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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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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5-28 02:09 조회1,6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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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박사(뉴욕 통일학연구소 소장)는 이번 글을 통해 지난 클린턴 행정부시기부터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에 대해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핵탄두설계도를 파키스탄에게 넘겨주었다는 극비정보는 알지 못했고,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화성-7 제조기술을 이전하고, 탄도미사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다는 정보만 파악하였다. 중앙정보국의 정보보고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백악관은 조선의 미사일기술이전을 차단하고, 미사일생산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에 매달리게 된 사연"이라고 진단한다. 전문을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분석] 백악관의 실패원인, 역사는 알고 있다

*글:한호석 박사(뉴욕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호석.jpeg
*사진은 필자인 한호석 박사

  

기사입력: 2019/05/27 [08: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가을정취가 짙어가던 2000년 10월 24일 평양고려호텔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미국 국무장관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진행한 기자회견이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3시간 동안 회담하였으며, 조명록 차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백남순 외무상과 각각 회담하였다. 그처럼 중요한 방문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기자회견장에 나왔으므로, 내외신 취재진은 그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지 무척 궁금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기자회견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발언은 다음과 같다.

 

“김정일 위원장과 나는 조선의 고유한 미사일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 등 미사일에 관한 상호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하였다.”

 

“나는 다음 주에 두 나라 미사일전문가들이 회담을 재개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게 되어 기쁘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위와 같은 발언을 들어보면, 2000년 당시 조미협상의제는 핵문제가 아니라 미사일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백악관은 조선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조선의 미사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다. 그런 사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을 방문하기 14일 전인 2000년 10월 9일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한 직후, 10월 12일 평양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공동코뮈니케’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조미공동코뮈니케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사항이 들어있다.  

 

“쌍방은 미사일문제의 해결이 조미관계의 근본적인 개선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백악관이 그처럼 핵문제를 외면하고 미사일문제에만 매달린 까닭은 다음과 같은 사연에서 밝혀진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00년 10월 2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선을 방문한 매들리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환영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마련한 만찬 중에 축배를 드는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2000년 12월 안에 평양에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타결하자는 놀라운 제안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통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냈다. 만약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받아들였다면, 오늘 우리 겨레는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된 나라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1)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이 핵무기 개발을 막 시작한 초보적 수준에 있는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의 탐사보도기자 쎄이무어 허쉬가 잡지 <뉴욕커> 2003년 1월 27일부에 발표한 장문의 기사에 따르면, 2002년 6월 미국 중앙정보국은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에게 조선의 핵무기개발현황을 분석한 ‘국가정보평가서’를 제출하였는데, 거기에는 “1997년 이후 정밀기술, 핵탄두설계정보, 핵무기시험자료 등을 파키스탄으로부터 넘겨받은” 조선이 우라늄을 농축하여 핵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판단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1999년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정밀한 핵탄두설계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미국 중앙정보국은 거꾸로 파키스탄이 핵탄두설계정보 등 핵무기기술자료를 조선에게 넘겨준 것으로 오판하였고, 조선이 파키스탄에서 핵무기기술을 이전받아 핵폭탄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오판하였다. 오판이 더 큰 오판을 낳은 것이다.

 

2019년 5월 20일 <자주시보>에 실린, ‘파키스탄과 리비아를 거쳐 미국에 간 조선의 핵탄두설계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내가 상세히 논한 것처럼, 6.25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말, 소련으로부터 핵폭탄설계도와 무기급 플루토늄 200kg을 입수하고 핵무기제조기술을 전수받았던 조선은 1960년대 중반에 핵폭탄을 10발 정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1998년 5월 30일 파키스탄 발로치스탄주 차가이사막에 건설된 임시핵시험장에서 비공식 핵시험을 진행하였으며, 1999년에 평양을 방문한 파키스탄 핵무기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에게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핵탄두 3발을 보여주고 핵탄두설계도 사본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미국 중앙정보국은 그런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국가정보평가서’에 뚱딴지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뚱딴지같은 소리가 담긴 ‘국가정보평가서’를 읽은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의 핵문제에 대해 오판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전략적 오판에 빠진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1999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기술자료를 넘겨받아 핵개발을 시작했으니, 2005년쯤 되면 일류쉰-76 전략수송기에 실을 크고 무거운 ‘원시적인 핵폭탄’이나 한 두 발쯤 만들지 않을까 예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핵협상을 외면하고, 미사일협상에 매달렸다.  

 

(2) 1991년에 파키스탄은 중국에서 탄도미사일을 수입하였다. 미사일을 해외에 수출하는 경우 사거리를 300km로 제한하고, 탄두중량을 500kg으로 제한한다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을 준수하는 중국은 사거리가 290km밖에 되지 않는 전술미사일을 파키스탄에 수출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산 전술미사일을 역설계한 복제품을 만들어 1997년 7월 4일에 시험발사를 진행하였는데, 당시 파키스탄이 절실히 요구한 것은 전략미사일이었다. 핵탄두를 장착할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에게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지원해줄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다. 중국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수출규정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로씨야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그 두 나라에게 전략미사일수출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압둘 카디르 칸은 당시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에게 조선의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전수받는 의견을 내놓았다. 칸의 의견을 받아들인 부토 총리는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날은 1993년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29일이었다. 영국 출신 언론인들이며 국제정치저술가들인 에이드리언 레비와 캐더린 스캇-클락이 공동집필하여 2007년 10월에 펴낸 ‘속임수: 파키스탄, 미국, 국제핵거래음모’라는 제목의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에 도착한 부토 총리는 김일성 주석에게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관해 하소연하였고, 인디아 내륙 깊숙이 날아갈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미사일설계도를 요청하였다. 부토 총리의 하소연을 들으며 미국으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생각한 김일성 주석은 파키스탄을 도와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 주석은 부토 총리가 평양을 떠나기 전날 밤, 화성-7 설계도가 저장된 컴퓨터 디스크 보따리를 그에게 주었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화성-7은 사거리가 1,500km이고, 5축10륜 발사대차량에 싣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이다. 화성-7 탄체에는 우리글 자음 ㅈ과 9개 자리 숫자가 일련번호로 새겨져 있는데, ㅈ은 전략미사일이라는 뜻이다. 당시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아직 갖지 못했다.    

 

파키스탄은 화성-7 설계도를 받았으나, 그들의 기술로는 전략미사일을 만드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신속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다급한 심정을 안고 1994년에 조선을 찾아온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에게 조선은 화성-7 완제품 10발을 넘겨주었고,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을 파키스탄에 파견하여 전략미사일개발을 직접 지도해주었다. 그렇게 되어 파키스탄은 1998년 4월 6일 화성-7을 복제한 중거리탄도미사일 가우리를 시험발사할 수 있었다. 

 

인디아의 핵공격위협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파키스탄에게 보내는 조선의 지원과 방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조선의 전폭적인 기술지원을 받아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만들었으나, 핵탄두를 가우리에 장착할 만큼 핵무기를 소형화, 경량화하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은 1999년에 조선을 또 다시 찾아갔다. 조선은 그들에게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 실물 3발을 보여주면서 핵탄두설계도가 저장된 방대한 분량의 컴퓨터 파일 복사본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탄도미사일 200발도 수출하였다. 조선이 탄도미사일을 한번에 200발씩 대량수출한 것은 엄청난 미사일생산능력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핵탄두설계도를 파키스탄에게 넘겨주었다는 극비정보는 알지 못했고,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화성-7 제조기술을 이전하고, 탄도미사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다는 정보만 파악하였다. 중앙정보국의 정보보고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백악관은 조선의 미사일기술이전을 차단하고, 미사일생산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에 매달리게 된 사연이다.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앞길을 밝혀주는 6.15공동선언을 채택, 발표하였다. 민족의 가슴마다 통일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미사일협상을 진행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은 미사일협상을 넘어 원대한 목표를 지향하였다. 미사일협상이라는 강력한 지렛대로 백악관을 움직여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거하는 자주와 평화의 대격변을 일으키고, 6.15공동선언에 명시된 연방제통일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으려는 것, 바로 이것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은 미사일해법으로 펼쳐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는데, 2001년 3월 22일 미국 외교문제협의회(CFR) ‘한반도변화관리특별전문의원회’가 부쉬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서한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조선이 미사일수출을 중단하는 것에 상응하여 미국은 매년 10억 달러를 현금 또는 현물로 보상한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조선의 인공위성발사를 지원해주는 것에 상응하여 조선은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 및 생산을 중단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가입한다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이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12월 안으로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합의방법과 합의시한까지 제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받은 클린턴 대통령은 이것이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호기임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시기인 2000년 12월 중에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협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커다란 걸림돌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클린턴 대통령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00년 10월 1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와 일행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접견한 뒤에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조명록 차수는 먼저 국무부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백악관으로 출발하기 직전 양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에 들어섰다. 위의 사진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 옆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리용호 부상의 모습이 보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웬디 셔먼 국무부 특별보좌관의 모습이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받아가지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으로부터 방문보고를 받은 직후 백악관에서 대책회의를 소집하였다. 2001년 5월 1일 서울에서 발간된 <민족 21>은 그 대책회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해주었다. 

 

대책회의에는 주한미국대사 출신들인 제임스 릴리, 제임스 레이니, 도널드 그렉, 그리고 사회과학연구협의회 동북아시아협력안보프로그램 책임자 레온 씨걸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레온 씨걸은 클린턴 대통령의 조선방문을 지지하는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제임스 릴리와 제임스 레이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검증하기 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도널드 그렉은 조선과 미사일협상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확인한 뒤에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좋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절충안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게 되어 2000년 11월 1일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조미미사일협상이 진행되었다. 

 

미사일협상에서 조선은 미국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실행하려는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2000년 12월에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이 최종적으로 타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에 감돌던 지배적인 의견은 신중론이었다. 신중론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가 뒤엉킨 오판이었다.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기 직전 기자회견에서 이야기했던 다음과 같은 극적인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바로 어제(2000년 10월 23일) 우리는 대집단공연(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뜻함-옮긴이)을 함께 관람하던 중에 조선의 대포동미사일(인공위성 광명성-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백두산위성운반로켓을 뜻함-옮긴이)의 영상이 (공연장 배경대) 화면에 나타났다. 바로 그때 김정일 위원장이 나에게 이것은 첫 번째 위성발사이며 동시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진정성 있는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진심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신중론자들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자신의 발걸음을 붙잡아버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좌고우면하며 어물어물하던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 21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김하중은 2015년 1월에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건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조선의 미사일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자신의 조선방문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2001년 1월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워싱턴에 초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튿날 클린턴 대통령은 유엔주재조선대표부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워싱턴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허망한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통령 권한을 당선인 부쉬에게 넘겨주고 사실상 자연인으로 돌아간 클린턴과는 정상회담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2000년 11월 7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복잡한 선거개표문제 때문에 12월 13일에 가서야 당선이 확정된 부쉬는 클린턴의 조선방문을 반대하였으므로, 정상회담은 고사하고 미사일협상마저 중단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해법을 타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 보나마나,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거기에 장착되는 메가톤급 열핵탄두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미국은 국가안보파탄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악관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그로써 국가안보파탄위험이라는 불행 속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1998년 4월 6일 파키스탄은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시험발사하였다. 발사대차량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른 그 미사일은 9분 58초 동안 비행하면서 정점고도 350km에 도달하였고, 1,100km를 날아가 발로치스탄 사막에 설치된 타격목표에 명중하였다. 파키스탄에 파견되어 미사일개발기술을 전수해온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은 그것으로 자기 임무를 완수하였다. 

 

1998년 5월 어느 날, 귀국을 앞둔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에게 칸은 우라늄농축장비인 P-1(1세대 원심분리기) 20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내겠다고 하였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은 이왕이면 P-2(2세대 원심분리기)를 달라고 했다. 칸은 상부와 협의하고 나서 그들이 요구한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감시하던 미국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가 조선에 넘어간 것을 알았다.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그 원심분리기를 역설계하여 독자적으로 원심분리기를 개발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앙정보국은 감시의 눈초리를 조선의 우라늄농축에로 돌렸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이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가지고 귀국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2002년 10월 3일 아침, 미국 공군 수송기 한 대가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미국인 8명이 내렸다. 그들은 미국 대표단 성원들이었다. 대표단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단장으로 하고, 대조선교섭담당 대사 잭 프릿처드, 코리아과장 데이빗 스트로브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던 2002년은 조미관계가 악화된 때였다. 2002년 1월 29일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조선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모독하는 폭언을 내뱉었고, 2002년 5월 국무차관 존 볼턴은 부쉬보다 한 술 더 떠서 조선, 이라크, 이란, 리비아, 수리아, 꾸바를 모조리 싸잡아 ‘악의 축’이라고 모독하는 2차 폭언을 토해냈다. 폭언과 모독의 광란은 협상을 중단하고, 대결을 재개하려는 흉심의 표출 이외에 다른 게 아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02년 1월 29일 조지 부쉬 대통령이 연방상하원 앞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장면이다. 그의 뒤에서 딕 체니 부통령과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이 손뼉을 치고 있다.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조선, 이란, 이라크를 이른바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폭언을 내뱉었다. 그가 그런 폭언을 내뱉은 것은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진행해오던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을 완전히 중단하고, 조선에 대한 핵대결도발책동을 시작하려는 흉심의 표출이었다. 부쉬 행정부는 2002년 10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2003년에는 조선에 대한 핵대결을 도발하여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한 제2차 조미핵위기는 그렇게 조성되었다.     

 

조선과 미국이 그처럼 험악한 분위기 속에 있었던 때에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사연은 2009년 11월 18일 데이빗 스트로브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연합뉴스> 취재기자에서 털어놓은 회고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2002년 10월 국무부 코리아과장으로 미국 대표단에 망라되어 조선을 방문하였던 스트로브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2002년 10월 3일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한 첫날 오후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각각 양측 수석대표로 하는 협상이 진행되었다. 켈리 차관보는 “우리는 조선이 고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추궁발언을 꺼내놓았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김계관 부상은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조미관계의 진전을 바라지 않는 자들의 책동”이라고 맞받아쳤다. 첫째날 협상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둘째날 오전에 협상이 재개되었는데, 켈리 차관보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알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추궁발언을 또 다시 꺼내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셋째날 오후 5시에 마지막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김계관 부상보다 직급이 높은 강석주 제1부상이 나왔다. 그는 “어제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고위책임자들이 회의를 진행하여 논의한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30분 동안 발언하였다. 

 

스트로브는 2009년 11월 서울에서 만난 취재기자에게 자신의 회고담을 들려줄 때, 강석주 제1부상의 발언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켈리 차관보의 발언내용만 주로 언급하였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황은 덮어두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황만 드러내는 화술이다. 

 

켈리 차관보가 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의혹을 물고 늘어지자, 강석주 제1부상은 “그런 것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보다 더 강한 것도 있다”고 맞받아치면서, “미국이 우려하는 문제를 담판으로 해결할 수 있다. 최고령도자급 회담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주 제1부상의 위와 같은 발언은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자인한 것이 아니라, 2000년 12월에 성사될 뻔하다가 부쉬의 반대로 무산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핵문제를 해결하자는데 강조점을 찍은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조미정상회담밖에 없으므로, 당시 부쉬 대통령이 조선을 ‘악의 축’으로 모독하면서 조미관계를 악화시켰지만, 그런 그에게도 과거를 묻지 말고 조미정상회담을 다시 준비하자고 제안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였다.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그러나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를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와 회담하는 중에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사실상 인정하였다느니, 또는 조선이 원심분리기 제조에 사용할 고강도 알루미늄관을 수입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마구 떠들어댔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2002년 10월부터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진 까닭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미국이 채택, 발표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미국은 조선에게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지어주기로 하였고,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명의로 작성한 공약이행담보서한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으면서도 착공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997년 10월에 착공식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공약이행시한으로 정해진 2003년이 눈앞에 다가온 2002년 말이 되자, 부쉬 행정부는 미국이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미국의 일방적인 합의파기는 핵대결도발음모로 이어졌다. 정세는 극도로 긴장되고 있었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미국의 핵대결도발과 그에 맞서싸우는 조선의 대응행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함경남도 신포의 금호지구에 있는 경수로 공사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조선이 플루토늄핵시설을 폐쇄하는 것에 상응하여 신포에 100만킬로와트급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건설해주겠다고 공약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네바 기본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담보서한까지 보냈다. 신포 경수로 건설비는 46억 달러인데, 미국은 건설비의 70%인 32억2천만 달러를 김영상 정부에게 떠넘겼다. 클린턴 행정부가 경수로 건설비를 한국, 일본, 유럽연합에게 떠넘기기 위한 경비분담협상을 벌여놓은 바람에 경수로 건설공사 착공은 1997년 8월 19일로 늦춰졌다. 그런데 2002년 10월 부쉬 행정부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경수로 건설도 중단되고 말았다. 미국의 합의파기농간 때문에 한국이 경수로 건설비로 지출한 11억3,700만 달러, 일본이 지출한 4억700만달러, 유럽연합이 지출한 1,800만달러가 하루아침에 허공에 날아갔다.     

 

2002년 1월 부쉬 행정부는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연방의회에 비공개로 제출하였다. 그 문서에서 부쉬 행정부는 조선,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리아가 “즉시적이고, 잠재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도발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 핵공격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 나라들”이라고 지목하면서, 미국 국방부에게 핵전쟁계획을 작성할 것을 요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들이 말한 핵전쟁계획은 선제핵타격계획을 뜻하는 것이었고, 선제핵타격계획에 선정된 1차 대상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는 조선이었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전쟁광신자들이 노골적인 핵전쟁도발책동까지 벌여놓았으니, 조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은 2003년 2월 10일 외무성이 발표한 성명에서 분노를 표출하였다. 

 

“미국이 핵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우리 제도를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는 기도를 명백히 드러낸 이상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고를 늘이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이미 부쉬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고립압살정책에 맞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우리의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위에 명시된 것처럼, 조선은 미국의 핵공격위협에 대응하여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핵무기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겠다고 성명하였다. 조선이 그처럼 명백한 어법으로 성명했는데도,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조선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핵무기개발기술을 이전받은 것으로 오판한 그들은 조선이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할 만큼 크고 무거운 핵폭탄 3~4발을 만들어놓고 허세를 부리는 줄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이 그런 원시적인 핵폭탄을 몇 발 더 만든다고 해도 미국의 국가안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오판하였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그런 착각과 오판에 빠졌으므로, 그들은 2002년 10월 5일 평양에서 진행된 셋째날 협상에서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에게 전한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만일 부쉬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지 않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조선은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미핵대결은 중지되었을 것이며, 조미핵협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전략적 오판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길을 선택하였다. 핵협상을 중단하고 핵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결코 이기지 못하고 종당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핵대결이었다. 

 

미국이 도발한 핵대결은 조선을 핵무기증산과 핵무력완성의 길로 이끌어갔다. 당시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핵대결을 선택한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2017년에 조선은 마침내 메가톤급 수소탄두 기폭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고,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조미핵대결 25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악관의 전략적 오판은 미국의 국가안보를 파탄위험에 빠뜨리는 근본원인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조선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에 단호한 대응조치로 맞섰다. 조선이 2003년 2월 10일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한 것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을 강하게 내리친 대응조치였다. 

 

조선의 핵보유-핵증산 성명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을 이성을 잃고 광분하였다. 그들은 조선에 대한 선제공격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뉴욕타임스> 2003년 2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국 국방부는 조선에 대한 “외과수술식 미사일공격, 집중폭격,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선제공격”을 검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은 선제핵타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공중정찰활동부터 서둘렀다. 2003년 3월 2일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날 오전 탄도미사일발사준비에 관련된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미국 공군의 RC-135S 정찰기 한 대와 통신신호정보를 수집하는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 한 대가 겁도 없이 조선을 정찰하려고 동해 상공에 나타났다. RC-135S 정찰기가 앞섰고, EP-3E 정찰기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정찰비행을 감시하던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그 두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해 강제착륙시키기 위해 미그-29 전투기 2대와 미그-23 전투기 2대를 긴급히 출동시켰다. 뜻밖의 위험에 빠진 정찰기들은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사진 5> 

 

▲ <사진 5> 2012년 1월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군 공군 제1017군부대를 시찰하고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를 지도하였다.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그 부대는 오중흡7련대 칭호를 받은 정예부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군부대 시찰과 전투비행훈련지도를 마치고 부대장의 집을 방문하였다. 위의 사진은 부대장의 집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허룡 부대장과 그의 아내 김성실의 손을 다정히 잡고 걸어나오는 장면이다. 허룡 부대장은 2003년 3월 2일 조선 동해안에서 241km 떨어진 공역에서 정찰활동을 벌이던 미국 공군 RC-135S 정찰기와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하여 강제착륙시키는 항공작전에 출전하였던 4명의 전투비행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정찰기들이 자기들의 접근비행을 포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투기에서 발신되는 모든 전파장치를 끄고 오로지 전투비행사의 육안식별과 비행감각에만 의존하여 해수면을 스치는 듯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240km를 날아가, 15m까지 바짝 접근하였고, 20분 동안 그 정찰기들의 주위를 포위비행하면서 나포위협과 격추위협으로 그들의 정신을 쑥 빼놓았다. 혼비백산한 정찰기들은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허룡 부대장은 이 항공작전에서 세운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미국과 일본이 정찰기 두 대를 동해에 출동시킨 것은 조선에 대한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이었는데, 조선의 전투비행사들은 용맹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미일합동공중정찰작전을 완전히 파탄시켰다.     

 

조선인민군 전투기들은 정찰기 전방에 바짝 붙어 비행하다가 추력엔진을 분사하여 비행을 방해하는가 하면, 어느 새 정찰기 후방에 따라붙어 비행하다가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하는 사격통제레이더를 켜면서 격추위협을 가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가 엄지손가락 하나만 살짝 누르면 공대공미사일이 불을 뿜으며 날아가 그 두 정찰기를 바다에 쳐박을 판이었다. 20분 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두 정찰기는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전쟁광신자들이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이 경악할 사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발칵 뒤집어졌다. 전쟁광신자들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려고 서둘렀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제임스 엘리스 전략사령관에게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미국 전략사령부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2003년 3월 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된 ‘전략핵전쟁계획서’라는 제목의 극비문서다. 

 

미국이 핵전쟁을 도발하려면 계획서는 물론 작전계획도 필요하다. 그래서 미국 전략사령부는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2003년 11월에 완성된 ‘개념계획(CONPLAN) 8022’다. 2004년 6월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개념계획 8022’를 발효시키는 ‘임시적인 전지구적 타격 경계명령(Interim Global Strike Alert Order)’을 전략사령부에 하달하였다. 이 명령은 조선에서 공격징후가 나타나는 즉시, 미국이 지상군을 파견하기 전에 장거리스텔스전략폭격기 B-2 편대와 장거리전략폭격기 B-52H 편대를 재빨리 출동시켜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는 실전준비를 명령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핵안보연구가 핸스 크리스텐슨이 2008년 7월 25일 미국과학자동맹(FAS) 웹싸이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04년 가을 제임스 카트롸잇 전략사령관은 ‘개념계획 8022’를 슬그머니 철회하였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이 광분했던 핵전쟁도발책동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로부터 어언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백악관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기간에 겪었던 실패경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망각의 늪에 빠져있다. 조선에게 리비아식 비핵화를 적용하려는 망상이 망각의 늪에서 독초처럼 자랐다.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망각과 망상의 이중주에 맞춰 어지럽게 오판의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다. 망각과 망상은 2019년 12월이 가기 전에 그들에게 전략적 실패를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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