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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48년 남북연석회의 참가했던 류금수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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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5-08-24 00:00 조회10,9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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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서울서 열린 815민족대축전 기간에 57년 전 평양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 남녘에서는 마지막 생존자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류금수.

21살 때인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해 최 연소자로 알려졌던 류금수여사(79)는 남녘 땅에서는 유일한 참가자로 생존하고 있는 인물. 그는 이번 8.15민족대축전 행사에 참가했다. 기자는 그를 서대문 형무소 참관 중 발견하고 뒤쪽 정원에 앉아 짧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바로 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적도 있었다고 설명하며 "5년 구형을 받고 항소 중이던 1950년 인민군에 의해 출옥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충청북도 괴산에서 천석군 자식으로 태어나 청주여고에 다니면서 스트라이크 하다 퇴학도 맞았고 중앙대학에 들어가서는 사회반항 운동을 하다가 말썽 학생이 된 적도 있었지요. 학교를 나와서는 남로당 여성동맹 회원으로 활약도 했지요. 이런 활동 때문에 내 이름도 쓰지 못하고 가명으로 지내면서 미혼이었는데 남의 둘째 처라고 하면서 내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했어요. 그런데..."라고 말하고 담배를 꺼내 피운다.

류금수 여사가 그런데...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 가슴 조이며 살아온 긴장의 세월, 90년에는 민자통 활동, 그 후에는 범민련 활동 등으로 자주, 민주, 통일운동에 참가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데..."라고 말한 부분은 그가 고생을 해 온 과거의 발자취가 아니라 그가 관여했던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의 문제였다. 류 여사는 담배를 길게 내 뿜으며 "난중에 알고 보니 미국 스파이 노릇..."라고 잘라 말한다.

박헌영이가 미국 첩자노릇 하였다는 것은 미국에서 민족민주운동으로 평생을 보낸 원로 선우학원 박사도 직접 확인해 준 적이 있었다. 선우 박사가 김일성 주석에게 보낸 편지를 박헌영을 통해 전달하려고 인편에 보냈는데 그것이 전달되지 않고 미국 중앙정보국으로 넘어가 체코에서 미국으로 돌아 온 후 2주만에 미 공안 당국으로부터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시기에 그 사실을 알게된바 있었다.

류 여사는 그런 사실이 못내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외세에 의해 민족이 분단되어 가슴 태우던 시절 가장 어린 나이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남북연석회의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 본다. 일제 36년이 청산되고 8.15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미국의 아시아지배정책에 의해 전범자인 일본의 허리가 잘리지 않고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시키기는 비극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1948년 4월20일부터 25일까지 평양에서는 이른바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어 백범 김구를 비롯하여 남북의 56개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 5백45명이 함께 자리를 하고 미 침략세력과 이와 결탁한 이승만 등의 친미친일 세력의 5.10단독선거 강행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며칠 뒤인 5월1일 대동강변 쑥섬에 위치한 자리에서 남북한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어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루자고 결의한 역사적 회합이 쑥섬에서 있었다. 쑥섬에는 북측 로동당 대표 김책을 비롯 홍명희 민주독립당 대표, 백남운 근로인민당 대표,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한독당 대표, 최동오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종항 북측 인민위원회 서기, 그리고 정진석 남측 신문기자단 대표 등 11명의 각계 남북한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사를 토의했었다. 이때 남북지도자들은 남북 국민의 의사에 배치되는 남한 단독선거와 그에 기초해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남북연석회의>는 해방 후 처음으로 천만여명이 당원과 회원을 망라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미국 지배세력의 민족분열정책을 반대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한 역사적 회합이었다.

류금수 여사는 이중 한 명이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에 대한 인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주석님이 아마도 30대 후반쯤 되었지요. 미남, 호남인데 그 인자한 웃음...체격도 좋고 전체 인민을 다 포섭할 수 있는 위풍을 가진 인물이지요. 이번에 온 북측 대표단 중 성자립(김일성 대학 총장)대표의 아버지도 여기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었고, 김일성 주석님의 인척중 한분도 여기서 돌아가셨지요."라고 말한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강점시기에 사용되던 감옥인데 해방되던 1945년 이후부터 1987년까지 무려 42년 동안 운영되어 왔다. 고문과 창자가 터져 나오는 피투성이의 고문들이 횡행하던 곳이었다. 조봉암 사건, 통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등으로 끌려 들어간 애국자들이 바로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형무소에 남북 해외동포들이 8.15광복 60돌을 맞아 이곳을 찾았다. 이에 앞서 북측 대표단은 국립묘지(헌충원)를 방문하였다고 남녘의 신문들과 방송들이 온통 대서특필로 다뤘다. 류금수 여사는 이런 사실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다. 그의 표정에서 7천만 겨레가 그토록 염원하던 통일의 날도 멀지 않았다는 기대에 찬 희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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