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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김관진은 "오중흡 7연대"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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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4-26 19:36 조회1,8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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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박사(전한신대학교 교수)는 "오중흡은 이미 고인이 된 1930년대 항일유격대원이었다. 그는
지금 혁명열사릉에 반신상으로 모셔져 있는 인물이다. 많은 유격대원 가운데 하필이면 오직 오중흡 만이
그 황금같은 20분 연설, 그것도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처녀 연설에 그 이름이 등장하다니 한 번 쯤 알아
보려 해야 하지 않을까".그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논단] 김관진은 "오중흡 7연대"를 아는가?




*글:김상일 박사(전한신대학교 교수)


<##IMAGE##>김일성주석 탄생 100주년 행사 열병식에서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0분간 육성 연설을 하였다. 세인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평이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0분 연설 가운데 인명을 단 세 사람 언급하였다. 김일성 17회, 김정일 17회 그리고 오중흡 1회이다. 앞의 두 분을 언급하는 것은 기대했던 대로이기 때문에 별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 귀에 잘 익숙하지 않은 ‘오중흡’이란 이름은 생경하게 느껴 질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과 함께 연칭된 "7연대’란 말도 생소하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의 귀에는 ‘오중흡’이 생경하고 생소할지 몰라도 북한 주민들은 어린 아이들도 알고 또한 익숙한 이름이다. 오중흡을 모르면 북조선의 주민들과 지도자의 관계로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북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남한의 국방장관께서 오중흡7연대를 알고나 있는지 모른다면 알리려고 이 글을 쓴다. 짐작컨데는 모른다고 사려 된다. 왜냐하면 안다면 결코 북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중흡은 이미 고인이 된 1930년대 항일유격대원이었다. 그는 지금 혁명열사릉에 반신상으로 모셔져 있는 인물이다. 많은 유격대원 가운데 하필이면 오직 오중흡 만이 그 황금같은 20분 연설, 그것도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처녀 연설에 그 이름이 등장하다니 한 번 쯤 알아보려 해야 하지 않을까. 먼저 연설 내용 가운데 오중흡에 관한 부분의 앞 뒤 문장을 여기에 그대로 가지고 와 본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열 백번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을 그대로 닮은 우리 인민군대의 혁명적 본태이며 노동당의 붉은 깃발을 제일군기로 높이 들고 나가는 백두산 혁명 강군의 투쟁방식입니다.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오중흡7연대의 칭호쟁취운동을 더욱 심화시켜 전군을 항일의 총폭탄 정신이 꽉 들어찬 오늘의 7연대로 만들어야 합니다.”(열병식 연설 내용중에서)

그렇다. 오중흡을 보면 북조선 주민들의 전반적인 정서와 오늘 내일의 긴장이 왜 고조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오중흡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은 회고록 6권과 7권에서 애잔한 마음으로 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오중흡하면 ‘군복 600벌’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1937년 초 여름 보천보 전투를 불과 얼마 안 두고 항일유격대는 장백현 19도 지양개에서 국내진공대열을 편성하고 대원들에게 일제히 여름 군복을 갈아입혔다. 김주석은 회고하기를 “속직히 말해서 우리 옷차림새가 그때처럼 좋은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회고록 6권 167쪽)고 적고 있다.

얼마나 좋았고 멋있었을까? “모자에 붉은 별모표를, 군복저고리에는 령장을 달았다. 그리고 남대원들의 바지는 유격활동에 편리하게 약간의 개조한 승마복 형태였고, 녀대원들에게는 주름치마나 바지를 입히는 것으로 하였다. 남녀대원들의 저고리는 종전처럼 닫긴깃 형태였다”(제6권 168쪽)

아마도 100주년 열병식에 남녀 군인들이 입고 나온 모양새가 그대로 항일유격대원들의 옷차림새가 아닌가 한다.

그러면 600여 벌이나 되는 군복을 누가 어디서 지었단 말인가? 장백현에 판견된 후방부성원들이 양목정자에서 지었다. “그 때에는 군복보다도 당장 먹을 한두끼의 식량이 더 절박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국진군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견성 있게 수백 벌의 군복을 포치하였다”고 김주석은 회고하고 있다.

김일성 사령관과 항일유격대원들은 곧 있을 조국 땅에 진격해 들어간다고 너도나도 가슴 설레고 있을 때였다. 김일성사령은 조국에서 맞이해줄 인민들 앞에 항일유격대원들의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 그리고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600벌의 군벌을 장만하는 데 그 기금을 어디서 누가 모아왔단 말인가. 바로 오중흡과 김주현이 고생을 한 끝에 마련해 온 것이었다.

오중흡이 후방공작조를 이끌고 서강에서 장백으로 진군해 나갈 때에는 단 한 되 박의 식량도 없었다. 허기가 나고 기력이 진해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맹물로 끼니를 매 운다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지난번 단두산 전투에서 소를 땅에 묻었던 곳이 있어서 그곳에 다시 가니 소는 짐승들이 살은 다 파먹고 뼈만 남아 있었다. 그 소대가리를 우려먹고는 겨우 기력을 회복했다.

칼날 같은 눈얼음에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맨살이 드러나서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김주현의 증언에 의하면 오중흡대원들이 소덕수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고 끔직해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겨우 숨이 붙어 있는 그들은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마당에서 다 쓸어져 버렸다고 한다.

주민들이 겨우 방안으로 엎고 들어 와 보니 옷은 갈갈이 찢어져 옷을 가위로 찢어내고 새 옷을 달아 입혔는데, 온 몸에 피얼음들이 엉켜 붙어 있었다고 한다. 상처자리를부터 소금물로 소독하고 언 독부터 빼지 않으면 � 될 지경이었다. 오중흡과 전 대원 가운데 동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고생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그 고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처창즈에서 겪었던 고생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듣는 사람들이 그 고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예 고생에 관해서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은 “항일혁명 당시의 고난을 직접적으로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력을 아무리 발동하여도 그때의 실상을 제대로 리해하기 어려울 것이다”(6권 170)라고 적고 있다. 더욱이 역사학자들의 맹숭맹숭한 두뇌로 이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현대 역사학의 주류가 역사학도들에게 문학 수업을 필수로 듣게 한다.

방의 더운 온기를 받아 의식이 깨자 말자 오중흡과 일행들은 재봉틀 앞으로 가 군복을 짓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를 본 인민과 주민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단 숨에 군복 600벌을 지어 냈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시인이요 소설가라 하더라도 조선의 인민 항일유격대원들이 칼바람 부는 만주벌에서 겪을 고생을 어떻게 말로서 글로서 다 쓸 수 있단 말인가?
오중흡은 고난의 행군 기간 가운데서도 가장 어렵다 하는 고생길은 혼자서 찾아가며 고생한 항일유격대 지휘관이었다. 오중흡은 1910년 7월 10일에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세선리에서 빈농 오창희의 장남으로 태어나 1939년 12월 17일 돈화현 륙파송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이었다.

1930년 9월 오중화의 집에서 김일성사령관을 처음 만나 원가점에서 활동을 하다 1932년 체포된다. 석방된 후 1933년 5월 일가친척 30여명과 함께 소왕청 유격구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연길과 화룡에 가서 활동한다. 그러다 1933년 여름 왕청에서 반일인민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1936년 10월 조선인민혁명군 주역부대의 중대청년간사로 일하다 1937년 2월에는 중대장으로 임명된다. 1937년 3월 만강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경기관총을 표창받았다.

그가 600여벌의 군복과 식량을 마련하여 주력부대가 국내로 진격하고 보천보 전투에 승전보를 올리도록 한 때가 바로 1937년 봄이었다. 보천도 전투 불과 3개월 전이었다. 보천보 전투가 끝난 그 해 겨울 오중흡은 밀영건설과 부대관리를 철저히 잘하여 시계를 상으로 받는다.

그러나 오중흡의 진가는 그가 고난의 행군 기간(1938.12-1939.3) 동안에 보여준 그의 혁혁한 공로 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은 그의 회고록 제 7권 사진첩에서 오중흡의 사진과 함께 “나는 지금까지 50여년 동안 혁명 투쟁을 해오면서 숱한 간부들을 데리고 사업해 보았지만 오중흡동지와 같이 충실하고 짜인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고난의 행군기간 동안 김일성유격부대는 겹겹이 좁혀 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분산 작전을 구사한다. 분산작전이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세 방향으로 분산해 이동함으로 적의 집중 포위망을 피해 보자는 작전이다.
적들이 김일성 사령을 잡는 것이 주공격 목표일 것은 당연하다. 바로 오중흡이 인솔하는 7연대가 위장을 하여 마치 김일성사령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하여 적들을 이리 저리 이끌고 다니는 사이에 김일성 사령은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적의 포화와 병력은 7연대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오중흡은 온갖 기지와 전법을 구사하여 달려든 적들을 타승하고 말았다. 바로 이때에 오늘 북에서 사용하는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란 말이 생겨났으며 이의 화신이 바로 오중흡인 것이다.
이는 마치 고려 왕건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겹겹이 포위를 당했을 때에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적진을 향해 달려 자기에게 화력이 집중하도록 만들어 놓고는 왕건이 무사히 포㎏좇� 벗어난 일화와 유사하다. 신숭겸은 전사하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마치 ‘수뇌부 결사옹위’가 작금에 생겨나 난 것처럼 잘 못 이해하고 있다. 이 말은 고난의 행군 기간에 오중흡7연대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로동당력사>>에서도 “오중흡련대장은 자기 부대를 사령부로 가장하여 희생을 무릅쓰고 사령부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보장하였다”(117쪽) 라 기록하고 있다.

이와같이 오중흡7연대의 수뇌부 결사옹위 정신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반도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리영호 차수가 며칠 전 중앙 보고대회에서 “혁명의 수뇌부 사수를 제일생명으로 하고 있는 우리 군대와 인민” 이란 표현 역시 고난의 행군 기간에 오중흡 7연대가 보여준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1939년 12월 17일 돈화현 륙파송에서 진행된 전투에서 오중흡은 전사했다. 륙파송에는 큰 목재소가 있었고 조선노동자들이 반 감금 상태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부대는 이 목재소를 소탕하고 물량을 노획한다. 150 여명의 노동자들이 노획물을 날랐다고 하니 엄청난 성과였다. 김일성 사령은 노획물 보다는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작전을 개시하였다. 오중흡7련대를 공격조로 하고 8연대는 노획물자를 운반토록 하였다.

적들은 전멸을 했으며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그 자리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를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오중흡을 잃었다. 항일유격활동중 사령관의 말만 떨어지면 사령관 말의 일점일획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려던 오중흡 7연대장, 바로 그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이번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다.

남한의 군부는 북을 慕款� 알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오중흡7연대를 알면 잠망경 같이 북부 조선이 남에 앉아 있어도 훤히 드려다 볼수있다. 국방장관은 오중흡7연대를 알고나 덤빌 것은 덤비고 피할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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