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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선생의 <중대장동지 구출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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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0-16 09:37 조회1,1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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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비전향양심수 김영승 선생이 최근에 페이스북을 통하여 알린 글이다.  그의 빨찌산 투쟁 시절의 회고록인 '과거를 회고한다' 가운데 <중대장동지 구출작전>을 싣는다. 현재 인천에서 거주하는 김영승 선생은 전남 영광 출신이다. [민족통신 편집실]



과거를 회고한다 7

<중대장동지 구출작전>


여기는 백운산 전남도당 빨찌산 진지이다. 때는 1953년 9월 중순이다.

산간지대에도 가을은 찾아왔다.

들판에는 땀흘러 가꾼 곡식들이 태풍의 피해 없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백운산 전남부대는 광양 진월면으로 보급 사업을 나갔다.

당시 경찰대들은 빨찌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10여명씩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나 부락뒤에 잠복하는 상태속에서 보급사업을 나갔던 것이다.

우리 전남부대는 1중대와 3중대로 구성돼 있었다.

체계는 부대장, 정치위원, 참모장. 강사, 중대는 중대장 부중대장 정치지도원 및 대원들이다. 1중대는 전투중대이고 3중대는 후방중대다. 그러나 적정에 따라 1중대는 부대장이, 3중대는 참모장이 책임지고 분산투쟁과 합동 투쟁을 구사한다.

1중대는 88건위대 소속 전투원들이고 3중대는 전남연대 당시 성원들과 도당 각부서 지도원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다. 88건위대는 20전후의 나이로 왕성한 활동력을 가진 도당 간부들의 보위병 출신들이었다.

드디어 부대는 마을에 진입했다 필자는 마을로 들어오는 통로에 매복을 책임지고 있었다. 당시 우병철 1중대장은 마을 한복판에 진입하다 적의 매복에 걸렸다.

결국 마을에 진입해 들어가던 중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매복조는 마을에서 콩볶듯 총소리를 들으면서 경각성을 높이고 있는 중인데 총소리가 좀 잦아들자 잠잠한 틈을 타서 후퇴한 부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마을을 향하여 돌격하라는 아지프로와 함께 M1을 연발로 발사하는 순간에, 후퇴하여 마을 뒤 산기슭에서 호응하는 총소리를 듣고 부대 위치를 확인 한 후 부대위치로 달려가고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서 칼빈총을 쏘면서 빨리 돌격하라는 중대장 목소리를 듣고 필경 중상을 당하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속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목소리임을 직감했다.

우리 매복조는 부대와 합류한 직후 부대장에게 빨리 돌격전을 전개하여 적들을 몰아내고 중대장 구출작전을 전개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부대장과 정치위원은 들어가다 아까운 동지들만 희생되니 구출작전은 불가하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지금 사선에서 구출을 호소하고 있는데 어찌 그냥 철수 할 수 있느냐고 했다. 나는 강력히 주장하면서 대원동지들에게 내가 앞장 설 터이니 내 뒤를 따를 동지들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니 몇 동지들이 나왔다.

이 때 부대장 동지는 대원동지들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 후 3중대 조사선 동지가 기운이 제일 세기 때문에 중대장동지를 업고 나오도록 명령 하고 나를 비롯한 일중대 5명이 동원되어 구원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제히 돌격의 목소리와 함께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중대장동지의 위치를 확인하고 마을에 진입하며 고삿길을 따라 중대장이 있는데까지 무사히 진입했다.

적들은 겁을 먹었는지 마을 뒤로 후퇴하여 사격을 가하고 있으나 구출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고 있었다. 중대장 동지는 마을집 울타리 밑에 은신해 있으면서 총을 쏟고 있기 때문에 적은 캄캄한 밤이라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중대장 동지는 허벅다리 뼈가 부러저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 돌격조는 재빨리 조사선동지 등에 엎혀 두 동지 호위속에 부대진지로 달리고 우리돌격조는 적을 한 군대 묶어놓고 있다가 감쪽같이 후퇴하여 무사히 부대 진지로 돌아와 합류했다.

이렇게 구출한 중대장 동지를 임시담가를 만들어 싣고 백운산 진상골 부대본부에 무사히 도착했다.

날이 새자 중대장 동지는 서골의 환자트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중대장 동지는 환자트에 있으면서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시계를 선물로 내게 보내와 찼는데 1954년 체포될 때까지 차고 있었다.

서골의 환자트는 1953년 12월 초순에 적들의 수색작전에 드러나 모두 체포되는 불운의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이 때에 중대장 동지는 생포되어 남원수용소에서 만남을 갖게 되었다. 군법에서 5년형을 받고 전주감옥으로 갔다는 소식만 듣고 그 후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당시 서골의 환자트에는 53년에 지하선이 발각되어 살 수 없게 된 모자가 입산하여 환자트에서 환자들 간호에 열중해온 할머니는 체포돼 적들에게 끝까지 반항하다 희생되었고 아들만 살아 체포되어 수용소에 들어왔다가 석방되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환자트에서 할머니만 사살되고 모두 생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환자트는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그 때만해도 적의 총탄은 내몸을 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투쟁했다.

생사를 넘나들며 투쟁하다 한줌의 흙으로 산화하여간 동지들을 회고 한다.

필자도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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