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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카나다 동포,유동성 선생과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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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8-17 05:31 조회13,8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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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은 카나다에서 열리는 U20여자월드컵 축구를 현지취재중 멀리 벤쿠버에서 참가한 동포 유동성 선생과 만나 카나다 생활을 비롯하여 그의 78개성상의 인생역정에 관해 대담한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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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생 78년을 돌이켜 보는 카나다 동포 유동성 선생
 
 

[연재-5]카나다 동포,유동성 선생과 대담
 
[몬트리얼=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기자는 카다다 방문 조선여자축구(20살이하) 월드컵대회 취재중 카다다 서부  벤쿠버에서 참가한 유동성 선생(78) 만나 그의 카나다 이민생활과 함께  걸어 발자취에 대해 들어 보았다.
 
유동성 선생은 카나다 서부지역에서 김신규 선생과 김원백 선생과 함께 먼길을 비행기를 타고 5시간 걸려 토론토 경기장에 참석하여 조선여자축구선수들을 응원하며 격려한 다음에 자동차로 7시간 걸려 토론토에서 몬트리얼로 왔다. 기자는 이들과 동행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고, 몬트리얼에서 유동성 선생의 인생역정에 대해 들으며 우리민족의 분단과 관련된 안타까운 사연들, 그리고 강원도 북녘땅 통천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에 미군폭격기가 퍼붓는 상황에서 남녘 땅으로 넘어갔으나 아버지가 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된 시기인 1950 1028 세상을 떠나 고생한 이야기, 서울서 고학하며 서울공대를 나와 한국전력 영월화력발전소 등에서 일하며 박정희 군부독재 구조에서 시달리다가 1975년에 카나다로 이민와서 지금까지 40 가깝게 이역땅에서 살아 오다가 2005년에 그립고 그리던 고향인 북녘땅을 밟고 55년만에 친혈육인 여동생을 상봉하고, 그이후 4차례 방북한 이야기들을 들을 있었다.
 
유동성선생의 이민동기는 한국군사독재 정치의 부정과 부패, 부조리가 원인이었다. 그래서 1970년대 해외로 나온 남녘 동포들 가운데에는 대부분 정치적 불안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있다. 20 유학생들 상당수도 도망성 유학이 주요 원인이었다. 식당이나 다방에 가도 박정희 군사정변이나 이들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 한마디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75 카나다 벤쿠버에 도착했을 서울공대에서 배를 제조하는 조선업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카나다 역시 오일파동으로 조선업이 활발하지 못해 곧장 취직자리를 얻을 없었다. 그래서 원동기 기술면허시험을 합격하여 원동기 회사, 제재소 등에서 7년동안 민간회사  직장생활을 했고, 1982 카나다 국방부 해군청에 선박검사원 자리가 있어 시험을 치고 입사하여 이후 20여년 동안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몇년 은퇴할 있었고, 이후에도 은퇴연금으로 생활하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기자가 유동성 선생의 카나다 생활에 대해 좋은점들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무료의료제도와 교육제도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비교적 범죄들이 적은 편이라고 전제하는 한편 카나다에는 무엇보다 색깔논쟁이 없는 나라라고 만족해 한다. 선생이 이렇게 설명하는 저변에는 한국사회나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해외동포사회가 한국의 색깔론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지적한다.
 
방북 4차례를 하면서 북에 대한 인상에 관한 그의 소감을 묻자, 그는 이북에 가면 이북동포들이나 이북 언론들이 이남 동포들에 대해 적개심이 없는 것이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대답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북동포들이 우리민족의 통일을 방해 해온 미국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북을 다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되돌아 본다.
 
유동성 선생은 북을 알게되면서 남녘의 언론들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언론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왔는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하면서 그래서 미국 주요잡지인 타임지, 뉴스위크지, 이남 잡지 등을 모두 끊었고, 심지어는 내셔널 지오그라피 같은 학술지향 잡지까지도 정치냄새를 풍기며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것도 구독을 잘라 버렸다 고백한다.
 
그는 카나다 관영방송인 CBC방송을 비롯하여 주류언론들의 보도지향도 왜곡투성이라고 말하면서 특히 요즘의 우크라이나 사태나 조선에 관한 보도들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지적하며 한국언론들과 서방언론들의 거짓보도 내용들을 소개하며 왜곡투성이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유동성 선생은 이러한 서방언론들의 거짓보도들 때문에 80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해내외 진실언론들의 기사들을 이멜로 친지들에게 보도자료들을 소개해 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진실언론들과 관련하여 자주민보, 주권방송, 민중의 소리, 사람일보, 통일뉴스 등이 남녘 진실언론들이고, 해외언론으로는 민족통신을 비롯하여 4언론, 글로발 리서치 이라고 꼽는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성격의 인물로 보인다. 내강외유의 품격을 갖춘 인물이다. 카나다 서부지역에서 통일운동의 주역격인 ‘천담회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어디를 가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품성을 지니고 있어 그에 대해 깊은 내용을 아는 동포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관찰 있었다.
 
그는 이남에서 춘천고등학교를 매년 수석으로 진학했고 고등학교 재학시절 검정고사를 치고 월반하여 서울공대에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시절에도 가정교사로 고학을 하며 대학생활을 하였지만 우등생으로 졸업한 수재로 알려졌다.
 
카나다 벤쿠버에 거주하면서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는 김신규 선생도 그의 인격에 대해 똑같은 평가를 준다.
 
그는 1936 5 북녘 땅에 위치한 통천에서 20여세대가 옹기종기 살고 있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사람이고 어머니는 통천사람이다. 그의 부모는 1947 서울로 갔고, 그는 잠정적으로 외가집에서 여동생과 함께 부모와 떨어져 살고 있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외삼촌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가서 부산에서 살았다. 그 동안 서울에서 아버지가 돌아올때를 기다리던 어머니 연락이 있어 서울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편  아들 딸을 데리러 외가가 있는 통천으로 갔다가  미군의 폭격사태로 전쟁개시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유동성 선생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어머니를 만단  춘천으로 옮겨 외삼촌과 함께 살면서  춘천고등학교를 다녔다. 고교시절에도 대학교를 빨리 들어가려고 검정고사에 합격하여 월반하여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때 춘천고등학교 교장선생이 그의 가난한 생활을 알아채리고 대학등록금을 대납해 주기도 했다.
 
유동성 선생은 인생말년을 민족분단을 끝장내는 평화통일 운동사업에 기여하는 것을 가장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같다.  그는 천담회대표를 맡고 활동하면서도 6.15카나다지역위원회 카나다서부지역 위원장을 맡고 있고, 재카나다동포연합의 활동에도 힘을 실어주며 참여하고 있다. '천담회'는 백두산의 천지에서 '천'자를 땃고, '담'은 백록담의 '담'에서 딴 것이라고 해석해 준다.
 
그는 매일 수영을 하며 체력을 단련해 왔고, 매일 저녁 일정한 시간에 걷기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보살펴 왔다.()
     
[연재-1]카나다 동포들의 삶의 현주
 
[연재-2]카나다 동포들의 삶의 현주
 
[연재-3]카나다동포들의 삶의현주
 
[연재-4]카나다동포들의 삶의현주
 
 
 


***[속보]조선,미국격파 4강진출권 쟁취 (주요 장면 동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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