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남북수뇌회담에 가슴벅찬 원로들/이활웅선생과 양은식박사 만나 기쁜대화/소년시절:일일천하 <불량소년단장> > 인물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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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남북수뇌회담에 가슴벅찬 원로들/이활웅선생과 양은식박사 만나 기쁜대화/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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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9-26 09:52 조회6,8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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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통일운동 진영의 원로인 양은식박사(84) 지난 923 일요일 그라나다 힐스에 거주하는 이활웅선생(93) 찿아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아주 오랜만의 만남이다. 서로 전화를 하게 것은 남북수뇌들의 평양상봉과 <9월평양공동선언> 나오기 것이 계기가 되었다.이들은 이선생 자택에서 그리고 인근 식당에서 서로 환담을 나누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뜨거운 만남을 축하하기도 했다.[민족통신 편집실]


 

이활웅-양은식대담20180923-01.jpg

이활웅선생(93)과 양은식박사(84)의 오랜만의 만남

 

한완상 통일부장관 23 방북 소감

https://youtu.be/My50QqpCFDc

 

 

 

[]남북수뇌회담에 가슴벅찬 원로들

이활웅선생과 양은식박사 만나 기쁜대화

 


이활웅-양은식대담20180923.jpg

 

[그라나다 힐스=노길남 편집인]미주통일운동 진영의 원로인 양은식박사(84)가 지난 923일 일요일 그라나다 힐스에 거주하는 이활웅선생(93)을 찿아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다. 서로 전화를 하게 된 것은 남북수뇌들의 평양상봉과 <9월평양공동선언>이 나오기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이들은 이선생 자택에서 그리고 인근 식당에서 서로 환담을 나누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뜨거운 만남을 축하하기도 했다. 

 

두분은 모두 최근에 쓸쓸한 나날들을 보내며 생활해 왔다. 두분의 사모님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선생 부인 김옥희여사는 1년반전(2917328)에 그리고 양 박사 부인, 서정숙박사는 금년 봄(2018128)에 각각 저 세상으로 떠났기 때문에 그동안 적적한 생활로 어려움을 겪어 오던 중이었다   

 

 

그러나 조국반도 정세에 봄바람이 불어오고 해내외 동포사회에 통일의 봄이 오고 있어 이들 원로들도 그 바람에 외로웠던 마음들이 훈풍에 따뜻해 지는 것 같았다.

 

두분의 대화가운데 이들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양은식박사는 지난 몇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른 아침 산책을 하며 건강을 단련했다. 코로나에서 큰 아들이 사는 컬버시로 이사를 와서 살면서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아침 저녁 두블럭 떨어져 사는 큰 아들이 매일 같이 방문하여 약을 챙겨주고 아침, 저녁 식사를 챙겨주는 효자노릇 때문에 양박사는 흐뭇해 하면서 어려서부터 장남노릇 잘 해 왔다고 설명하면서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미국 대통령 자녀들이 많이 다녔던 보스턴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에 보내기도 했다.”고 밝힌다. 21녀 모두 좋은 직장에서 일하며 아버지에게 잘한다고 말한다.

 

이활웅선생 자녀들도 효자 효녀이다. 버클리에 아들이 살고 있고, 시카고, 뉴올리언스 등에 4자녀가 살고 있는데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돌아가면서 이 선생이 혼자사는 집에 와서 주말을 함께 지내고 돌아간다고 설명해 준다.

 

 

이제 이활웅선생은 부인이 가신 고독을 견딜수 있어서 최근에는 지난 시기에 쓰다가 못다 마친 인생회고록을 정리중에 있다고 밝힌다.

 

두분 원로들은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성공적인 정상회담의 장면 장면들을 보면서 기뻐했다고 고백하면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 하루 속히 이뤄질 것을 확신한다고 반응한다.  

 

 

 

이활웅선생의 소년시절 회상

 

 

일일천하 <불량소년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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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활웅선생은 이미 자신의 인생역정을 기록한 글을 거의 탈고한 상태에 있다. 도서출판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제목은 <꿈도 꾸고 해몽도 하며…-38따라지의 인생회고->라고 씌어있다.

 

큰 제목 아래 작은 제목들이 10개가 된다. (1)애매한 국적, (2)불량소년단 단장-나진 삼성소학교, (3)해방/서울/월북, (4)정훈장교 3기생-실증난 군대생활, (5)외무부 생활, (6)물속에서 배운 헤엄, (7)어머니 눈물(중국 여행기),불효, (8)통일지향인-통일기고, (9)즐거운 우리집 4자녀, (10)미상

 

기자는 이활웅선생의 인생회고 원고를 보다가 두꺼운 책 한권의 분량이라 짧은 시간에 다 볼 수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제목이 <두번째 이야기:일일천하 불량소년단장>이었다. 이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은 1940315일 나진 심상소학교에서 발생했다. 이 학교 4학년에 재학하던 조선학생들은 그 당시 이학교에 부임해 온 25살 미혼의 <이즈미 야스오>선생이 학생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을때마다 너희들은 돼지 새끼들(오마에다찌와 부다노 고다!)”라고 소리쳤다.

 

 그는 어린 조선학생들에게 일본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동경을 심어 놓는 한편 툭하면 학생들이 말을 안들을때, 조용히 안하고 떠들때, 공부를 못할 때, 숙제를 안할때, 소제를 깨끗이 안할때, 손톱을 안깎았을때, 지각할때, 무단 결석했을 때, 수업료가 밀릴때, 그의 기분이 잡칠 때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가 너희들은 돼지 새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학급 학생들이 수신시험에서 급장 한 학생만 80점 이상 점수를 받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죄다 80점 이하였다는 것이다. 이날도 다른 때와 똑같이 너의들은 돼지 새끼들이라고 소리치며 너 같은 놈들이 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이어서 차라리 퇴학해서 집에서 부모들 일이나 돕는편이 낫겠다고 하면서 지금부터 30분 시간을 줄테니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 아니면 퇴학해서 집에서 일을 도울것인지 결정하라는 말을 던지고 교실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몇 학생들은 급장이었던 이활웅 소년을 향해 선생한테 찾아가서 잘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급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가만이 있다가 교단으로 올라가 학생들을 향해 , 우리 차라리 모두 다 같이 퇴학하는 것이 어떻니?”하는 생각을 던지자 아이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도저히 믿어지 않는 않는 일이었다. 급장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전 학급에서 가장 모범생으로 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얌전하고 온순해서 선생님의 절대적인 총애와 신임을 받아온 급장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급장은 드디어 교직원실에 가서 이즈미 선생에게 퇴학하겠다고 통고했다. 이즈미 선생은 놀란표정이었지만 태연한 자세를 보이며 알았다. 그러면 다같이 퇴학해라!”라고 답변했다.

 

교실로 돌아 온 급장은 동료학생들에게 퇴학을 통고했다고 알리자 신나는 목소리로 다들 좋아했다. 그러던중 한 학생이 그렇다고 우리들이 뿔뿔이 헤어지고 말수는 없지 않니?하고 물으면서 <불량소년단>을 만들어 자주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 의견에 대해 갑론을박 한다음에 <불량소년단>을 만들고 그 조직의 단장을 급장인 이활웅을 뽑았다. 이들은 수시로 활동사진(영화) 구경같은 것을 같이 가기로 했고, 왜놈의 종자들을 만나면 때려주기로 하고 일단 내일 아침 9시 나진극장 앞에 모여서 영화구경을 한다음에 다음 행동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는 과정에 어느 학생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중이라도 학교에 다시 들어가려면 <퇴학증명서>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이 나와 이즈미 선생과 이문제로 한동안 옥신각신하였다. 종이가 없는 관계로 당일에 퇴학증명서를 받고 학교를 그만 두는 문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나중에 받기로 했다.

 

학교측은 조선 선생을 내세워 달래보려고도 했지만 학생들은 그들의 설득에 응하지 않았다. 그 선생은 교실로 찿아와 너희들이 이러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헌병대에서 학교에 와사 조사하겠다고 하니 빨리 집으로 가는게 좋겠다.”고도 위협을 주었다. <헌병대>라는 말에 겁이 나서인지 한동안 조용하게 있던 학생들은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하여서 내일 아침 9시 나진극장앞에서 약속한 것을 상기시켜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이활웅소년은 밤새 잠못 이루는 시간을 보냈다. 316<불량소년단> 단장으로서 할일이 무엇이며 단원들을 어떻게 이끌어 갈것인지 이러저러한 생각들로 마음이 벅찬 아침이었다.

 

 

아침9시 학생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않고 다 나왔다. 그러나 혼자 나온 학생들은 불과 서넛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모두 학부모들과 같이 나왔다. 그것은 굳게 지키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래가지고는 어제 결의했던 <불량소년단>의 사업을 추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극장앞에 나온 학생들을 둘러싸고 죽도나 곤봉으로 무장된 학교 교직원 10여명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결의를 좌절시키기 위해 동원된 무력들이었다.

 

이들 무력들은 갑자기 죽도와 곤봉을 휘두르며 우리들에게 이놈들아 빨리 학교로 들어가라!”고 몰아부쳤다.오합지졸이 된 학생들은 하나 둘씩 학교쪽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길가던 행인들은 영문을 알수 없는 이 기이한 행렬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량소년단단장>으로서이 이활웅소년의 천하는 24시간도 채 되기 전에 이렇게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고 회고한다.

 

학교측에서는 연필과 종이 석장씩을 주면서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빠짐없이 써내라고 했다. 이 자술서를 쓰는데 손과 팔이 아팠다. 학부모들에게 욕먹고, 선생들에게 매맞고,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분노를 느껴 실망, 좌절감을 가졌지만 이런 감정이 사라지면서 한편으로는 자신감과 용기가 되살아 났다. 이즈미 선생은 학생들이 쓴 자술서들을 한 아름 거두어 나갔다. 그리고 오후부터 정상수업을 한다고 말했다.

 

이즈미 선생은 그후부터는 일체 <우리들이 돼지새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풀이 죽었던 학생들도 점차 생기를 되찿았다. 4학년 종업식때 낙제한 학생도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5학년으로 올라갈때 우등생 한명이 이활웅소년 단 한명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금도 의아해 하고 있다.

 

 

더욱더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징계를 주지않으면서도 이상한 것은 이즈미 선생이 더 이상 이 학교에 있지 않고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활웅소년은 아무 탈없었는데 이즈미 선생이 시골학교로 전근되어 간것에 대하여 그의 마음은 다시금 착잡해졌다고 한다. 이즈미 선생은 그 사건 이후에 우리들에게 우리의 행동에 기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즈미 선생은 사람은 언제나 정직해야 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의를 보고 외면하는 자는 짐승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또한 사람은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면서 비겁한 인간은 벌레만도 못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우리들은 그의 이런 철학도 많이 배웠다고 생각한다. 우리들과 우리민족을 비하하고 우리들이 잘못하면 <돼지 새끼들>이라고 욕하는 것 이외에는 학생들에게 좋은 점들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고 이활웅선생은 돌이켜 본다.

 

그는 이어 일제는 우리 땅에 조선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많이 세우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소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함경북도에 조선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중등학교로는 나남, 청진, 및 나진에 여학교가 하나씩 있었고, 남자 중학교로는 주로 일본인들이 다니지만 조선아이들이 예외로 한두 명 다니던 나남중학교와 조선아이들만 다니던 북경성중학교가 있을 뿐이었다. 그외에 중등학교로는 북경성과 길주에 농업학교, 회령에 상업학교, 그리고 청진에 수산학교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갈수록 양상이 어려워지는 중일전쟁에 식민지 조선인들을 더욱 많이 동원시키기 위해서 조선사람들의 환심을 살 요량으로 소위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서 중학교도 각도에 두세군데씩 더 세우게 되었는데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서 이활웅소년이 5학년 되던 해에 청진, 성신, 나진에 중학교를 세웠다.

 

이활웅소년은 소학교를 졸업할때 학교측의 불공정한 입장으로 K중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나진중학교에 가게 된것에 대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것이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도 아쉬운 기회로 남아있는 표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학교 졸업때 1등성적을 받았는데 그 당시 담임선생이 또다시 2등학생이 중학교를 못가고 취직을 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게 도지사상을 받는 것을 그 학생에게 양보할 수 없겠느냐고 하여 그것도 양보했다. 이 경우는 가난한 학생이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만철에 취직하게 되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래서인지 중학교 생활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이 알고 보니 K중학교에 못간것은 후루모도 교장이 헌병대의 압력을 받아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그후 1945년 해방이 되어 일본사람들은 물러가고 38선이 생겨 남북간 황래가 어려워졌는데 3년이 지난 1948년 이활웅선생은 가족을 따라 서울로 이사갔다. 을지로 3가 적산아파트를 하나 작만하고 그곳에서 살게되었다.

 

이활웅선생이 그의 소학교 이야기(나진 심상소학교와 나진약초학교)에 대하여 쓰면서 그 당시 2년 후배인 이민형씨가 1990년께 로스엔젤레스에 와서 살게 되어 그와 함께 가족처럼 지내왔다. 199210월 어느날 그와함께 동맹퇴학 소동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인생회고 한 장으로 쓰게 되었다고 그 사연을 이야기해 준다.

 

 

그는 자신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불량소년단 사건>과 이즈미 선생의 좌천 사건이 심상소학교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면서 이 사건의 기록이 이 학교 역사에 남아 있는지 78년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기록의 여부를 알고 싶다고 말한다.

 

 

 

 

 

*양은식박사 사모 서정숙박사 장례식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670&page=0

*이활웅선생 사모 김옥희여사 장례식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163

[이 게시물은 편집실님에 의해 2018-10-03 03:40:39 사회, 문화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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