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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대구지역에 묻힌 통일애국투사들을 찾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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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1-03 09:12 조회1,0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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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이 전국묘소답사반의 일원으로 대구 지역에 묻힌 애국투사들의 묘소를 답사한 후 추모글을 페이스북을 통하여 알렸다.  그의 제 2차, 3차, 4차로 이어진 글을 함께 올리며 후세들이 조국통일의 길에 한생을 바친 이들 애국투사들을 소중하게 기억하기를 바란다. [민족통신 편집실]


<제2차> 대구지역 네 분의 묘소 참배

(2020.10/31 대구지역)) 전국묘소답사반


불굴의 애국투사인 송병록 동지를 추모하면서

송병록 동지는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다.

19세에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반미 투쟁으로 인천감옥에서 복역했다.

1950년 조국전쟁 때 출옥하여 북상하였다

양강도 산림대학을 졸업하고 당 기관에서 근무했다.

1969년 박재원 동지와 함께 내려 왔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고

1972년 8월15일에 서대문 감옥 사형장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불굴의 투사인 송병록 동지시여!

조국과 인민의 부름에 한걸음으로 달려와 사선을 뚫고 내려와 비록 뜻은 이룩하지 못했지만 조국의 재단에 바친 동지의 희생은 청사에 빛날 것이며, 대를 이어 아로새길 것이니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길이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태규 동지를 추모하면서

김태규 동지는 출옥 후 대구에서 생활하다가 운명했다.(이력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남김을 받은 사람도 아직은 없다. 앞으로 알게 되면 발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기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우선 1950년 조국전쟁 발발 직전에 해주에서 37명의 유격전사들이 배를 타고 남하 하다가 배고장을 수리하기 위해서 중국 상해로 가서 약 1개월 동안 지체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지체가 되어 불평하는 대원들의 눈치를 채고 떠났는데 망망대해에서 또 한달간 있으니 가진 식량이 다 떨어져 배고품을 느끼고 있는 대원들의 마음을 읽고 영광군 염산면 바닷가에 정박하고 상륙했다. 성원중 책임적지위에 있는 동지의 누이동생이 사는 집을 찾아가 우선 밥을 시켰는데 누이 남편이 신고함으로서 군경 부대들의 포위 작전속에서 37명 중 7명만이 살아 1950년 7월23일 해방을 맞이했다. 나머지 30명은 모두 희생되고 마는 아픈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고 전방보초에 나간 두 동지는 “만일 적정이 나타나면 자폭으로 신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초를 서다 적정이 나타나자 실제 자폭으로 알리는 신호를 남기고 한줌의 흙으로 산화하여간 동지들을 생각하면 일생을 밤잠을 설치고 있다는 현재까지 살아남아 건강상태가 오늘 내일하고 있는 할머니의 말씀이다.

김태규 동지도 살아남은 7명 중 한 사람이었다. 현재 살아 있는 분은 임복현 할머니 뿐이다.

1952년 지리산 빨찌산 투쟁속에서 아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이현상부대는 총참모장이 전사한 후 박종하 부대와 김지회부대로 명칭을 따서 부르고 있었다.

따라서 김태규 동지는 김지회부대 부대장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적과의 투쟁속에서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자 결국에는 박종하부대는 없어지고 김지회부대만 남아 1953년에 해산되었다. 그후 김태규 부대장은 제 5지구당 특수부대장으로서 지도부를 보위하면서 소조투쟁을 전개했다.

1953년 여름에 빨찌산 토벌에 올라와 꽃대봉 (지금지도상에는 토끼봉) 능선에 진을 치고 있는 서남지구 경찰대 일개 대대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제 5지구당이 빗점골의 왼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였다.

김태규 소조는 국군으로 가장하고 백주에 능선에 올라 꽃대봉(지금은 토끼봉)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이 토끼봉에는 경찰대장이 있었다. 우리 인원은 부대장과 대원2명이 함께했다.

눈치를 챈 경찰대장과 대치국면이 조성되었다.

이 때 우리는 총구로 겨누고 있고 경찰대장은 허리에 찬 권총을 빼려고 손이 가면 김태규부대장은 빼든 권총으로 쏘겠다고 위협하는 광경이 벌어 젔다. 더 이상 지체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옆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동지들에게 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도 위협주려고 하는 것만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느 순간 위험함을 알아차리고 경찰대장을 향해 발사했다. 드디어 넘어지면서 자기 권총을 빼들고 쏜 것이 태규동지 눈을 통과했다.

그래서 한촉 눈이 실명되고 마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능선에 진을 치고 있던 전투 경찰대를 생포하여 무장을 해제시키고 토끼봉에 올라간 부대장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부관 (이현상동지 안전을 책임진 여수14연대 출신) 동지는 고지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포로들을 모두 돌아가라고 풀어주었다. (총은 이미 다 회수하고 있었음)

이의 투쟁의 전과는 당시 빨찌산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후 김태규 동지는 체포되어 남원수용소에 있다가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주감옥으로 넘어갔다.

그후 비전향을 고수하지 못하고 여러 감옥을 거쳐 출옥해 대구에서 생활하다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김태규 동지시여!

동지의 파란만장한 생을 돌이켜보면 우리의 투쟁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암흑속에서 비쳐주는 한줄기의 빛과 같아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다 보니 때론 방황도, 지체도, 하지만 초심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단 일관되게 관철하는 과정에서 끝맺음을 맺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아쉬움으로 남는 것 어찌할 수 없군요 이젠 지난날의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영생하기만을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 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이학돌 동지를 생각하면서

이학돌 동지는 1927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다.

1930년 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미군에 의해 건국 간부교육을 받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귀가했다 (당시 18세)

해방을 맞아 국가 건국사업에 관심을 같고 조선 공산당 경북도당에서 활동하면서 46년 10월 대구 인민 항쟁에도 참여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 후 실시된 남북 총선거 청도지역 투표함을 해주로 이송하기도 했다.

그후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남으로 내려와 결혼하여 4남을 두었다.

1972년 통일혁명당 경상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8년의 형기를 마치고 1990년에 출옥했다.

출옥 후 아파트 관리원으로 근무하면서 6.15공동선언 대구경북본부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각종 집회나 기자회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드디어 2015년 12월 14일 88세를 일기로 운명하고 말았다.

이학돌 동지시여!

동지의 80여 성상을 회고 볼 때에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사회는 본질이 하나도 바뀌지 않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때 선배 열사들의 발자취따라 열심히 투쟁을 해서 75년째 둥지를 틀고 있는 미제를 몰아내 자주적인 통일 세상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것을 동지의 영전 앞에서 굳게굳게 다짐합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최동권 동지를 생각하면서

최동권 동지는 함북 온성군 훈융면에서 1937년 3월24일에 출생했다.

인민군 해군 경비대에 근무할 때 1964년 8월에 이미 남하한 공작원을 북상시키기 위해서 부산과 진해 사이 접선장소에 갔는데 적들은 이미 알고 매복하고 있는 군경과 총격전 끝에 일행 5명중 4명은 희생되고 최동권 동지만 부상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15년형을 받고 대전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1988년에 출옥했다.

출옥 후 대구 갱생보호소에 6개월 있다가 대구시 곽병원 보일러 시설에 취직하여 1997년 정년 60세까지 근무했다.

이 후는 여성병원 덕영치과 보일러실에서 4년을 근무하고 2014년에 간암이 발생하여 1년간 치료 받다가 2015년 8월 16일에 자택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시신은 화장 후 성주군 선남면 우성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최동권 동지는 곽병원에 근무할 때 결혼하여 1녀 1남을 두고 부인은 2014년 5월에 작고의 아픔을 겪었다.

고향 평양에는 부친은 일찍 돌아가시고 3남매가 살고 있다고 한다.

최동권 동지는 출옥 후 대구 범민련 양심수후원회, 민자통에서 활동했다.

평양에 있을 때는 나이가 어려 인민군에 입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이를 올려 인민군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최동권 동지시여!

조국통일 전선에서 생사를 같이 하던 금싸리기 같은 동지 4명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부상 생포당하여 적지에서 눈을 감을 때 까지 살면서 항상 희생된 동지들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동지의 심정을 동지들이 아니고는 알아주지 않겠지만 동지마져 적지에서 살아생전에 돌아가지 못하고 묻히고 마는 한을 살아 있는 우리 당대와 후대들이 잊지 않고 마음에 깊이 새기며 반미자주화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할 것을 동지의 영전에 굳게 다짐합니다. 모든 아픈 시름을 다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제 3차> 대구 납골당에 안치된 두 동지 참배

박재원 동지를 생각하면서

박재원 동지는 1930년 1월20일 경북 영천시 괴연동에서 소작농의 4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재원 동지는 고향에서 국민교를 졸업하고 1946년에 서울로 상경해서 덕수상고 야간부에 다니다가 1950년 조국전쟁을 맞이했다.

9.28 후퇴를 맞아 평양 강계를 거쳐 심양까지 피난했다.

심양에서 3년간 인민군 기술학교에 다녔다 그 후 자동차 부대 기술 교육을 받고 1953년에 평양으로 돌아와 인민군 기계화 부대에서 근무했다.

1956년에 제대하여 황해도 송림제철소에서 근무했다.

1959년에 결혼하여 딸 3형제를 두었다.

그후 황해도 인민위에서 근무하다 1964년에 중앙당에 소환되어 활동하다 1969년 송병록동지와 함께 내려왔다가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송병록 동지는 사형되고 자신은 무기형을 받고 대전, 대구등에서 복역했다.

그리하여 1989년 12월 24일 소위 성탄특사로 20년만에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1990년에 해직된 활동가에게 60연대의 공화국의 교육, 보건, 농촌기계화 현황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남산 대공분실로 불려가 8개월간 불법구금상태에서 고문을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었다.

2004년 장기수 제 2차 송환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하여 송환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었다.

2006년부터 6.15공동선언 대구경북 위원회 고문과 대구경북 진보연대 고문으로 활동했다.

드디어 2017년 9월 1일에 고문 후유증으로 송환의 뜻을 이룩하지 못한 채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남은 가족은 부인과 조카 여러 남매를 두고 있다.

시신은 대구 시립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박재원 동지시여!

동지는 가고 없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과 후대들은 동지가 이루지 못한 참뜻을 올 곧게 이어받아 안고 반미자주화 불길을 지펴갈 것이니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통일의 길위에 기리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남일만 동지를 생각하면서

남일만 동지는 1992년 5월 1일에 운명했으며 매장번호 0-0-757이다.

남동지는 공화국에서 내려 왔다는 것만이 운명한 후에 알게 되었을 뿐 이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언젠가 알게 되면 발표할 것임을 알려드린다.

그러나 매장번호가 있으니 찾아 참배해야 한다.

남일만 동지시여!

동지가 걸어 온 발자취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상태속에서 가셨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 금할 순 없군요.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동지의 걸어 온 발자국을 상상하고만 있을 뿐이니 어찌된 일입니까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지 궁금속에서 추모하는 마음 무어라 형언할 길이 없군요.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참고 @@ 대구묘소 참배는 마지막 한번 남았다.



<제4차> 마지막 대구지역 묘소답사를 올린다.

대구 현대 공원묘지에 이준원, 이학천, 송영길,김난열, 김종하, 이길환 동지들 6명의 유분이 합장되어 있다. 이동지들은 임종에서 자신들의 유분을 신념의 고향으로 송환해 주기를 유언한 동지들이다.

이준원 동지를 회고 하면서

이준원 동지는 1935년 1월 16일에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함주 상통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에 전념했다.

1953년에 인민군에 입대하여 서해 방어부대에서 근무하다 59년에 제대했다.

1959년에 방어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인민군 특수 정찰부대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때에 결혼도 해서 딸 하나를 두었지만 홍역으로 잃고 마는 아픔도 겪었다.

1963년 5월에 대남 사업에 동원 돼 남으로 내려왔다가 북상 중에 체포되고 말았다.

15년형을 받고 대전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감 와서 살다가 1979년 1월25일에 출옥했다.

출옥 후 목공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6월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었다.

아들 며누리까지 보고 손주까지 두었다

이 동지는 6.15공동위 경북본부와 진보연대, 평통사 등에서 고문으로 있으면서 사회진보와 반미 자주화 투쟁에도 열심히 하다 2017년 8월 7일에 살아생전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애석하게도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은 일차 송환 명단에 오르지 못한 자책속에 제 2차 송환 명단에는 올라 있으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처자식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을 품고 눈을 감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운 이준원 동지시여!

출옥 후 생사를 같이했던 동지들과 함께 신념의 고향으로 올라가지 못한 죄책감속에서도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자주 통일 운동에 몸을 담고 투쟁속에서 떠난 동지의 한생은 살아 투쟁하는 우리 후대들에게 마지막 생을 어떻게 장식해야하는가를 산 역사적 교훈으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송영길 동지를 생각하면서

송영길 동지는 1929년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했다.

조국전쟁시기에 충남 대둔산에서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종하 동지와 함께 도당 위원장인 박우영 동지 보위 부대서 투쟁했다.

최동지는 충남 마지막 빨찌산 성원으로 종하동지와 함께 투쟁하다가 1955년 1월에 천안에서 체포되었다. 이 때 신출귀몰한 소조 투쟁으로 신문지상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약 25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여 건강이 극도로 파괴되어 몇 년동안 마이홈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2009년 3월 14일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송동지는 몸의 허약성으로 사회진보와 반미자주화 투쟁에도 민할하게 동원되지도 못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송영길 동지시여!

출옥 후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송동지의 생활을 회상에 볼 때 우리의 투쟁에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가를 재 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초심을 잃치 않고 마지막 한 생을 장식한 것은 표본으로 남아 있으며 홍동지의 빨찌산 투쟁 업적은 조국의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니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이학천 동지를 생각하면서

이학천 동지는 1928년 1월 15일 평북 용천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하던 큰형님의 영향을 받고 항일 자금을 전달하기 위하여 만주까지 오가기도 했다.

1950년 조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입대하여 최 전선에서 적들과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9.28후퇴를 맞았다.

북상하지 못하고 덕유산으로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던 중 전북 회문산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1952년 8월 또다시 부상을 당하여 의무과 아지트에서 치료 받던 중 적들의 토벌 수색작전에 걸려들어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에서 20년 형을 받고 대전, 대구, 김천 등 감옥에서 16년을 사는 과정에서 1960년 10월 감형을 받고 1969년에 출옥했다.

출옥 후 목수노동자로서 전국을 돌며 주택건설사업하면서 1973년에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 과정에 박정희 군사 팟쇼정원은 1975년에 세기의 악법인 사화안정법을 제정하여 비전향자들을 비전향을 이유로 감호처분을 시켜 청주 보안감호소에 수감시켜 징역아닌 징역 무기아닌 무기로 끝도 한계도 없이 구금시켜 전향강요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이학천 동지는 축농증으로 입안에 고름이 차서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위중한 환자를 치료는 고사하고 전향강요만 당하고 있었다.

이학천 동지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굽히고 1980년에 출옥했던 것이다.

출옥 후 동지는 대구 지역 각종 기자회견이나 집회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하여 젊은이들을 겪려하기도 했었다.

이학천 동지는 2010년 1월에 담도암 판정까지 받아 몇 번의 수술에도 효험없이 드디어 2010년 9월 12일 오후 5시34분에 꿈에도 그리던 신념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이학천 동지시여!

조국전쟁시기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적들의 모진 탄압을 받으며 끝까지 극복해야할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복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 마지막 죽음까지 올곧게 살다간 동지의 한생을 반추해 보면서 우리 후대들이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는 것이 역사의 부름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길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 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난열 여성동지를 생각하면서

감난열 여성동지는 1926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조국전쟁시기 9.28 후퇴 때 북상했다.

1957년에 남쪽으로 내려 와 1959년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 받고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다 1966년에 가석방되어 대구에서 생활하였다.

남쪽에 시댁식구들이 살고 있으나 두려운 공포를 느껴 만남이 이뤄지지 못한 체 드디어 2001년 5월2일에 복막염에 걸려 대구 곽병원에 입원하여 수차의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2개월간의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2001년 7월 2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공화국에는 남매를 두고 있다고 한다.

김난열 여성 동지시여!

단편적이나마 여성동지의 한생을 되씹어 볼 때에 특히 여성전사로서 겪는 말 못할 고통만을 생각하더라도 이 모두가 일제에 이어 점령통치하고 있는 미제를 하루라도 빨리 몰아내고 남녀 평등세상을 쟁취하는 것만이 지름길임을 재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잊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길이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태수 동지를 생각하면서

김태수 동지는 1927년 12월 15일에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 어려서 부터 공사장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태수 동지는 공사장 막노동에 잔뼈가 굵어지다시피 노동에 종사하다

1950년 조국전쟁을 맞이했다.

1950년 7월에 인민군에 의하여 해방을 맞아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전선에 동원 되었다 9.28후퇴를 맞이했다.

그리하여 북상하지 못하고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했다.

1952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제1차 토벌공세에 의하여 2월에 체포되었다.

52년 6월에 무기형을 받고 대구 대전 등에서 복역 했다.

1960년 10월에 15년으로 감형을 받아 1967년 8월에 만기 출옥했다.

1971년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2000년 2월에 제 2차 장기수 송환 촉구 기자회견에 참가하여 송환의 뜻을 강력히 밝혔다.

그러나 송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3년 3월 19일 오전 6시경에 운명하고 말았다.

김태수 동지는 우리 동지들 내에서 3태수라 불리었다.

동북 태수, 선산태수, 익산태수 등 동지들이었다.

그런데 이 3태수는 다가고 없다. 그러나 이름은 남아 영원히 불러 줄 것이다.

동북태수는 인민군 출신이고 선산과 익산태수 동지들은 빨찌산 출신들이다.

만일 영혼이 있다면 죽어서도 3태수 동지들이 살아생전처럼 만날 것이다.

이렇게 상상하며 먼저 간 동지들의 얼굴이 선하게 비쳐 오기 때문에 그리워서 되새겨본다.

김태수 동지시여!

살아생전 자주 만나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서 사는 세상을 쟁취하기 위하여 장소는 달라도 가는 길은 하나라 마음속에 담아 그리면서 오늘날 까지 투쟁하고 있지만 그 거룩한 뜻을 이룩하지 못한 체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으니 아픈 마음 금할 길 없군요.

이젠 모든 아픈 시름 다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원철 동지를 생각하면서

김원철 동지는 1918년 10월에 평북 신의주에서 출생했다.

1942년에 결혼하여 어머니와 아들을 두었다 (세식구)

선박관리 및 기관장으로 일명 바다꾼으로 살아왔다.

1960년에 내려 왔다가 61년에 체포되었다.

이유는 같이 내려 온 동료 중 한분이 딸의 결혼식에 참가 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혼식에 온 하객들 중 한사람은 신부의 부친이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신고함으로서 일행 4명이 체포되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재판에서 사형구형에 무기로 확정돼 징역을 살게 된 것이다.

1978년에 강제 전향에 걸려 조용히 살겠다고 한 것이 전향서가 되었다.

그후 1984년도에 전주감옥에 있을 당시 전향 취소를 제기했으나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87년 8.15 사면조치로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대구 사법보호소에 있을 때부터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돼 치매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식사도 못하고 주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등 병세가 극도로 악화 돼 2006년 11월 29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김원철 동지시여!

동지의 마지막 생을 상기해 볼 때에 지하 조직사업에서 초보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모든 아픈 시름을 접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통일의 길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종하 동지를 추모하면서

김종하 동지는 1929년 9월에 평북 영변에서 출생했다.

1945년 광복 후 민청과 지방 자위대에서 활동했다.

1950년 조국전쟁 발발 후 기계화 부대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경남 사천에서 미제 폭격으로 발목을 부상당하여 야전병원에서 치료 중 후퇴를 맞이하여 남원까지 왔으나 북상하지 못하고 대둔산에서 충남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종하 동지는 용감하게 잘 싸워 충남도당 위원장 보위부대원으로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영웅칭호까지 받았다.

종하 동지는 충남도 빨찌산 투쟁에서 살아남아 소조 투쟁으로 신출귀몰하는 투쟁속에서 1955년 1월에 체포되었다.

사형 구형에 무기로 확정되어 복역 중 1960년 10월에 20년으로 감형을 받아 만기가 주어젔다.

그러나 1975년 만기 때 출옥하지 못하고 반공법으로 7년의 추가형을 받고 도합 29년형을 마치고 1983년 6월 3일에 출옥했다.

김종하 동지는 끝까지 비전향을 고수하지 못한 죄책감을 갖고 출옥 후 눈을 감는 그날까지 최초 가젔던 소신을 잃지 않고 투쟁하였으며, 제 2차 송환 명단에 올라 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특히 진주 mbc 빨찌산 다큐 제작에 힘을 쏟아 불구의 몸인데도 엎혀서 지리산 뱀사골 기슭을 올라 가 증언하는 마지막 열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6개도당위원장 2차 회의 장소는 찾지 못했다)

종하 동지시여!

동지의 조국전쟁 시기 빨찌산 투쟁에서 보여 준 영용무쌍한 투쟁 업적은 타를 불허할 정도였으나 감옥 투쟁에서 살리지 못한 아쉬움은 남아 있지만 마지막을 올곧게 장식한 동지의 한생을 무거운 마음으로 회고하게 됩니다.

`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 통일의 길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참고@ 이번 묘소 답사에서 대구의 원영민 동지, 임병구 동지 신금용동지들이 제일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숙박을 안내한 분은 한도숙선생이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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