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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시평]슈뢰딩거의 고양이와 유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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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7-25 10:43 조회6,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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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박사(전 한신대교수)는 24일 '세월호 참사'에 관련하여 진행되고 있는 수사들이 그 원인과 배경에 대해 사건 1백일이 넘도록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인물에 대해 "유병언의 생사 문제는 논란거리로 남을 수도 있다. 이를 두고 영구미제 사건이라고도 한다. 천안함 사건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은 영구 미제의 나라인가?"라고 반문하며 한국정부의 문제점들을 비판했다. 그의 시론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시론]슈뢰딩거의 고양이와 유병언

*글:김상일(전한신대학교 교수)


  과연 이번 송치재에서 발견된 사체가 유병언 “인가? 아닌가?” 유병언은 과연 죽었는가 살아있는가. 과연 이번 경찰의 보고를 그대로 믿을 건가 말건가? 믿는 사람도 반 안 믿는 사람도 반반은 되는 것 같다. 지금 유병언은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 있는 상태이다.

양자 물리학에서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유병언 생사의 건과 연관을 시키면 쉬워 진다. 소위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dingers Katze)는 1935년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보이기 위해서 고안한 사고 실험이다.

양자역학나타나면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는 그 나타나는 현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서 고양이를 실험대상으로 삼았지만 이 실험은 미시세계의 입자를 고양이로 대체시켜 말한 사고 실험이다. 만약에 고양이를 유병언으로 대체하면 우리는 그 이해하기 어렵다 한 슈뢰딩거 고양이 실험을 단 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정치적인 것인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세기적으로 유명한 이 과학 실험을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작성된 것이다.

간단히 이 실험의 내용을 요약하면 미시 세계의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고양이는 지금 어떤 실험 장치에 의하여 반은 죽고 반은 살아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과연 이 고양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는 막상 “뚜껑을 열어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일상 대화에서 “뚜껑을 열어보면 안다”는 말을 이 실험에서는 “뚜껑을 여는 것이 알게한다”로 바꾸어야 한다. 소강절이 어느 날 자기 방 항아리가 어는 날 어느 시에 깨진다는 점괘가 나와서 그날 그 시에 항아리가 어떻게 깨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데, 막상 그 시가 되자 소강절의 부인이 들어 와 항아리를 집어 던져 깨 버리고 말았다. 남편인 소강절이 식음을 전폐하고 항아리만 드려다 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항아리 점을 소강절이 치지만 않았더라도 항아리는 안 깨졌을 것이다. 점을 치는 행위 자체, 즉 뚜껑을 여는 행위 자체가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복권이 당첨되었다. 당첨을 결정한 것이 그 해당 복권을 제작한 사람인가 그 복권을 산 사람인가 당첨 번호를 결정하는 회전 바퀴인가. 당첨번호가 발표되는 순간 이미 그 종잇조각 안의 그 복권의 번호는 결정이 돼 있었다. 이렇게 연계를 시키면 우리의 사고 실험은 미궁에 빠지고 만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유병언 사고 실험’을 하고 있다. 뚜껑을 연 장본인은 경찰이고 그 이전 까지 유병은 생사가 반반이었다. 경찰이 뚜껑을 여는 순간 ‘죽음’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만약에 상자 안에 고양이가 들어 있지 않고 관찰자 자신이 들어 있었다면 그 관찰자를 관찰하는 자가 또 있어야 할 것이고 결국은 무한 퇴행으로 가고 만다.

무한 퇴행으로 가면 불확정성과 미궁에 빠지고 만다. 유병언 사체를 발견하고 죽음을 발표한 경찰관들이 직위 해제되고 말았다. 경찰 안에서도 유병언의 생과 사는 반반으로 나뉜다. 결국 슈뢰딩거 고양이가 들어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여는 행위가 생과 사를 갈라놓고 있다. 과연 누가 실험의 주체이고 대상인가? 과학 실험과 한국 사회는 유사하지 않는가?

정치적은 얘기는 접어 두고 구걸 등에 들어 가 ‘슈뢰딩거 고양이’를 치면 아래와 같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고양이를 유병언으로 대체해 사고 실험을 해보기 바란다.

-아래 글1-

양자역학에 의하면, 미시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사건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적으로밖에 계산할 수가 없으며 가능한 서로 다른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슈뢰딩거가 제안한 이 사고 실험은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미시적인 사건이 거시적 세계에 영향을 미칠 때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의 패러독스로서 거론된다.

이 사고 실험에는 알파입자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고양이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상자 속에 들어있고, 이 상자는 독가스가 들어있는 통과 연결되어 있다. 독가스는 밸브에 가로막혀 상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독가스가 든 통 역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밸브가 열리는지 볼 수 없다. 이 밸브는 방사능을 검출하는 기계 장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기계 장치는 라듐 등이 붕괴하며 방출한 알파입자를 검출하여 밸브를 연다. 밸브가 열린다면 고양이는 독가스를 마셔 죽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라듐은 단위 시간 당 50%의 확률로 알파붕괴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단위 시간이 흐른 후에 고양이는 50%의 확률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측하지 않은 핵은 '붕괴한 핵'과 '붕괴하지 않은 핵'의 중첩으로 설명되지만, 한 시간 후 상자를 열었을 때 관측자가 볼 수 있는 것은 "붕괴한 핵과 죽은 고양이" 또는 "붕괴하지 않은 핵과 죽지 않은 고양이"뿐이다. 그럼 언제 이 계의 중첩 상태가 끝나고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는가?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슈뢰딩거는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 고양이"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며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반드시 살아있거나 죽은 상태여야 하기 때문에(그 둘 사이의 어디쯤이 아닌), 양성자 역시 붕괴했거나 붕괴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이 실험에서는 관측자가 상자를 여는 동시에 고정된다. 즉 대상에 대한 관측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중 세계 해석에서는 핵이 붕괴하는 순간이 분기점이 되어 고양이가 살아 있는 세계와 고양이가 죽은 세계가 분리되어 평행 우주가 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아래글2-

다음 그림 1은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dinger's cat)라고 부르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상자 A가 있습니다. 상자 속에는 몇 가지 장치가 되어 있는데 먼저 기계 손 B가 잡고 있는 것이 방사성 물질입니다. 이것이 붕괴하면 알파 알갱이 따위를 내비칩니다. 한 시간 동안 이 물질을 이루는 원자가 깨어져서 알파 알갱이를 내비칠 확률이 1/2, 곧 50% 라고 합시다. 원자가 붕괴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양자역학적으로 결정되니까 한 시간 뒤 원자의 상태는 붕괴한 상태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 두 가지의 포개진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

일단 측정을 하면 붕괴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를 얻겠지만, 측정하기 전에는 두 가지가 포개진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어느 한 상태에 있는데 단지 측정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포개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붕괴해서 알파 알갱이가 나온다면 이를 가이거 계수기(Geiger counter) C가 검출합니다. 그러면 기계 장치 D가 움직이고 망치를 내리쳐서 유리병 E를 깨게 됩니다. 유리병 안에는 독가스가 들어있지요. 그래서 초조하게 불안에 떨고 있는 고양이 F가 죽게 됩니다. 원자가 붕괴하지 않았다면 물론 고양이는 살아 있지요.

이러한 장치에서 한 시간 후에 원자는 붕괴한 상태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의 두 가지가 포개진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고양이도 당연히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가 포개진 상태에 있겠네요. 물론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를 보면, 즉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측정하면 그 순간에 고양이의 상태는 고유상태로 바뀝니다. 살았거나 죽었거나 두 가지 고유상태 중의 하나로 바뀌는 거지요.

이같이 고양이의 생사를 측정하면 살았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한 가지의 결과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측정하기 전에는, 곧 상자를 열어 보기 전에는 고양이는 산 상태와 죽은 상태 중 하나로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포개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림 2에 이를 장난스럽게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산 상태와 죽은 상태가 포개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 말이 되나요? 이러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우리가 감각기관으로 경험하는 세계, 이른바 매우 많은수의 원자나 분자로 이루어진 거시계에 양자역학을 적용하는 경우 측정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해석의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 삶과 죽음의 포개진 상태에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또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고양이가 가이거 계수기를 보면서 바늘이 움직이는지 확인한다고 할까요. 말하자면 고양이도 측정을 한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원자의 상태는 붕괴하거나 안하거나 두 고유상태 중 하나로 있게 되고, 고양이도 거기에 따라서 죽거나 살거나 두 고유상태 중 하나에 있게 되지요. 포개진 상태에 있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측정을 하니까 원자의 상태는 어느 한 고유상태로 환원되고 이에 따라 고양이도 한 가지로 명확한 상태가 됩니다. 포개진 상태라는 이상한 것이 생기지 않지요.

여기서 의문은 고양이가 쳐다봐도 측정이 되느냐 아니면 꼭 사람이 봐야 되는 것이냐 입니다. 고양이로는 잘 모르겠다면 고양이 대신 사람이 들어가서 쳐다보면 분명히 측정하는 것일 테니까 원자는 붕괴하거나 안하거나 고유상태로 결정이 되겠네요. 그렇겠죠? 그런데 자기가 들어가기는 싫잖아요? 그래서 대신에 친구를 집어넣자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위그너(Eugene P. Wigner)이므로 이를 위그너의 친구(Wigner's friend)라고 부릅니다. 위그너 같은 사람은 친구로 사귀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아무튼 사람이 상자에 들어가서 본다면 원자는 붕괴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에 하나로 결정될 터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람, 곧 위그너 친구의 상태함수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친구의 상태함수도 또 다른 사람이 봐줘야, 곧 측정해야 고유상태로 환원되지 않겠어요? 열어보기 전에는 이 친구의 상태는 아무도 측정을 안 해줬으니까 역시 포개진 상태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누군가, 예컨대 위그너가 이 친구를 관측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위그너의 상태는 누가 또 측정을 해서 고유상태로 환원시킬까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면 어디까지 가겠어요? 극단적으로 우주 전체의 상태는 누가 환원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뿐만 아니라 고양이가 본 것으로는 측정이 안 되고 사람이 꼭 봐야 되느냐? 아니면 고양이가 봐도 되느냐? 고양이로 부족하면 원숭이쯤 보면 되느냐? 또는 반대로 고양이까지도 필요 없고 개구리, 또는 가이거 계수기 같은 기계 장치만 있으면 측정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데 사람이든 고양이든 보지 않는다고 달라지겠어요?

결국 문제는 도대체 측정이란 무엇이냐 입니다. 측정을 하면 그 순간 상태함수가 바뀐다, 이른바 고유함수로 환원된다고 했는데 과연 언제 바뀌는 것이냐? 언제 측정했다고 볼 수 있는가? 어떠한 요소가 있어야 측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문제가 끊임없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양자역학에서 해석의 문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병언의 생사 문제는 논란거리로 남을 수도 있다. 이를 두고 영구미제 사건이라고도 한다. 천안함 사건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은 영구 미제의 나라인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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