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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47]제3세계의 눈으로 식민지 한국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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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5-10 12:09 조회3,1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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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우크라이나는 면적이 프랑스보다 조금 큰 나라이며 러시아 보다는 조금 작은 나라로서 유럽에서 두번째로 지형이 큰 나라이다.  한반도의 2.7배에 달하는 땅이경작이 가능한 땅이다.  광활한 산림과 습지가 있으며 3천개의 강이 흐르는 유명한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보리, 호밀, 귀리, 사탕무, 양귀비 그리고 광활한 방목지와 풍부한 목재 등 다양한 농산물과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고 밝힌다. 그의글 전문을 싣는다. [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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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47] 3세계의 눈으로 식민지 한국을 파헤친다
 
                 
<친미, 제국주의>로 망한 우크라이나
                
<친로, 민족주의>로 살길 새로 찾는다.
    
 
미국에 속아서 비핵화 핵을 포기한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글: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우크라이나는 면적이 프랑스보다 조금 큰 나라이며 러시아 보다는 조금 작은 나라로서 유럽에서 두번째로 지형이 큰 나라이다.  한반도의 2.7배에 달하는 땅이경작이 가능한 땅이다.  광활한 산림과 습지가 있으며 3천개의 강이 흐르는 유명한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보리, 호밀, 귀리, 사탕무, 양귀비 그리고 광활한 방목지와 풍부한 목재 등 다양한 농산물과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기원전 7-4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족이 이지역을 지배했으며 AD 8세기-10세기에는 비잔틴 지배하에서 동방교회를 받아들임으로서 비잔틴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됬다. 그 후부터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외세가 개입되지 않은 시기를 찾아 볼 수 없다.
 
1520년에 우크라이나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 갔으며 그후에는 코사크폴란드와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크라이나는 비운이 연속되였으며 고난속에서 자치주의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1840년에 우크라이나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서 우크라이나어의 사용을 금지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1차 세계대전후에 러시아 제정 군주제가 붕괴됨으로서  우크라이나는 독립를 쟁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수 없이 많은 당파들의 분쟁과 내전이 계속됨으로 인하여 무정부 상태에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200년간 지배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우크라이나는 140만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1982년에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연방제로 편입되여<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이 되였으며 여전히 소련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 거대한 <레닌 핵발전소>를 건설했다.  그런데 그거대한 레닌 핵발전소에서 1986년에 이른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셍했다. 구 소련이 우크라이나에 레닌 원자력발전소 4호로 (흑연감속 RBMK, 1000kw)를 건설 했는데 역사상 최악의 원자로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에 대한 염려가 유럽 전역을 공포분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 체르노빌 원전 핵사고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 지는 소련의 정보가 제한됬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체르노빌 핵발전소 부근 30킬로미터에 출입금지구역을 설치했는데도 불구하고 1만명이 생명을 잃었다고 현장의 소식이 전세계에 전해지고 있었다.
 
소련은 구 소련 연방제가 해체되여 우크라이나를 떠나 갔다.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떠나갈 때 당시 <바르샤바 조약>의 중요한 거점이였던 우크라이나에 소련이 배치했던 핵탄두는 저어도 1,000-1,400 여기 있었다. 그런데 소련은 그렇게 많은 핵탄두를 우카라이나에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갔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에서 핵탄두를 회수하고 싶었지만 소련 내부가 혼란기이였기 때문에 지연되고 있었었다.  동시에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 많은 핵탄두를 소련이 회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방해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우크라이나는 그 때 당시 세계에서 제3위의 핵보유국이 되고 있었다.   
 
                          
 1. 소련의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1990년에 우크라이나는 처음으로 독립국이 됬다. 그 후 우크라이나의 간추린 역사를 살펴본다.  
 
소련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였다.  1990년에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옐친 대통령과 직접 평화롭게 협의하여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분리되여 독립국이 됬으며 1991 12 1일에 우크라이나는 최초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가 선거에 당선되여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이된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은 소련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소주의자로서 소련 공산당을 탈퇴하고 친서방의 정치적 노선을 선택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운동이 소비에트 연방제를 붕괴시키는 촉진제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수 백년동안 강대국들과 특히 제정 러시아 스탈린 정권의 억압 통치를 받아오다가 갑자기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에 많은 혼돈과 어려움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이된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은 혼란스러운 정국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은 오직 <반소친서방>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을뿐 경제정책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다.
 
동시에 소련은 독립하여 분리된 우크라이나에 대하여 모든 지원을 일절 단절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혼란에 빠졌다.  199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말았다.
 
레오니드 쿠치마가 대통령이 되여 제2대와 제3대 대통령으로 1994-2005년 까 11년간 통치를 했다.
 
쿠치마 대통령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공산당원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된 후에 1991년에 공산당을 탈퇴하여 친서방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급전환하여 11년간 우크라이나를 통치했다.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미국과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때 우크라이나에는 구 소련이 떠나 갈 때 남겨 놓은 막강한 핵탄두 1,000-1,400기를 보유하고 있음으로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채르노빌 핵발전소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은 1995년에 미국과 영국의 유혹과 모략적 기만술에 이용당하여 우크라이나가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핵무기를 포기하는 과오를 범했다.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은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에 서명함으로서 구소련이 남겨 놓고 떠나간 막대한 핵탄두를 포기함으로서 비핵화국으로 전락됬다.   
 
레어니드 쿠치마 대통령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서방국들에게 완전히 기만을 당하면서 어리석게도 유럽연합을 선망하여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서명을 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제 4대 대통령으로 빅토르 유센코가 2005년에 취임했다. 유센코 대통령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미녀 국무총리>인 율리마 티모센코를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미녀 여성 국무총리를 외교전선에 등장시켰다. 디모센코 총리는 한국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여 친미정권들과 유대를 공고히하는 역할을 했으며 세
계적으로 친미행각을 전개하여 미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마 티모센코 여성 총리는 2010 2월에 대통령에 출마하여 낙선됬. 그녀는 이른바 <오랜지연대>를 구성하여 선거열풍을 이르켰지만 당선에 실패했으며 오히려 미녀 총리로서 권력 남용과 부패행위가 모두 다 폭로됬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됬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전임 정권들의 <반소친미>노선을 반대하여 <친로반미>노선을 주장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친미주의적 여성 총리였던 유리마 티모센리코 전총리를 직권 남용죄로 기소하여 7년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그동안 친미와 친유럽연합 분위기를 형성했던 전임 정치세력과 정면 대립하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정권과 친소주의 정치노선을 확립하는데 총력을 기우렸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우크라아나 민족주의>에 입각한 <친로주의> 정치적 성향을 지향하는 정권을 세우는데 있어서 집권 초기에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미국의 CIA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친로주의> 정치노선을 확립 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었다. 유럽연합도 미국과 동조하여 야누코비치의 정권을 대항하여 <기싸움>의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미국은 대유럽 정략에 있어서 우크라이나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CIA는 우크라이나 우익 세력을 총동원 집결하여 반정부 운동시위를 전개시켰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와 한패이다>라고 비난하는 여론과 악선전을 퍼뜨리면서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하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FBI는 우크라이나 빅토르 야누코비치 현직 대통령에 대하여혹시 해외 은닉 자산이 있는가 하여 <국제금융특별기동팀>을 조직하여 자산추적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 FBI는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서 크게 문제가 될만한 치명적인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2. 야누코비치 정권을 쓰러뜨린 미국의 강도행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치명적 위기를 당한것은 2013년에 친미와 친서방 야당들이 일제히 단결하여 반정부 시위를 감행한 사건으로 부터 시작됬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유럽-우크라이나 경제연합> 체결을 잠정 중단할것을 용단으로 결정하여 선포했다.  그리고 야누비치 대통령은 오히려 러시아가 주도하는 경제블록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친미적인 야당세력이 미국에 의하여 총집결하여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반대하여 궁지에 빠지게한 본격적인 반정부 시위의 계기가 됬던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위치가 인접해 있으며 문화적으로 러시아와 가장 가까운 나라이다.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봉괴되면서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하기는했다. 하지만 문화와 경제 그리고 전략적 이유로 인하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분리될 수 없으며 반드시 러시아 블록에 가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친미주의적 야당은 친서방적 정치세력을 총동원하여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12 8일에 레닌 동상을 철거하는 난동으로 발전했다. 2014 2 18일에는 수도 키에프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26명이 사망했으며 20일에는 시위대 100명이 사망했다고 야권이 발표했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친서방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비난하고 규탄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었다.  미국의 공작과 유럽연합의 외무장관들이 막후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외세에 의하여 고무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야당 정치세력들이 총집결하여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곤경에 몰아 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서방의 외세들의 공작과 충동에 의하여 우크러이나의 우경화된 정치적 세력과 그리고 우크라이나 역대 친미적인 전임 대통령들 3명이 모두다단합하여 총력으로 현직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퇴를 주장했던 것이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2014 5 25일부터 우크라이나의 조기선거 준비를 합법적으로 시작하겠다고 타협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야권 의회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타헙적인 제안인 조기선거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하여 2014 2 22일에 탄핵을 강행했다.
 
뿐만 아니라 <오렌지 혁명>의 주동자이며 극렬 친미주의자인 전여성 총리였으며 7년형으로 수감중에 있는 유리야 티모센코를 의회는 그녀를 감옥에서 석방했다.
 
그리고 친미적인 야권 의회는 임시대통령권한대행자로 알렉산드르 투루치노프를 즉시 임명했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배후에서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우익 세력의 무혈쿠테타는 일단 성공한 것이였다.
 
친미적 야당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행방에 대하여 서방의 언론들은 별의별 엉뚱한 체포설, 도망설 그리고 심지여 사망설 까지 사실무근한 거짓 보도들이 홍수처럼 흘러넘치게 보도를 했다.
 
하지만 미국 CIA의 비밀을 세계에 폭로한 유명한 <스노든의 행방>은 어디인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도 역시 2 28일에 러시아에서 건전한 모습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기자회견을 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나는 우크라이나 선거에 의해 정당하게 선출된 주권국가의 대통령이다. 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강도적 행위로 인하여 친미적 야당세력이 불법적으로 탄핵을 감행하여 우크라이나 정부를 쓰러뜨리려고 만행을 저질렀다.
 
. 미국이 주도하는 CIA 공작으로 쓰러뜨리고 있는 나라들은 아프간, 이라크, 집트, 리비아, 구 유고슬라비아, 아프리카와 남미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 등 지금도 여러 나라들에서 진행중에 있다.
 
. 미국이 서방 매스컴을 장악하고 호도하여 모든 사실은 외곡하여 제3세계 나라들의 국민과 지도자들을 깍아내고 있다.  미국과 서방이 지원하는 NGO, IMF 그리고  UN을 통하여 종교분쟁과 인권문제 등 그럴듯한 이유와 말로 각본을 작성하여 미국은 제3세계를 머슴살이로 이용하고 있다. 만일 제3세계 민중들이 미
국의 이러한 만행에 대하여 눈을 감는 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기자회견을 통하여 발표한 내용이다. 1990년에 구 소련이 붕괴된 후에 독립된 우크라이나는 처음부터 친미주의 정치적 성향으로 20여년간 통치를 했다.  우크라이나의 서부지역은 본래 유럽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친서방 성향의 역사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는 독립 초창기부터 친미와 친유럽 성향의 정부가 창설됬던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은 어떻한가?  동부지역은 러시아와 국경을 맏대고  있기때문에 자연히 러시아와 교류와 협력이 밀접하고 협동적 분위기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여 있는 것이다. 
 
2010넌에 우크라이나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의 친미와 친서방 정치노선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동부지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친러시아 정권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크라이나가 동서로 대립하여 <동부-서부대립 기싸움>을 하고 있는 배경과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대립은 또한 <미국-러시아 기싸움>의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적 상황이다.
 
2014 2월에 우익세력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후임으로는 역시 친미주의자 투르치노프를 대통령대행자로 즉시 임명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기자회견을 통하여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불법적으로 임명된 친미주의 정권의 하수인 격인 투르치노프 대통령대행자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3.미국이 버린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살린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서명하여 핵보유를 완전히 포기하고 비핵화국으로 전락한 우크라이나에 대하여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미래의 안전과 영토보존을 책임 진다고 분명히 명시되여 있다. 하지만 미국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하나의 휴처럼 버리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하여 반정부 저항시위가 끝침 없이 번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모든 사건발생에 대하여 무조건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주장하면서 우크라이나 사건에 대하여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회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러시아로 이동한 사건에 대하여 수습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반정부 세력을 뒤에서 지원하고 조종하면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미국이 스스로 페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1995년에 체결한 후 19년만에 우크라이나를 버리고 안전보호를 책임지지 않는데 대하여 한국인들 중에서 볼멘 목소리가들려온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버리고 떠나가는데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떠나가면 어찌하나? 국제적 돌변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미국을 버리고 러시아를 따라가는게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다페스트 합의를 휴지로 만든 미국을 믿어도 되나? 북이 핵공격을 해오면 미국이 북을 보복해준다는 약속을 믿어도 되나?>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여 한국인들은 말하기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에게 어떤 경우에도 미국이 한국을 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확인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어리석은 한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하지만 역사 의식이 분명한 한국인 이라면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먼저 배반했으며 또 오늘은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놓고 서로 대립하여 국제적 긴장상태를 조성하고 있는데 대하여 옳바른 인식과 판단을 해야 하겠다.
 
다음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권좌에 물러나 우크라이나를 떠나 러시아로 이동한 후에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러시아 지역의 민중들이 분리 운동을전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본다.
 
. 우크라이나에는 21개 주들이 있는데 서부에 친서방 9개주가 있으며 동부에 친러시아 성향의 12 주들이 있다.  동부의 친러시아 성향의 모든 주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하여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기를 위하여 맹열한 투쟁을 일제히 벌리고 있다.
 
. 제일 먼저 크림반도에서 수천명의 대규모 집회를 열어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하라고 족촉했다.  <우리는 크림인이며 우리의 형제는 러시아인 이다> 라고 민중은 주장했다.  2014 2 24일에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 국기가 나부겼다.   크림반도는 인구 245만명 중 러시아인이 59%이다.
 
크림반도가 러시아 연방으로 성공적으로 귀착된데 대하여여 미국과 유럽연합은또 다른 여파에 대하여 불안에 떨고 있다.
 
. 미국이 주도하는 IMF는 우크라이나 동부사태가 위기에 처함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지원을 수정할 수 밖에 없다고 우름장을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동부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될것을 미국은 이미 기정사실로 판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 우크라이나 동부 12개주들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시위와 폭동 그리고 경찰과 충돌함으로 부상자와 사망자들이 발생하지 않은 곳이 없는 위기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외신들의 보도는 2014 5 5일 현재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하여 전면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 미국과 유럽연합은 일제히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여 우크라이나 사태를 악회시킨다고 책임 전가를 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보다더 강경한 태도로 <만일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 주권에게 부당하게 행동을 한다면 보복의 가능성을 당당하게 집행할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맞섰다.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친러시아 주들은 5 11일에 <우크라이나 분리주민투표>를 예정하고 있다. 그리고 5 25일에는 우크라이나 대선이 계획되여 있다.
 
이 양대 투표와 선거가 평화적으로 무사히 진행될것인가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 는 상황이다. 어쨋던 푸틴 대통령의 판단과 제안들이 매우 중요한 관심사로 주목이 집중되고 있다.
 
. 친러시아 성향의 우크러아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실격하여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데 대하여 서방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통제권을 상실했는가? 하고 지적했다.  하지만 천만의 잘못된 판단이다. 그들은 푸틴 대통령의 자존심을 모르는 판단이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뿌리 깊은 역사성과 의리성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의 강직한 정치력과 역사에 대한 신뢰성은 미국과는 딴판으로 다르다. 미국의 레이건-부시- 클린턴-오바마는 약속을 포기하며 의리를 저버리고 오직 실리만을 챙기는 믿을수없는 대통령들이라고 세계는 공인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푸틴 대통령은 2009년에 미국에게 말하기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리틀 러시아이다>라고 말한 그는 그의 말을 절대로 저벌이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도 중요하고 또 우크라이나도 역시 매우 종요히 여긴다.
 
 
크림반도는 본래 러시아 땅이였다. 하지만 소련의 후루시체프는 본래 우크라이나 출신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만행으로 1954년에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게 선물로 양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역사적 사건을 바로 고치는 역할을 오늘 푸틴 대통령은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연합은 오직 흑해지역의 전략적 이해관계만을 중요시하면서 크림반도가 러시아 연방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를 원상복귀한데 대하여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의 개입>이라고 오히려 부당한 악평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입이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 바로잡기>인 것이였다. 푸틴 대통령은 2012년에 세번째 대통령으로 임기를 시작하여 미국의 동유럽 지배정책에 맞서면서 러시아의 재통합의 과제를 여러 모로 중요시 하고 있다. 특히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책임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영국을 <형님처럼 믿고> 1994년에<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서명함으로서 비핵화 국이 됬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영국 등 유럽연합국들이 우크라이나를 동등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그대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때 당시 우크라이나는 세계 3대 핵보유국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제2대와 3대 대통령이였던 친미주의자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은 미국을 형님처럼 믿고 우크라이나의 막대한 핵보유국의 지위를 몽땅 포기했던 것이다.
 
조선이 어찌하여 미국의 끈질긴 압력과 공갈에도 불구하고 끄떡하지 않고 만난을 참고 극복하면서 오직 선군정치 일편단심으로 핵무기 개발과 핵보유국으로 당당히 미국에 맞서고 있는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은 역사를 통하여 다시 분명히 배우게 됬다.
 
우크라이나의 1-4대 역대의 대통령들은 미국 제국주의 위협과 그리고 유럽연합의 끊임 없는 공갈과 유혹에 대하여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자주적인 정치적 의지를 확립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는 오히려 자립적 국방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상실하는 어리석은 비운에 처하게 된것이다.  
 
지금 러시아는 6,000명의 병력을 러시아 영토가 된 크림반도에 배치하고 있으면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케리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하여 당황하여 쩔쩔매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크라이나가 조선의 핵보유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에 대하여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어서 언제든지 주먹으로 대화를 한다라는 푸틴 대통령의 특이 한 카드를 오늘도 꺼내 들고 있는 것을 뜻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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