에 대기하고 있었다

소변도 누워서 보기도 했다. 날이 새자 마을 민들은 물꼬를 보고 왔다갔다 하면서도 우리는 일거수 일투족을 다 훑어보고 있는 데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논두렁 길을 따라 다니고 있었다.  우리들은 최고의 경각성을 높이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렇게도 뻔질나게 다니던 군용차량이 오후 한시 후는 드문드문 다니고 있는데 여유시간이 너무 길어서 3시 이후에 오는 차량은 무조건 때리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4시 후에사 버스 한 대가 오는 것을 보고 이거라도 때리기로 결정하였다. 혹시 허탕칠 것을 예상해서 우리 5명은 일제히 일어서서 마을 앞 길을 따라 도로변에 도착해 양 도로변에 앞에 총하고 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복장은 국군 복장이었다. 총은 칼빈과 m원 총들이었다. 필자는 m원 총을 매고 있었다.

드디어 손을 들고 버스를 멈추게 했다. 우리는 국군이다 징병기피자를 잡기 위한 것이니 차에서 모두 내리라고 소리질러 말했다. 차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때 우리는 노골적으로 "우리는 백운산 빨찌산들이다. 한 사람이라도 명령에 불복하면 즉각 총살하나 순순히 응하면 절대로 죽이지 않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하면서 차레대로 사람들을 내리게 하였는데 알고 보니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휴가 나온 장차 경위될 경찰관이 7명이고 휴가 나온 군인이 한명이었다.

다 내린 후 차안을 수색해보니 의자 밑에 숨기고 나온 휴가병 칼빈 한 자루와 실탄 2케이스를 로획하고 경찰관들에게 입은 복장은 우리가 필요하니 벗어달라고 말하니 모두가 자발적으로 벗어주면서 목숨만 살려달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이 때 우리는 절대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무사히 돌아가서 경찰을 하더라도 절대로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하지말기 바란다. 민간인들은 모두 가라고 했다.

생포한 8명만 남겨놓고 잠깐 그들을 교양한 후 가라고 했다.

우리 소조는 있는 힘을 다하여 벼논을 짓밟으며 직선길로 마을 뒤산 능선에 도착했다.

들판에 논일을 보던 민간인들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버스를 정차시키고 일을 본 다음 뒤능선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신출귀몰한 빨찌산들이라고 혀를 차며 말을 했다는 여론을 후에 듣기도 했다

더구나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간 경찰들과 군인은 천만다행이었다는 여론을 듣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백운산 800고지 밑 골짝에 도달해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상면 소재지에 주둔한 토벌대 1개 중대가 우리가 통과해야 할 고지 능선에 능선을 타고 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까맣게 올라오고 있었다.

도저히 적들보다 먼저 고지를 점령할 수 없어 고지 중허리를 타고 돌아 건너편 골짝 중허리에 도착해 숲속에서 로획한 물품들을 정리하고 한 숨을 돌린 후 능선에 나타나 적들을 향해 몇 방 갈기고 안전지대인 800고지 밑 중허리에 도착했다.

적들은 고지를 먼저 점령한 후 우리 소조의 정체를 발견하려고 고지 능선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먼저 총성을 울리니 고함을 지르면서 사격을 가하다가 해는 서산에 기울어지고 있어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번 소조투쟁은 야지 투쟁에서 그것도 백주 투쟁에서 무사히 마쳤으며 절대로 빨찌산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여론을 확고히 심어 주었다. 적과의 투쟁에 있어 전투 과정에는 네가 죽으면 내가 살고 내가 죽으면 네가 사는 불가피한 전투가 아니고는 생포한자는 한사람도 죽이지 않는다는 것과 심지어 부상 생포자도 부상을 치료하여 돌려보내 준다는 것을 실제로 홍보하는데 소조투쟁의 의의가 있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백운산 진상골짝에는 소령트도 있었다. 앞서 백운산 부대가 군용차를 습격하여 소령을 생포해 부대 진지까지 데리고 와서 친절하게 대우해 주고 교양한 다음 살려서 돌려보내 준 아지트를 소령트라고 명명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20. 12/28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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