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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우익진영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상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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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7-16 21:15 조회2,5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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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26화

2022년 7월 15일

우익진영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상전환

한호석 (정치학 박사,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 중앙정보국(CIA) 초대 국장이었던 로스코 힐렌쾨터(Roscoe H. Hillenkoetter, 1897~1982) 명의로 1950년 7월 9일에 작성된 '매일보고서(Daily Report)'에 놀라운 정보가 수록되었다. '매일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9일 서울중앙방송(KBS 라디오방송의 전신)이 서울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보도했는데, 이승만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투옥했던 정치인들, 국회의원들, 관료들이 서울시인민위원회에 대거 참가했다는 것이었다. 이 방송보도는 미군정과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이 야만적인 폭력으로 파괴했던 서울시인민위원회가 조선인민군에 의해 '해방'된 서울에서 복구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인민군의 서울입성은 점령이지만, 그 정권의 압제 밑에 신음하던 서울시민들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인민군의 서울입성은 해방이다.

1950년 당시 남북조선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전부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는데,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이 검거, 투옥했던 정치인들, 국회의원들, 관료들은 조선로동당 당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은 자기를 반대하는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한 것이다.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의 탄압을 받은 정치인들, 국회의원들, 관료들은 미국이 분할점령정책으로 세워놓은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을 반대하고, 자주적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사들이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해방'하였을 때,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이 투옥한 반미통일운동가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약 7,000명, 마포형무소에 약 3,500명, 영등포형무소에 약 1,30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을 반대하고, 자주적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반미통일운동가 11,800명을 검거, 고문, 투옥한 것은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의 악독한 만행이다.

서울에 있는 3개 형무소에 투옥되었던 반미통일운동가 11,800명은 한날 한시에 전원 석방되었다.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은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 마포형무소, 영등포형무소 정문을 T-34 땅크로 깔아뭉개고 들어가 감방문을 열고 반미통일운동가 11,800명을 극적으로 석방, 구출하였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을 받고 투옥되었던 반일독립운동가들이 3개 형무소에서 극적으로 석방, 구출되었던 '해방의 기적'이 5년 만에 반미통일운동가들에게 재연되었다. 며칠만 늦었더라면,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은 그들을 모두 학살하고 서울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해방의 기적'을 체험한 반미통일운동가 11,800명의 시각에서 보면,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은 자기들을 학살위험에서 구출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울시인민위원회 복구사업과 조선인민군 지원사업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앞장섰다. 서울이 '해방'된 1950년 6월 28일로부터 불과 1주일 안에 그들의 열성적인 노력에 의해 9개 구인민위원회가 복구되었다. 1950년 7월 당시 서울의 행정구역은 9개의 구로 편성되었다. 1950년 7월 1일에는 서울의 모든 동마다 동인민위원회가 복구되었다. 복구된 서울시인민위원회는 서울시청 청사에 들어섰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8.15해방 직후인 1946년 남북조선 전역에서 인민위원회 조직사업이 들불처럼 확산되어 13개 도인민위원회, 21개 시인민위원회, 220개 군인민위원회, 2,282개 면인민위원회, 28,500개 리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지 않은 면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이런 사정은 해방된 민주조선에 '인민의 세상'이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남북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건설한 '인민의 세상'은 미군정과 종미극우세력의 야만적인 폭력으로 전부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8일 감옥에서 풀려난 반미통일운동가 11,800명의 시각에서 보면, 자기들이 극적으로 석방, 구출된 것도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야만적인 폭력으로 파괴되었던 서울시인민위원회가 복구된 것은 더욱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장 힐렌쿼터의 명의로 작성된 '매일보고서'에 따르면, 복구된 서울시인민위원회에 참가한 인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미군정 시기에 남조선과도립법의원 의장을 지낸 김규식(1881~1950)이라는 것이다. 8.15해방 직후 서울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는 거기에 참가하지 않은 김규식은 1950년 7월 복구된 서울시인민위원회에는 대표자로 참가했다. 김규식만이 아니라, 조소앙(1887~1958), 안재홍(1891~1965)을 비롯한 저명한 정치인들이 복구된 서울시인민위원회에 대표자로 참가하였다.

돌이켜보면, 반일항쟁기에 임시정부 주석은 김구였고, 부주석은 김규식이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제1당은 한국독립당이었으므로, 제1당 대표인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직을 맡았고, 제2당은 조선민족혁명당이었으므로, 제2당 대표인 김규식은 부주석직을 맡았다. 조소앙은 임시정부 외무총장이었다. 그러므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저명한 정치인들이었는데, 임정을 대표하는 김규식과 조소앙이 복구된 서울시인민위원회에 참가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김구가 1949년 6월 26일 미국의 손에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김구도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복구된 서울시인민위원회에 참가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저명한 우익정치인들이 복구된 서울시인민위원회에 참가한 것은, 종미우익 세뇌교육에 의해 형성된 낡은 관념을 해체해버린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1950년 7월 12일에 벌어졌다. 북행길에 오른 조소앙은 그날 자청해서 평양방송국으로 가서 방송연설을 했다. 조소앙의 평양방송연설은 우익정치인들이 강제납북을 당했다는, 종미우익 세뇌교육에 의해 형성된 낡은 관념을 또 다시 해체한다. 그날 조소앙은 평양방송연설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은 주구 리승만 살인마로 하여금 조선에 내란을 도발케 한 후, 그들의 륙해공군을 동원하여 우리 조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하였다"고 말했다. 조소앙은 어제날의 우익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그는 열렬한 반미통일운동가로 변모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1950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 사흘 동안 16개 정당과 167개 사회단체가 서울시인민위원회에 등록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한국독립당(대표 조완구), 사회당(대표 조소앙), 민주독립당(대표 홍명희), 근로인민당(대표 리영), 신진당(대표 김명준), 사회민주당(대표 장권), 근로대중당(대표 강순) 등이 포함되었다. 그처럼 많은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서울시인민위원회에 등록한 까닭은,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자기들의 사회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서울은 점령된 것 아니라 해방된 것이었다.

서울시인민위원회에 참가한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을 비롯한 저명한 정치인들은 1950년 7월 중에 모두 월북하였다. 만일 그들이 서울에 남아있었더라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한국군은 그들을 '부역자'로 몰아 모조리 학살했을 것이다. 1950년 10월 30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이 서울에서 체포, 구금한 '부역자'는 9,984명이었다고 한다.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을 비롯한 저명한 정치인들이 서울시인민위원회에 참가한 것은,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의 억압통치 아래서 살아가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기 전에 북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해방'된 서울에서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을 반대하는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 국회의원은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현직 국회의원들이다. 현직 국회의원들이 '해방'된 서울에서 반이승만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6.25전쟁 시기 국무총리 서리와 국방장관을 겸임했던 신성모(1891~1960)가 이승만(1875~1965)에게 올린 1950년 7월 6일부 전황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성모는 "국회의원들이 각각 나서서 정부를 반대하고 공산당 투쟁에 적극 협력하도록 유세한다 하여" 그에 대항할 우익단체들을 긁어모아 '구국총력연맹'을 조직하였다고 전황보고서에 서술했는데, 이것은 국회의원들이 1950년 7월 초부터 서울에서 반이승만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이승만투쟁에 나선 국회의원 48명은 1950년 7월 25일 서울에서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리승만 괴뢰정부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하면서, 다른 국회의원들에게 "하루빨리 인민의 편으로 넘어오라"고 촉구하였다.

1950년 7월 31일 국회의원 13명이 '해방'된 서울에서 성명을 발표하였다. 위의 호소문을 발표한 국회의원 48명에 포함되지 않은 국회의원 13명이 별도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이 조작한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조선인민군에 의해 극적으로 석방, 구출된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현직 국회의원들이다. 원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구출된 국회의원은 14명이었는데, 그 중 1명은 '해방'된 서울에서 종적을 감추어버리는 바람에 성명발표에는 13명만 참가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기간에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이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국회의원 14명을 '국가보안법'의 올가미에 걸어 투옥한 탄압사건이다.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은 점령군 완전철수와 남북정치협상 개최를 요구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한 이들 국회의원 14명을 국회에 침투한 '남조선로동당 프락치'로 몰아 투옥했다. 조선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 구출된 현직 국회의원 13명은 성명에서 "조국의 4분의 3이 벌써 해방되었다"고 지적하고, "리승만 괴뢰도당의 멸망과 조국통일은 시간문제"라고 하면서, "미제 구축과 리승만 잔당 격멸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위에 서술한 역사적 사실들은 우익진영에서 사상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의 사상의식을 180도로 전환시킨 요인은 무엇인가? 평화통일염원을 안고 1948년 4월 30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요인회담에 참가한 우익진영 대표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리극로, 엄항섭이었는데, 미국은 김구(1876~1949)가 남북협상에 참석하고 서울에 돌아가 남조선단독정부를 끝까지 반대하고 연방정부수립을 추구하자 1949년 6월 26일 그를 암살했다. 우익진영의 대표인 김구가 암살당한 사건은 남북협상파 우익정치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충격은 남북협상파 우익정치인들 속에서 사상전환을 촉발시킨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남북협상파 우익정치인들은 김구가 암살당한 뒤에도 점령군 철수와 남북정치협상 개최를 요구했지만, 그들에게 차례진 것은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의 감시와 배척과 탄압이었다. 그로써 이승만 종미극우정권과 남북협상파 우익정치인들 사이의 적대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심화된 적대적 모순을 폭발점으로 끌어간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1949년 6월 29일 점령군을 철수했다고 발표하더니, 1950년 7월에는 되레 더 많은 군대를 전선에 투입하여 북침전쟁을 도발했으며, 부산으로 도주하여 연명하던 이승만 종미극우정권을 다시 살려주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북협상파 우익정치인들은 미국이야말로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주범이고, 종미극우정권은 종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상전환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전환은 남북협상파 우익정치인들을 미국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는 투쟁으로 이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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