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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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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1-06-13 17:49 조회2,4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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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는 날


*글 : 한호석 박사(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진은 필자


<차례>

1. 2000년 2월부터 5월까지 남북미 3자관계의 동향

2.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을 합의하다

3. 21년 동안 이루어놓은 남북합의가 전부 사문화되었다

4. 급변하는 주변정세와 두 개 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



1. 2000년 2월부터 5월까지 남북미 3자관계의 동향


2021년 6월 15일은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때로부터 21년이 되는 날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상봉과 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진행되었다. 분단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변이었다. 6.15공동선언에 따르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역사적 사변이었다고 한다.


시선을 격동의 2000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추진했던가? 이 의문을 풀어주는 이야기는 의외로 골프장에서 시작된다.


21년 전, 경기도 하남시에 미8군 골프장이 있었다. 원래 미8군 골프장은 1958년 서울에 있는 미국군 용산기지에 속한 90,000여 평의 대지에 건설되었는데, 1991년 노태우 정부가 경기도 하남시에 28만2,000여 평이나 되는 거대한 성남골프장을 건설하여 미국에 상납했다. 미국은 성남골프장을 상납 받자마자 즉각 캘리포니아주에 편입시켰다. 남측 정부가 미국에 무상으로 상납한 토지들은 모두 캘리포니아주에 편입되었다.


2019년 4월 1일 문재인 정부는 경기도 평택에 있는 미국군기지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 영내에 성남골프장보다 더 크고 멋진 골프장을 건설하여 미국에 상납했다. 지금 주한미국군이 사용하고 있는 평택골프장의 이름은 리버 벤드 골프코스(River Bend Golf Course)다.


지난 63년 동안 용산에서 성남을 거쳐 평택으로 옮겨온 미8군 골프장의 이전사는 미국의 한국지배와 한국의 대미예속이 응축된 굴욕의 역사다. 굴욕의 역사 속에서 미8군 골프장만이 아니라, 알짜배기 땅에 들어앉은 주한미국군기지들이 모두 캘리포니아주에 편입되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은 주한미국군이 우리 땅을 불법적으로 타고 앉은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2000년 3월 중순 어느 날, 당시 점령군사령관 토머스 슈워츠(Thomas A. Schwartz)가 성남에 있는 미8군 골프장에 한국군 장성들과 함께 행차했다. 2019년 9월 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날 토머스 슈워츠는 한국군 장성들과 함께 성남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한국군 장성들에게 “나는 당신네 정부가 뭐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2000년 3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는데, 점령군사령관이 한국군 장성들에게 남북정상회담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당시 한국군 장성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비밀리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으므로, 점령군사령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점령군사령관의 골프회동발언은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한 비밀사항을 미국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2019년 9월 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은 덩샤오핑(鄧小平)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을 통해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남북정상회담 개최제의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해달라고 청탁했었다. 덩푸팡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청탁을 전달받은 장쩌민 주석은 2000년 3월 5일 황쥐(黃菊) 당시 상하이 당서기를 특사로 평양에 파견했다.


장쩌민 주석의 특사가 김대중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한 시점과 거의 같은 시점에 또 다른 중개자가 평양에 도착했다. 2003년 2월 13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일무역회사 신니혼산교(新日本産業) 사장이었으며, 총련계 재일동포 2세로 일본에 귀화한 요시다 다께시(吉田孟)는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제의를 2000년 3월 초 자신이 북에 전달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제의를 두 개의 경로를 통해 전달받고,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에 따라, 200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싱가폴에서 비공개 예비접촉이 있었다.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당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싱가폴 예비접촉에서 만났다. 남과 북은 2000년 3월 17일 상하이 예비접촉과 3월 22일 베이징 예비접촉에 이어 4월 8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4차 예비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 4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상황을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에게 보고했고, 이튿날 청와대는 남과 북이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2000년 4월 30일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 반기문을 백악관에 보내 클린턴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그런데 2020년 7월 27일 <월간조선>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보도에 따르면, 남과 북은 2000년 4월 8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예비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확정한 ‘남북합의서’를 채택하면서 비공개 합의서도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라는 제목의 비공개 합의서에 따르면, 남측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5억 달러를 (북측에) 제공”할 뿐 아니라, ”민족적 협력과 상부상조의 정신에 입각하여 북측에 2000년 6월부터 3년 동안 25억 달러 규모의 투자 및 경제협력차관을 사회간접부문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에 4억5,000만 달러를 송금했고, 나머지 5,000만 달러를 현물로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6월부터 3년 동안 25억 달러의 투자 및 경제협력차관을 북에 제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한 대북송금은 백악관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 백악관의 시각에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자기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것도 괘씸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30억 달러나 되는 현금, 투자금, 차관을 북에 제공하는 것은 미국의 대조선경제제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북송금이 미국의 대조선경제제재를 무력화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김대중 정부가 북에 30억 달러를 제공하지 못하게 합의이행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차단압박에 굴복한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송금에 합의한 30억 달러 가운데 5억 달러만 제공했고, 나머지 25억 달러는 제공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송호경 부위원장을 만나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한 것으로 하여 미국의 미움을 받은 박지원 특사는 대북송금이라는 죄목으로 2003년 6월에 구속되었고, 2006년 5월에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또한 당시 대북협력자금을 출연한 것으로 하여 미국의 미움을 받은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도 대북송금으로 고초를 겪던 중 2003년 8월 4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달 정도 앞둔 2000년 5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요구조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박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날로부터 한 주간 뒤인 2000년 5월 7일 당시 미국 국무부 고문 웬디 셔먼(Wendy R. Sherman)을 서울로 급파했다. 2019년 9월 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000년 5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셔먼 고문은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보 장재룡에게 6월에 개최될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거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셔먼 고문은 5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똑같은 요구를 꺼내놓았다.


그런데 2000년 5월 7일 서울에 나타났던 웬디 셔먼이 6월 5일 또 다시 서울에 나타났다. 셔먼은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남북정상회담 실무준비를 전담하고 있었던 당시 국정원장 임동원도 만났다. 이처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5월 7일에 이어 6월 5일에 또 다시 셔먼을 서울에 급파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6월 3일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특사를 접견하였기 때문이다. 2008년 6월 14일 북의 대남언론매체 <우리민족끼리> 보도에 따르면, 그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임동원 특사를 4시간 30분 동안 접견하는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북남수뇌상봉에서 발표할 문건은 지난날의 것을 반복하고 모방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으로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할 문건에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접견석상에서 그 발언을 직접 들은 임동원 특사도 알지 못했고, 나중에 특사의 보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도 알지 못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금 달랐다.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의 보고를 통해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그들은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떤 문제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기하게 될는지 예상했다. 그래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셔먼을 또 다시 서울에 급파했던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셔먼은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하면서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거론하는 경우 철군을 반대할 것을 요구했고, 북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거론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 그것은 외교적 요청이 아니라, 내정간섭을 자행하는 강박이었다. <사진 1>



▲ <사진 1>이사진은 2000년 5월 9일미국국무부고문웬디셔먼이청와대에서김대중대통령을접견하는장면이다.당시클린턴대통령은남북정상회담추진문제와관련하여김대중대통령이보낸친서를받고,한주간뒤에웬디셔먼을서울로급파했다.셔먼고문은김대중대통령을접견한자리에서남북정상회담이개최되면북의핵문제와미사일문제를거론할것을요구했다.셔먼고문은 2000년 6월 5일에또다시서울에나타나김대중대통령과임동원당시국정원장을각각만났다.그자리에서셔먼고문은남북정상회담중에김정일국방위원장이주한미국군철군문제를거론하는경우철군을반대할것을요구했다.이것은내정간섭을자행하는강박이었다.



2.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을 합의하다


그러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예상과 요구는 모조리 빗나갔다.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철군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철군문제는 조미협상에서 제기될 중대한 문제이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철군문제에 대한 발언권조차 갖지 못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에서 그 문제를 거론하여 회담을 난관에 빠뜨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3일 임동원 특사에게 남북정상회담 문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 ‘새로운 내용’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는 문제였다. 실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조국통일방안을 제시했다. 남과 북의 정상이 정상회담에서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는 것이야말로 통일국가건설과업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2000년 당시 남측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작업을 총괄했던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2008년 서울에서 ‘피스 메이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펴냈다. 회고록에는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자고 제의한 발언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이번에는 첫째로 민족자주의지를 천명하고, 둘째로 통일문제와 관련해서는 련방제통일을 지향하되 일단 낮은 단계의 련방제부터 하자는 데 합의하십시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련방제라는 건 남측이 주장하는 련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자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의합시다. 남측의 련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련방제가 뜻이 같은 것이니까, 낮은 단계 련방제로 북남이 협력해나가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 방안을 합의하자고 제의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방안은 여기서 합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그 제의를 거부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거부로 조국통일방안에 관한 논의가 진척되지 않자, 회담에 배석한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끼어들었다. 배석자가 주제넘게 회담에 끼어든 것도 결례였지만, 그가 연방제를 반대하기 위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늘어놓은 것은 더 큰 결례였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남과 북에 현존하는 서로 다른 체제가 갑자기 연방제로 통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연방제통일을 실현하려면 남과 북이 군대를 통합하고 외교를 통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꾸며낸 궤변이었다. 남과 북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체제를 그대로 두고 통일하는 것이 연방제인데, 그는 남과 북에 현존하는 서로 다른 체제가 갑자기 연방제로 통일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니,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남과 북이 군사권과 외교권을 각각 보유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인데, 그는 남과 북이 군대를 통합하고 외교를 통합하는 연방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니,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협상상대가 연방제라는 말 자체를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하자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6.15 공동선언 제2항은 매우 모호한 문장으로 표기되었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 들어있는,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문장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다. 그 문장에 들어있는 “이 방향”이라는 말에 구체적인 내용이 감춰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말에 담긴 속뜻을 분석적으로 고찰해보자.


위에 인용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측의 연합제 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거부했고, 두 방안의 공통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문장은, 남측의 연합제 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기초 위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모호한 문장으로 서술된 6.15 공동선언 제2항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속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그 공통성의 기초 위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실현하는 방향에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위와 같은 합리적인 해석에 따르면,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한 것이다. 연방제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반통일론자들은 남과 북이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아무 것도 합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에 서술한 대로 남북정상회담 상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면 남과 북이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진 2>



▲ <사진 2>이사진은 2000년 6월 13일평양에있는백화원영빈관에서김정일국방위원장과김대중대통령이담화하는장면이다.김정일국방위원장은남북정상회담중에김대중대통령에게낮은단계의연방제를조국통일방안으로합의할것을제의하면서낮은단계의연방제에관해자세히해설했다.그러나김대중대통령은그제의를거부했다.남북정상회담에서채택,발표된 6.15공동선언제2항은조국통일방안에관해모호하게서술되었지만,남북정상회담상황을분석적으로고찰하면남과북이 6.15공동선언제2항에서낮은단계의연방제를조국통일방안으로합의하였다는결론에이르게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시한 조국통일방안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현존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군사권과 외교권도 각각 보유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이었다. 그런데 대북적개심에 사로잡혀 논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극우세력은 연방제통일과 ‘적화통일’이 같은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적화통일’은 북이 남을 적화(赤化)하는 통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적화통일’은 북이 남을 사회주의화(=적화)하고, 남과 북의 군사권과 외교권을 급진적으로 단일화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과 북이 서로 다른 현존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군사권과 외교권도 각각 보유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북측이 남을 적화하는 통일이 아니다. 통일학의 관점에서 보면, 연방제통일은 ‘적화통일’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극우세력은 상반되는 두 개념이 똑같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적화통일론’이야말로 파란 색을 붉은 색이라고 우겨대는 궤변이며, 8천만 민족의 조국통일념원을 모독하는 망언이다.


3. 21년 동안 이루어놓은 남북합의가 전부 사문화되었다


6.15 공동선언이 채택, 발표된 이후 지난 21년을 돌아보면, 그 기간에 출현 남측 정부들이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선언을 전면적으로 배격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6.15 공동선언이라는 말조차 기피했지만, 6.15 공동선언을 채택, 발표한 김대중 정부도 이행하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도 이행하지 않았으며, 현재 문재인 정부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이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지 않은 사연은 다음과 같다.


6.15 공동선언 제1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는데, 그 선언을 채택, 발표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자기들의 회담준비상황을 보고했으며, 그런 보고를 받고 상황을 파악한 백악관은 셔먼을 서울에 파견하여 김대중 정부의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했다. 준비과정에서부터 미국의 간섭을 받았던 김대중 정부는 6.15 공동선언 제1항을 철저히 외면했다.


6.15 공동선언 제2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였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조국통일방안을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연합제 방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의 공통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조국통일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거부한 김대중 정부는 6.15 공동선언 제2항을 철저히 외면했다.


6.15 공동선언 제3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는데, 남북리산가족상봉은 몇 차례 진행되다가 중단되었고,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2000년 9월에 한 번만 진행되었다. 6.15 공동선언 제1항과 제2항이 이행되지 않았는데, 제3항만 제대로 이행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6.15 공동선언 제4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하였는데, 남북경제협력은 대조선경제제재를 계속하는 미국의 차단과 방해에 걸려 초기단계에 좌절되었고, 다른 여러 분야의 협력과 교류도 몇 차례 진행되다가 남북관계경색으로 중단되었으며, 그로써 남북관계에서 신뢰가 쌓이기는커녕 불신만 더 커졌다.


노무현 정부의 고위관리 세 사람이 함께 저술하여 2015년 10월 서울에서 펴낸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6.15 공동선언이 채택, 발표된 이후 5년을 돌이켜보면, 그 선언이 “상징화된 빈 구호가 되었고, 빈 종이, 빈 선전곽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6.15 공동선언만 사문화된 것이 아니라, 2007년 10월 4일 채택, 발표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도 사문화되었고, 2018년 4월 27일 채택, 발표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과 2018년 9월 19일 채택, 발표된 ‘평양공동선언’도 사문화되었다. 남북합의들은 전부 사문화되고 말았다. 미국은 남측 정부가 남북합의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간섭하고 가로막았고, 남측 정부는 위에 열거한 네 개의 선언들과 배치되는 반북대결정책을 폐기하지 않았다. 미국이 지난 21년 동안 강화해온 대조선제재가 남북합의를 사문화시킨 주범이고, 미국과 남측 정부가 지난 21년 동안 지속해온 북침전쟁연습이 남북합의를 사문화시킨 주범이다. <사진 3>



▲ <사진 3>위의사진은한미련합군전차부대가북침전쟁연습을하는장면이다.한미련합군이지난 21년동안지속해온북침전쟁연습은남북합의를사문화시킨주범이다. 2000년 6월의 6.15공동선언, 2007년 10월의남북관계발전과평화번영을위한선언, 2018년 4월의한반도의평화와번영,통일을위한판문점선언, 2018년 8월의평양공동선언은모두사문화되었다.남측정부가미국의지배와간섭을받고있는현실,그리고남측정부자체가반북대결정책을폐기하지않는현실은앞으로남북정상회담이다시열리지않을것이라는비관적전망을안겨준다.남북정상회담으로는평화통일을실현할수없게된것이다.


남측 정부가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받고 있는 현실, 그리고 남측 정부 자체가 반북대결정책을 폐기하지 않는 현실은 앞으로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안겨준다. 남북정상회담을 다시 개최한다 해도,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받는 남측 정부가 합의사항을 여전히 이행하지 못할 것이고, 남측 정부 자체가 반북대결정책을 여전히 폐기하지 않을 것인데, 북이 그런 무익한 남북정상회담을 왜 다시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참담한 현실은 남북정상회담으로는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면, 북은 어떤 방도로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2021년 5월 9일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개정된 당규약에서 찾을 수 있다.


4. 급변하는 주변정세와 두 개 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


개정된 당규약에 따르면,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함으로써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통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1년 전 남북정상회담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실현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함으로써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규약에서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는 것은 정상회담으로 실현할 수 없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당규약에 명시된 철거문제와 청산문제는 정상회담이 아니라 무력사용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대화와 협상이 통하지 않는 제국주의국가를 상대로 정상회담을 할 수 있지만, 그런 정상회담은 전술적 의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세계사에 기록된 수많은 경험과 교훈은 어느 나라에서나 제국주의지배체제를 타도하는 반제투쟁은 해방전쟁으로 발전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날 항일선렬들이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전개한 반제투쟁도 해방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도 광복군도 독립군도 모두 일제를 타도하는 해방전쟁을 위해 존재한 항일무장조직들이었다. 그러므로 반제투쟁의 시각에서 보면, 제국주의국가의 식민통치는 악이며, 그 악을 제거하는 반제해방전쟁은 선이다. 조선총독부는 악의 화신이었고, 항일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는 것은, 조선로동당의 용어를 빌리면, 남조선해방전쟁을 수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로동당은 2021년 5월 9일에 개정된 당규약에서 남조선해방전쟁을 당면목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남조선해방전쟁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북의 문헌들은 ‘전시사업세칙’과 ‘조선인민군 학습제강’이다. 북에서 2012년 9월에 개정되었고, 2013년 8월 22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전시사업세칙’을 보면, 제2장 제37항에 “전시무력기관사업의 기본은 (중략) 공화국 남반부를 해방하고 조국통일의 력사적 위업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민군 출판사가 2000년에 출판하였고, 2003년 1월 일본 언론매체가 보도한 ‘조선인민군 학습제강’에도 “남반부 해방을 위한 혁명전쟁”,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통일을 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명시되었다.


통일학의 관점에서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21년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이 결속된 직후에 실현될 것으로 예상된다.


군사학의 관점에서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이 북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6.25전쟁과는 양상이 전혀 다른 전쟁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날 6.25전쟁은 미국이 무력침공을 자행하는 바람에 전쟁기간이 3년으로 늘어났고, 그로써 남과 북이 모두 참혹한 전쟁피해를 입었지만, 오늘날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은 미국의 무력침공을 원천봉쇄한 상태에서, 매우 짧은 기간에, 전쟁피해를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결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군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기간의 단축, 전쟁피해의 최소화, 전쟁의 신속한 결속은 현대전의 3대 특징이다. 20세기에 있었던 6.25전쟁이나 윁남전쟁과 달리, 21세기 현대전이 그런 3대 특징을 보이는 까닭은, 정밀한 작전계획, 첨단화된 무기체계, 현대화된 전략전술에 의거해 수행되기 때문이다.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도 21세기 현대전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의 ‘전시사업세칙’에는 그들이 남조선해방전쟁을 수행할 필요조건이 몇 가지 제시되었는데,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조국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는 것을 남조선해방전쟁의 수행조건으로 인정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조국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면,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진 4>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가 북이 바라는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세변화는 중국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정세의 급변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정세의 급변이다.


한반도 주변정세가 북이 바라는 방향으로 급변한다는 말은,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할 준비를 완료한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왔다. 2016년 9월 1일 대만 언론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민해방군은 2020년까지 대만해방전쟁준비를 완료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중국문제전문가 이안 이스턴(Ian Easton)은 외부에 유출된 중국인민해방군의 비밀전쟁계획문서들을 분석한 데 기초하여 집필한, 2017년 10월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중국침공위협(The China Invasion Threat)'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이 2020년에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할 비밀전쟁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국인민해방군이 이처럼 대만해방전쟁준비를 완료하고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는 현재 상황이야말로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조국통일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판단한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중국인민해방군에 총공격명령을 내리는 순간, 대만해방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이 남조선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판단한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남조선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조선인민군에 총공격명령을 내리는 순간, 남조선해방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군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전쟁을 시작하는 날, 조선인민군도 남조선해방전쟁을 시작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의 군사전문가들은 대만해방전쟁이 개전시각으로부터 100시간 만에 중국의 승리로 끝나는 4일전쟁 씨나리오를 예상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가 발생하여 늦어진대도 10일 만에 중국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나는 한반도의 군사상황을 분석한 데 기초하여 북의 남조선해방전쟁이 72시간 만에 북의 승리로 끝나는 3일전쟁 씨나리오를 예상한 글을 이미 2013년 이후 몇 차례 <자주시보>에 발표한 바 있다.


대만해방전쟁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공산당의 정치일정에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은 2021년 7월 1일 당창건 100주년을 맞이하고, 2022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 제20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할 예정이다. 이런 정치일정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총서기는 창건 100주년을 맞은 중국공산당이 지난 10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국토완정의 역사적 임무(=대만해방)을 수행해야 할 절박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절박한 의무감이라는 말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차이잉원(蔡英文)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이 미국의 사촉과 지원을 받으며 대만군 무력을 증강하고, 미국이 대만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려고 책동하고, 미국이 일본을 비롯한 추종국들을 긁어모아 반중국전선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것은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기에 불리한 정세를 조성하는 것이므로, 시진핑 총서기는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겨야 할 절박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이 직면한 급박한 사정은 매우 심각한 군사정세가 한반도 주변에 조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매우 심각한 군사정세가 한반도 주변에 조성되었으므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최근 동향에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북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0년 7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 중에 별도로 15명만 참석한 비공개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비공개회의에서는 “조선반도 주변에 조성된 군사정세와 잠재적인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부대들의 전략적 임무와 작전동원태세를 점검”하였다고 한다. 북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1년 6월 11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2차 확대회의에서 “최근 급변하는 조선반도 주변정세와 우리 혁명의 대내외적 환경의 요구에 맞게 혁명무력의 전투력을 더욱 높이고 국가방위사업 전반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기 위한 중요한 과업들이 제시”되었고, 김정은 총비서는 조선인민군이 “고도의 격동태세를 철저히 견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고 한다. 김정은 총비서가 확대회의에서 언급한 고도의 격동태세는 조선인민군이 총공격명령을 받으면 언제든지 남조선해방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전투동원태세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위와 같은 보도내용을 읽어보면,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최근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정세가 남조선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불러올 것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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