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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양심수에 대한 국가권력 최악의 인권침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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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08-29 08:39 조회1,0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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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양심수 김영승 선생이 페이스북을 통하여 그가 남녘 정권의 불법한 공권력에 의하여 전향하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댓가로 겪었던 지옥같은 인권침해에 대하여 밝혔다. 현재 인천에서 거주하는 김영승 선생은 전남 영광 출신이다. 김영승 선생은 국가공권력에 의하여 수많은 동료들이 강제 전향을 당했고, 그 와중에 참혹한 고문으로 숱한 애국자들이 타살되었음을 밝혔다. 오늘도 보안관찰법에 의하여 1급감시를 받고 있는 김영승 선생은 지구상 최악의 인권탄압을 가능하게 만든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히 요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 감옥 속의 비전향 말살책에 의한 국가의 불법한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당한 실태 (하) >

글: 김영승


사진은 필자 김영승 선생






1974년 4/28일이 만기 날이었습니다.

8명의 만기자 중 제가 일착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을 꺾으면 다른 동료들도 전향할 줄로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했습니다.

만기 1개월을 남겨놓고 갑자기 불러내 교도소 의무과 병실로 이동시켜 공방에 넣고 전향자 차양진(전향공작 자문위원)과 다른 전향자 한명과 같이 기거하도록 해놓고서 매일 나의 동태보고를 했습니다.

그래도 전향을 거부하자 당시 살아 계셨던 큰형님과 큰누나를 종용해 전향공작을 감행했습니다.

그후 만기 일주를 남겨놓고 나를 고문 구타한 정무종과 원삼실 그리고 전향자 차양진을 동원시켜 반공법 위반 건을 조작해 냈습니다.

일인당 5건씩을 조작해 총 15건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전향하지 않으면 고발조치해 출옥을 못하고 징역을 더 살아야 한다''고 공갈 협박하면서까지 전향을 강요했습니다.

당시 사건 조작 담당은 정일봉 교화사였습니다.

만기 날 살아 있었던 가족친지들이 교도소 정문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오후 해가 질 무렵에야 마중 나온 가족친지들을 뒤로 한채 중앙정보부 광주지구 지하실로 직행하여 전향강요를 당했습니다.

당시 조사관은 류시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출옥하지 못하고 반공법 위반을 들어 2년형을 더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전향하지 않으면 만기가 되어도 출옥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전향을 거부한 동료들에게 보여 주기위한 정권의 정책적 조치에 의한 것이었음을 세상이 다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2년형의 만기도 1976년 5월 6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악법 중의 악법인 사회 안전법에 의하여 '전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보안 감호처분을 만기 전 5/3일에 받았습니다.

2년형을 살 때는 교화사 신학운이었습니다.

이자는 2년 만기가 가까워오자 교무과 지하실로 끌고가 전향권고를 거부하자 미친 듯 날뛰며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뜨려놓고 구두발로 사정없이 차고 목을 밟아 숨조차 못쉬게 하며 우측갈비를 차서 달포동안 꼼짝을 못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몇 번이나 자살까지도 하려고 했습니다.

출옥 후 신촌 병원에서 시티 촬영을 해본 결과

'우측 갈비 한대가 부러젔다 이은 자국이 있다'는 소견을 받기도 했습니다.

1975년 11/22일 같은 사동에 수용 중인 신춘복 씨가 고문구타를 극복하지 못하고 철장에 목매 자살했습니다.

본인은 잘 아는 동료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에 담당간수를 통해 '입관할 때 본인을 입회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를 묵살하는 것 외에 불려 나가 ''전향을 않고 선동한다''는 구실을 붙여 고문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1975년 여름부터는 고문 구타에 동원되었던 깡패재소자들을 교체해 다른 깡패 재소자인 전호찬과 이건종이고 담당간수는 문홍술이었습니다.

옆방에 양희철 씨가 있었는데 '통방했다'고 불려나가 사방 관구실에서 가스파이프 대로 온몸을 관절만 찾아 두들겨 패면서 전향을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양희철 씨도 고문구타를 당해 업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이상은 대전 광주 형무소에서 전향강요 고문구타 당한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1974년 여름에 같은 동료였던 서준식 씨가 일본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이은평 소장실에서 면회했는데 여기에 일본의 사회당 국회의원이 동석한 자리에서 광주교도소 비전향 말살을 위한 고문구타행위를 상세하게 말한 것이 일본 아사히 신문에 게재됨으로써 국제적으로 폭로된 사실로 인해 갖은 제제와 고통을 당하기도 한 사실을 당시 옆방에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고문구타 당시 서준식 씨는 자살하려고 손목동맥을 끊기도 해 제때에 발견함으로써 생명을 구하기도 한 사실도 있었음을 단적인 증거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감옥만기에 출옥 못하고 청주감호소로 직행했습니다.


왜 보안감호 처분을 받게 되었는가

감옥형을 다 마치기 전에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해서 비전향을 단 하나의 이유로 보안감호처분을 받고 ( 1976년 5월 6일이 만기인데 5월3일에 보안감호처분을 받아 출옥하지 못했음)

광주감옥에서 1976년 5/29일 에 대전형무소 제 8사를 임시 보안 감호소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피감호자 신분으로 감호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인간이하의 열락한 처우속에 전향강요만 당하다가 동년 11월 18일에 새로 건축된 청주보안감호소로 이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청주보안감호소는 청주형무소 담벽을 사이에 두고 한 쪽은 청주형무소이고 다른 한 쪽은 보안감호소였습니다. 그런데 13년만에 폐지될 때까지 청주보안감호소란 간판조차 달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청주보안감호소 자체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소장은 이정문이고 감호과장은 오기수이고 간수장은 변태원이고 교무과장은 대전에서 비 전향 말살에 수훈을 새운 김치연이고 나중에 광주에서 악명 높았던 강철영이었으며 교화사는 역시 광주에서 전향공작 담당으로 악명 높은 박종오와 신학운이었습니다.

특별사 관구부장은 천일회이고 사방담당 간수는 민동기와 손영식이었습니다. 의무과장은 오성오이고 의무과에 배치된 간수는 정연성(일명곰보)이었습니다.

감호소에 배치된 교화과장과 교화사들은 광주와 대전에서 전향 말살책을 제일 앞장서 맹성을 떨치었던 악명 높은 사람들이며 소장을 비롯한 보안과 직원들도 역시 광주대전에서 비전향자들을 전향시키는데 일가견을 한사람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감호소 처우는 일반 형무소 처우와 동일했으며 오히려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모든 처우와 환경을 악하게 만들어 배기지 못하고 전향해 나오도록 하는 방법을 썼던 것입니다.

식사는 이웃 청주형무소에서 달아 다 먹고, 운동시간은 10-15분이고, 목욕탕도 없고 감방에 물주는 것도 제한되어 있어 오뉴월 염천에 물이적어 수건으로 물을 묻혀 땀을 닦는 것을 감방에서 닦는다고 불러내 때려 패면서 전향 않고 들어 앉아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며 이 고통을 격지 않으려면 빨리 전향하고 나가라고 전향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적도 몇 권으로 제한하고 가족접견은 전향수단으로 이용하며 환자들에 대한 진찰치료는 형식적이고 중환자들에 대해서는 병을 미끼로 전향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은 척주결핵을 앓고 있는데도 의무과 병실에 입원도 시켜주지 않고 약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감호당국이 얼마나 비열하게 환자들을 전향수단으로 이용했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예를 들면, 같은 동료인 이상율씨는 뇌낭충에 걸려 독방에서 사경을 해매다가 진찰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죽어 나가기도 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당시 이정문 소장은 죽는 한이 있어도 전향하지 않는 한 병실입원이나 진찰치료도 제대로 해줄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시책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면서 전향하라고 했습니다. 의무과장도 의사의 본분을 여러분들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 현 시책이므로 어찌할 수 없다고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열악한 처우속에 전향강요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1980년 전두환 군부정권 때 7월 11일부터 집단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악법인 사회안전법을 폐지하라, 피 감호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처우를 개선하라, 국회청원이나 상부 면담을 보장하라, 전향강요 하지 말고 고문구타하지 말라는 요구 조건을 내 걸고 단식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감호당국은 문제되는 것을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감호소 전 직원을 물론 옆 청주형무소 직원까지 총동원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강제급식에 들어갔습니다.

오기수 감호과장의 직접 지휘 하에 감호과 간수2명과 의무과 정연성 간수가 직접 강제급식을 자행했습니다. 강제급식의 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자에 앉히고 양 손목을 의자 뒤로 돌려 수정을 채우고 찍개로 강제 입을 벌리게 하고 우유에 왕소금을 잔득타 고무호수를 집어넣고 깔대기에 소금물 한 사발을 부어넣는 강제 급식은 일종의 고문보다 더한 고문이었습니다.

이 강제 급식과정에서 김용성씨와 변형만씨가 현장에서 즉사함으로서 강제 급식을 중단했습니다. 그렇게 죽여 놓고 상부에는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허위 보고한 것이 과거 의문사위 조사과정에 사인이 명백하게 백일하에 들어나기도 했습니다.

본인도 강제급식을 당하며 11일 단식을 했습니다.

집단단식이 끝난 후 보복적 탄압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죽은 김찬규씨는 청주교도소 공동묘지에 강제급식 과정에서 타살된 변형만씨와 나란히 묻혀 있습니다.

청주감호소에서 전향강요와 열악한 처우속에서 얻은 병의 후유증으로 이상률씨, 최점수씨 공인두씨 김규찬씨를 비롯한 6명이 죽어나갔습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다행히 안 죽고 살아 나왔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과 고문들의 후휴증으로 만성위염을 앓은 지 오래 돼 암으로 화할 수 있어 미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고 수술한 상태속에 12월 26일 (6개월만임) 한번 더 위내시경을 했는데 아직도 뱃속이 시원하지 않아 떼어낸 조직 검사 결과가 2015년 5일에 나온다는 진단을 받고 예약 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좌골 신경통과 백내장 (수술한 상태인데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있으며)을 수술했으나 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도 모래와 돌밥을 많이 씹어 양쪽 어금니가 다 썩어 부분 틀니를 하고 있으며 청각은 감옥에서 물고문과 귀빰을 많이 맞아 한쪽 귀는 시신경이 거의 죽어 있어 몇 미터만 떨어 저 있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 할 수 없는 상태 속에 있습니다.

척주결핵을 앓아 지금도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몇 번만하면 통증이 나는 상태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감호소에서 13년을 포함한 35년 9개월을 꼬박 살고 출옥했으나 안 죽고 살아남아 있는 일가친척들은 반기기보다 두려움을 갖고 대하였습니다. 연좌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군 장교나 정보계통에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면담에서 비전향자가 친척 중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떨어진 원망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가족 친척끼리도 이간시켜 의리관계를 파괴시키는 현실을 겪고 있는 것을 달가와 할 사람이 어데 있겠는가 입니다. 참으로 원한의 불길은 하늘을 솟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호당국은 피 감호자들에게 형무소 있을 때와 똑같이 전향강요를 당했다는 것을 의문사 진상위원회와 과거사위에 진상을 밝혀 달라고 제기하여 국가의 불법적인 공권력에 의해 강제 전향을 당하고 많은 동요들이 타살 되었다는 것을 밝혀 냈다.

지금 현재는 대체입법인 보안관찰법에 의한 일급 감시를 받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보안관찰법도 폐지된다.

우리는 악법인 국가보안법폐지에 총력투쟁을 전개해야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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