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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1. 금수산 골짝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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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1-23 09:40 조회1,2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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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회고한다 11. 금수산 골짝의 눈물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때는 1951년 2월21일이었다. 금년들어 눈도 많이 왔다.

당시 불갑산에서 21일 새벽 2시에 불갑산 2.0작전을 앞두고 서나주 금성산으로 지구당부 성원들을 류석우 부위원장동지가 책임을 지고 후퇴 길에 올랐다.

이 때 지도부는 땅밑에 파놓은 아지트가 있어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당시 입산한 우리 부모님과 여동생 둘(11세,13세) 그리고 이웃집 신대양반 부부와 손자 서점수(7세) 등 두 가족은 불타버린 구들장 위에 칸막이를 하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두집 식구들의 먹는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고 있었다.

적정이 있을 때는 불갑산으로 입산한 무안군당이 우리부모가 기거하는 함평 해보면 광할리 오도치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지구당위원장의 레포를 군당부에 전하고 또 받아오는 련락사업을 하고 있었다.

때때로 적들이 침공해 들어 올 때는 군당부에 가는 길에 잠간 들려서 오늘은 어느 지점으로 가서 산상대기하라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침공해 들어오는 적들의 집중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새벽 두시에 오도치마을을 지나 오도치재를 넘어 대동면과 나주 남평면을 통과하여 안전한 지대인 나주 금성산으로 이동했었다.

이때에 우리가 통과하는 길목에 미리나와 대기하고 있다가 만나서 빨리 일행의 뒤에 따라오라고 알리고 일행은 쏜살같이 달리다 시피하면서 행군을 강행했다.

당시 나는 이불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사실 이불짐은 가볍기는 해도 둥치가 커서 바람을 많이 타고 있었다. 행군중에 바람을 등질 때는 바람의 힘을 받아 달리기 쉬었으나 바람을 받으면 행군할 때는 얼마나 무거운 느낌을 받고 양쪽어깨가 뻐근하게 아플정도였다.

중도에 잠간 쉴 때 대인 동지들에게 바꾸어 짊어지고 가자고 제의해도 들어주는 동지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무거워도 자기책임완수를 위해 금정산 안전지대까지 무사히 짊어지고 왔으나 불갑산에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불가피적으로 동나주 국사봉 밑에 있는 금덕마을에 오는데는 그 이불짐은 금성산에 버리고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땀흘리면서 가저온 이불을 지금도 생각하면 한치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부모님과 이웃집 할아버님식구들은 젊은 사람들의 빠른 행군속도를 같이할 수는 없어서 나주 남평면 금수산 기슭에 도착할 즈음 날이 부연이 새 잠간 휴식에 들어 갔다. 인원을 점검해 보니 우리 부모님과 이웃집 할아버님 식구들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오다 어디에서 떨어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여동생 둘은 내뒤를 바짝 따라와 함께할 수 있었다.

이윽고 다시 출발하면서 살아만 계신다면 언젠가는 만나는 그날까지 무사하기만을 고대했다.

우리일행은 드디어 금성산 골짜기 안전지대까지 가서 여장을 풀고 밥을 지어먹으며 마침 적정이 없어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

다시 불갑산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락 온 정보는 다시는 불갑산에 돌아갈 형편이 못되어 그렇다고 금성산 야산에 진지를 구축할 수도 없었다.

비트에 남아 불갑산 정황을 살핀 김용우 지구당 위원장 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이날 밤으로 유치내산 동나주 국사봉 및 마을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유치내산 지구는 반해방구를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출발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부위원장 동지는 나를 불러 “어떻게 하려고 여기까지 두동생을 데리고 왔는냐 하면서 오늘 밤에 불갑산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유치내산으로 이동을 하는데 영산강을 건너야 하고 적들의 매복지를 뚫고 나가는 강행군을 하기 때문에 어린동생은 죽음을 당하니 이아래 내려가면 인민마을이 있으니 거기다 맡기고 살아 있으면 부모님과 만날 수도 있으니 같이내려가 맡기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두동생에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울면서 죽어도 좋으니 오빠따라 가겠다고 애원하고 있었다. 이런 실랑이를 거듭하는 과정에 저녁밥이 날아왔다. 밥은 먹지 않고 울기만하는 것이었다 옆에 있는 동지들은 쩝쩝 입만 다시고 안타깝다는 표정만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겪는 16세의 소년나이로서 대책이 망망하기는 마찬가지었다. 나도 생소힌 지역에 와서 동생을 인도해 줄 사람도 없이 전적으로 내자신이 해결할 수 밖에 없는 마당에 나자신 해결할 능력도 없으니 이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은 가고 동생들은 울기만하고 있어 나도 동생들과 함께 밥 한술도 뜨지 안고 부등켜 않고 소리없는 눈물을 처음 흘리기도 했었다.

드디어 해는 져서 골짜기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대렬은 출발준비를 위해 한군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 때 부위원장동지는 지금까지 해결하지 않고 뭐했는가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예 알았습니다 라고 답변하면서 일시적인 서운함까지 들었던 것 사실이다.

그러나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드디어 출발명령이 떨어젔다 이때 “혁명가는 가족에게 얽매이면 투쟁할 수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야 한다고 평소 교양을 받아왔기에 이럴 때 내리는 것이 혁명투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가 혁명전선에 나설 때 맹세했던 투지를 보일 때가 바로 이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렬 마지막에 출발하면서 ”들어라 너희들은 오빠말을 듣지 않았다 살고 죽는 것은 너희들 운명에 맡긴다. 이젠 이 꼴짝에서 죽든 살든 나는 모른다 만일 내뒤를 따라 온다면 내손으로 너희들을 죽일 것이니 그리알아라 하면서 쏜살 같이 대렬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후 오랜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사연은 이렇다.

그날밤 두동생은 골짝을 빠저나가 불갑산 오도치마을에 들어 갔는데 토벌대들이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다시 금수산 골짜기에 들어왔다 부모님과 오빠를 부르며 울면서 골작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마침 서나주 군당부가 금성산에 아지트를 쓰고 있어 연락원이 연락사업갔다가 아지트로 들어오는 중 어떤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조우하게 되었다. 동생들의 자초지정을 듣고서야 마침 나주본양마을에 살고 있는 큰누나의 `시동생이 군당연락원으로 있어서 연락과 아지트까지 무사히 데리고 시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하루밤 무사히 자고 밤에 큰누나집으로 무사히 피난해 있다가 고향에서 살아 계신 부모님과 상봉을 하게 되었다.

우리부모님은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

불갑산에서 금성산으로 후퇴할 때에 노인들이라 쏜살같이 강행군하는 대렬을 뒤따라 올 수 없어 중간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작전지역을 빠저나왔기 때문에 살아남았던 것이다 .

살아남은 우리부모님은 혹시 나를 만나려고 불갑산 기슭마을들을 얻어먹어가면서 이마을 저마을 다 돌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일년 후에 고향에 돌아와 동생들과 상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체포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총에 맞아 죽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고 생포자들이 말을 해서 죽은 것으로 단념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고향 떠난 40년만에 고향을 찾았으나 그 때 산사람들은 다 학살되고 새로 자라난 세대들만 살고 있어 고향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동생들과 40년만에 상봉했을 때, 금수산의 어두운 밤 오빠와 헤어지던 그날이 평생 잊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살아남은 것도 전회위복으로 생각하라고 위안하기도 했다. 우리 가족의 일면적인 비극사는 미제에 의해서 갈라진 조국분단에서 온 비극적인 참상이기 때문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미제를 하루라도 빨리 몰아내는 길만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임을 *****...

2020. 11/22         김영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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