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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85]호주 원주민 몰살시킨 악랄한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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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2-05 19:38 조회1,7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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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85번째 나라로 오스트랄리아를 다뤘다.
그는 "호주는 수 세기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가 1901년에 독립하기는 했다. 하지만
호주는 여전히 영연방에 묶여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영연방
군주제도에 예속된 국가로서 100여년 동안이나 영국의 여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모시는
예속된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한편 영국이 이 나라의 원주민들을 흉악범들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탄압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제국주의 나라의 혹독한 대외정책을
폭로했다.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85]호주 원주민 몰살시킨 악랄한 영국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세계 지도를 말할 때 ‘5대양 6대주’라고 말한다. 5대양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양과 남극양이 있으며 6대주는 아시아주, 아프리카주,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주, 유럽주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주를 가리켜서 6대주라고 한다.


이 글에서 세계 6대주 중에 하나인 오스트레일리아주, 호주에 대하여 고찰한다. 지금까지 남태평양 지역에 속해 있는 크고 작은 13개의 섬나라들에 대하여 고찰을 했는데 이번에는 남태평양에서 마지막으로 호주이다.


호주는 적도 남쪽에 위치한 대륙으로 총 면적이 7,686,850km2 로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이며 한국의 78배가 되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넓은 땅 대륙에 인구는 2012년 현재 약 2천 2백 80만 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호주는 수 세기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가 1901년에 독립하기는 했다. 하지만 호주는 여전히 영연방에 묶여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영연방 군주제도에 예속된 국가로서 100여년 동안이나 영국의 여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모시는 예속된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여론조사 45% 대 36%의 결과에 근거하여 영연방 군주제도에서부터 탈피하여 오스트레일리아 6개 식민주들이 연방으로 단결하여 호주 연방공화국으로 독립했다. 호주의 정치제도는 6개 주 정부들이 연합하여 “호주연방공화국”을 형성하였으며 총리가 국가의 수반이다.



1. 호주의 간추린 고대 역사



인문학 관점에서 보는 호주의 고대 역사 학자들이 주장하기를 약 3만 8000년 전에 제 4빙하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원주민 애버리진 (Aborigine)이 최초로 호주에 이주해 왔다고 추정한다. 최초의 원주민 애버리진은 아마도 중국 쪽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으면서 그와 관련된 역사적 증거를 부지런히 찾고 있다.


그런데 저명한 역사학자인 돈 워슨 박사는 주장하기를 1400년대에 중국의 명나라의 거대한 항해단의 선박들이 호주 북쪽 해안에 정박한 사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진이 중국인들이라고 하는 확실한 증거는 찾아 볼 수 없으며 다만 동남아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고 하는 주장을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필자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1606년에 스페인을 선두로 유럽인들이 호주에 접근한 이후부터 1642년에 네덜란드의 탐험가들이 호주에 접근한 사실들과 1688년에 영국인 해적 윌리암 댐파이가 처음으로 호주에 접근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1770년에 저 유명한 영국의 해군 Captain James Cook이 호주에 상육하여 동부해안 전체를 탐험한 후에 그는 호주를 영국령으로 선포했다. 이것은 1492년에 콜롬버스가 처음으로 바하마제도를 발견한 이후 288년 뒤 영국인이 호주에 처음으로 상륙한 사건이었다.


1642년-1770년경에 유럽인들이 호주에 처음 도착한 시기에 그 당시 호주의 넓은 땅에는 “애버리진, Aborigine”원주민들이 약 100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300여년이 지난 1900년대에는 원주민 약 4만 명이 특별보호구역에 갇혀 있으면서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00만 명의 원주민이 300년 후에 4만 명으로 감소됐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 그때부터 또 다시 100년이 지난 후 2007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원주민 애버리진의 총수는 약 45만 명으로 밝혀졌다.


2007년 현재 영국계 백인의 나라인 호주의 총인구는 2천 2백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 중에 애버리진 원주민의 수는 2.2%에 불과하다.


1787년에 영국인 죄수 750명이 추방되어 호주에 정착한 것이 영국의 호주이민 역사의 최초의 시작이었다. 그 후 1888년까지 100년 동안 영국의 흉악범 죄수들이 16만 명이나 계속 강제이주를 당해 호주에 왔다. 이것이 영국이 호주를 식민지로 삼은 최초의 이민 역사였다.


영국은 원주민이 살고 있는 땅을 자국의 땅으로 만들기 위하여 미지의 땅이라고 하면서 지도를 작성하여 영국에게 유리한 지명을 새로 붙이고 원주민들을 대량 살해하는 “원주민 말살정책”을 몇 백 년 동안 일상적으로 계속 감행했다.


영국이 호주를 자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하여 호주의 동쪽을 “뉴사우스 웨일즈”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호주의 동쪽이 영국 본토의 사우스 웨일즈처럼 초록이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라는 뜻에 “뉴” 자를 첨부해서 부른 지명이다.


또 영국은 호주의 서쪽을 영국식 이름으로 “뉴홀런드”라고 불렀다. 전부 이런 식으로 그 넓은 호주 땅의 각 지역에 영국식 이름으로 “뉴” 자를 붙인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나중에는 각 지역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아예 호주 전체를 영국의 영토로 여기는 새로운 국명으로 1850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라고 불렀다.
결국 “오스트레일리아”는 나라의 이름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에서 대륙의 이름인 5대양 6대주에서 6번째 대륙으로 등장했다.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땅의 소유권을 더욱 확실히 하기위하여 원주민들을 학살하여 원주민의 수를 극감시키고 또 원주민들을 미개발 오지로 몰아내어 철저하게 백인 지배체제를 확립하여 실질적인으로 호주에서 땅의 주인이 됐다.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암흑 같은 야만사회에 “기독교의 빛”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영국의 기독교는 유일신을 주장하면서 대영제국의 권력과 야합하여 타민족을 악마로 여기는 끔직한 원주민 학살에 동참했다. 악마와 사탄이 무엇인가? 인류에게 악한 결과를 초래한 영국의 침략행위가 바로 악마와 사탄의 장난이 아닌가?


그 당시 원주민들이 100만 명이나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석기시대로 활과 도끼와 몽둥이가 그들의 유일한 무기였다. 그럼으로 총포와 검을 가지고 있는 영국인들을 감히 대적할 수가 없었다.


영국인들은 총과 칼을 앞세워 원주민들의 땅을 갈취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고 그 넓은 땅을 개척했다. 원주민들은 그들이 수 천년동안 살아 온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떠돌이가 되여 척박한 오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노동수용소를 창건하여 원주민들을 강제로 농장과 공장에서 노동을 강요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감시 아래 노동을 했으며 만일 백인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오지로 추방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엄벌을 받았다.


이와 같은 영국의 가혹한 식민정책이 수백 년 동안 거침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호주의 원주민의 수는 100만 명에서 95%가 감소되는 비극의 역사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2. 호주에 골드러시 금광시대의 전개




세계에서 6번째 큰 대륙의 나라인 호주의 자연 환경 속에서 지상과 지하에는 고귀한 자원으로 가득 차 있다. 지형과 지질상으로 호주 대륙을 3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동부 고지, 중앙 저지, 서부 고원지대로 크게 구분한다.


호주하게 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양을 상징하는 목축업, 밀을 상징하는 농업 그리고 아직 미개척 지대로 남아 있는 광활한 땅에 뛰어다니고 있는 캥거루 등이다. 또한 매력적인 호주의 관광산업이 호주의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고 있다.


하지만 호주의 경제적 자원은 지상의 자원뿐만 아니라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호주 정부가 지하자원을 더 중요히 여기고 개발을 시작하는 새로운 시대가 전개됐다. 이 시대를 가리켜 “골드러시” 라고 부른다.


호주엔 납, 아연, 철, 보크사이트, 석탄, 갈탄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 등 다양한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납은 세계 제3위의 생산국이다.


호주의 골드러시는 185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됐다.
당시 동부 고지가 식민지 발전에 있어서 저해가 되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지역의 고지와 산골짜기에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빅토리아주와 뉴사우스웨일주에서 시작된 금광산업에 영국을 비롯하여 다양한 서구의 백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1850년에 호주의 백인 인구 40만 명이었는데 10년 후 1860년에 백인 인구가 115만 명으로 급증했다. 30년 후에는 호주의 백인 인구 223만 명으로 증가했다.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진의 인구는 해마다 날이 갈수록 극감하고 있는데 이와 정반대로 백인의 수는 해마다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었다.


호주에서 금광산업이 호황을 이루고 있음을 보고 영국의 식민지 총독은 금광업자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다. 영국 식민지 총독의 가혹한 세금 부과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하여 유혈투쟁으로 발전했다. 이 폭동과 유혈투쟁에 대하여 역사는 “유fp카 혁명” 이라고 기록했다. 오늘은 그 곳이 관광명소로 되었다.


골드러시 시대 전개로 호주에서 영국계 백인 인구가 급증한 기록을 살펴본다.


1850년 40만 명, 1860년 115만 명, 1890년 223만 명, 1901년 337만 명, 1911년 446만 명, 1961년 1,050만 명, 1966년 1,160만 명, 1986년 1,560만 명, 1988년(200주년) 1,800만 명이었다.
1988년 애버리진 원주민 약 2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2012년 현재 호주의 전체 인구는 2천 2백 81만 명이다. 애버리진 원주민의 수는 300년 전에 100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약 45만 명으로 추산하며 전체 인구의 2.4% 정도에 불과하다.



3. 20세기 이후의 호주 역사




1901년에 호주는 6개의 식민지 주정부들이 연방제를 형성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호주영방공화국”을 피 한 방울 흘림 없이 평화롭게 창건했다.
1770년에 Captain James Cook이 호주를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한 후 131년만에 독립국이 됐던 것이다.

또한 영국이 1787년에 영국의 흉악범 죄수 남녀 750명을 호주로 처음 추방한 후부터 114년만에 독립국이 됐다. 그 후 100년 동안 영국은 16만 명의 흉악범 죄수들을 호주로 계속 추방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호주는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호주는 양 목축업을 통한 모직 생산과 밀 경작을 국가경제의 기초를 삼았다. 1930년대에 유럽 경제호황 속에서 호주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호주는 역시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을 막아준 것은 영국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호주는 미국과 적극적으로 가까운 우방국이 되기 시작했으며 냉전 시기에 호주는 계속하여 서방의 반공 국가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호주는 6.25 전쟁 때 미국을 돕기 위하여 참전했으며 또 역시 미국의 요구에 의하여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2년에 호주 노동당이 집권하여 휘틀림이 총리가 되었는데 휘틀림 총리는 호주 군대를 베트남에서 철수시키는 용단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휘틀림 총리는 노동당의 정책으로 의무 병역제를 폐지시키고 고등학교 무상 의무교육과 무료 의료보험 제도를 실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휘틀림 총리는 호주 역사상 처음으로 원주민들의 영토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호주의 국무총리들이 수 없이 많이 갈리고 또 국무총리의 수명도 단명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정잭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호주의 기본적인 정치노선은 친미보수 일변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01년 1월 1일에 취임한 Edmund 국무총리로부터 시작하여 2012년 2월 현재 제27대 줄리안 길러드 총리에 이르기까지 원주민 애버리진에 대한 학대와 차별정책에는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호주 총리 “맨발 탈출 굴욕” 이라는 사건이 2012년 1월 26일에 발생하였다.

영국인들이 1788년에 처음 호주에 상육한 날을 기념하는 “호주의 날” 행사에 줄리안 길러드 총리가 참석했다.


기념행사에 참석한 줄리안 길러드 총리를 향하여 원주민들의 분노가 즉흥적으로 폭발하는 사건이 돌발했다. 줄리안 길러드 총리는 황급하게 현장에서 피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 한 쪽 구두가 벗겨지는 창피를 당했다. 이러한 현장의 모습이 news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호주의 27명의 역대 총리들 중에서 오직 제 26대의 총리인 Kevin Rudd 총리만이 호주의 정부가 원주민에 대하여 저지른 죄악에 대하 사과의 뜻을 발표했다.
Kevin Rudd 총리는 연방의회에서 그의 국정연설을 통하여 호주의 원주민에 대하여 100년만에 처음으로 공식 사과의 말을 했다.


Kevin Rudd 총리는 국정연설에서 말하기를 ‘이 거대한 땅의 진짜 주인은 애버리진 원주민이었다’ 라고 말하면서 원주민들에게 공식 사과의 말을 했다.


Kevin Rudd 총리는 그의 국민을 향한 국정연설에서 영어 단어 360개를 사용했는데 원주민들에게 ‘Sorry’라고 하는 말을 3번이나 계속하여 청중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의 연설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했다.


하지만 호주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극우파 친미 보수주의자로 유명한 25대 총리인 John Howard 전 총리는 이 회의에 불참했다고 한다. 꼴통 보수주의자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많은 피를 흘려가며 영국과 치열한 독립전쟁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호주의 독립은 영국이 16만 명의 죄수들을 호주로 추방하여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전혀 피 흘림이 없이 영국이 스스로 결정하여 호주의 독립을 승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피를 흘리지 않은 대가로 원주민 100만 명의 피가 골짜기에 넘치도록 수세기동안 흘렸다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다.


애버리진 원주민들의 95% 이상 살해를 당했다.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을 죽이고 또 죽여 거의 멸종에 이르게까지 한 후에 비로소 독립국이 됐다.



4. 태즈메니아 섬의 비극




조선반도 남단에 제주도가 있는 것처럼 호주의 남단에는 태즈메니아 라는 섬이 있다. 이 태즈메니아 섬의 크기는 90,700km2 로 조선반도 남녁 땅의 70%에 해당하는 큰 섬이다. 하지만 이렇게 큰 태즈메니아 섬이지만 오늘 태즈메니아 섬의 인구는 약 50만 명에 불과하다.


테즈메니아 섬은 호주의 6개의 연방주 중의 하나인 주정부로서 독자적 행정기능을 가지고 있다. 태즈메니아 섬은 태고적 원시림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승지이기도 하다.


태즈메니아 섬은 호주 남단에 약 150마일 떨어져 있는데 거의 1만년 동안 외부세계와 전혀 접촉이 없는 딴 세계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1642년에 이르러 최초로 네덜란드 사람들이 태즈메니아 섬을 발견함으로서 유럽에 알려졌다.


1 만년 동안 숨겨져 있던 태즈메니아 섬에 원주민들이 5000명이 살고 있었다.
1만년 동안의 고립이 끝나고 유럽인의 접촉이 시작됐다고 하는 사실이 5000명 원주민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그 섬에서 대대손손 행복하게 살고 있던 그들의 삶에 상상하지 못할 큰 불행이 닥쳐왔다는 뜻이었다.


1642년에 네덜란드인들이 처음 접촉한 후에 1772년에 두 번째로 태즈메니아 섬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영국인들이었다. 영국인들의 상륙은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살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었다.


태즈메니아 원주민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영국인을 만나는 순간이 곧 죽임을 당한다는 순간이었다. 그럼으로 태즈니아 섬의 원주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밀림 속에 깊이깊이 숨어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영국인들이 태즈메니아 섬의 원주민들을 어떤 방법으로 잔인하게 죽였는가?

젊은 남자들은 노예로 부려먹고, 여자들은 강간하기 일쑤였고, 늙은 남자들은 불구자로 만들어 놓고 죽였고, 늙은 여자들은 나체로 장작불에 태워죽였다.

남자들의 목을 잘라 여자들의 목에 걸어주는 장난을 했고,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이렇게 원주민들을 살해했지만 영국 이민정부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다.


1804년에 영국의 Colin대령의 인솔 하에 영국인 65,000명의 흉악범 남녀 죄수들이 최초로 테즈메니아 섬에 상륙을 했다. 이들이 상륙하여 여기저기 퍼져 정착하였는데 제일 처음 행동한 것은 원주민들을 마구 살해하고 땅을 갈취하는 것이었다.


1804년에 영국인 죄수들이 집단으로 처음 테즈메니아 섬에 상륙했을 때 원주민 총 인구는 약 5,000명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40년 후에 1840년경에 이르러서 생존한 태즈메니아 섬의 원주민 인구는 300명으로 극감했다.(75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광활한 대륙의 내륙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주민 학살과는 별도로 역시 이곳에 외딴 섬 태즈메니아 섬에서도 대규모로 원주민들이 비참하게 학살을 당하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었다.


태즈메니아 섬에 최초에 정착한 영국인 흉악범 죄수들은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미물의 동물로 취급하여 원주민들의 땅을 마음대로 갈취하고 서로 분할하여 나누어 가졌다.


영국인들은 말하기를 “야만적 원주민들을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 영국인에 대한 모독이다.” 라고 주장했다.


영국인들은 하등의 양심의 가책 없이 원주민들을 짐승마냥 대량으로 살해했다.
영국인들은 1832년에 원주민 싹쓸이 방법을 전개했는데 태즈메니아 섬에 아직 여전히 살아 남아 있는 원주민들을 완전히 추방하여 약 30마일 떨어져 있는 무인도 섬으로 이주를 시키는 방법이었다.


죽이고 또 죽여도 그래도 살아남아 있는 극소수의 원주들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할까? 교활한 영국인들이 생각해 낸 것은 감옥처럼 운영되는 무인도 섬의 수용소에 모아 놓고 매일 성경을 읽고 성가를 부르도록 하여 기독교인으로 강제 개종하는 것이었다.


1847년에 태즈메니아 섬에 살아남은 원주민은 5,000명 중에서 47명뿐이었다. 1869년에는 47명 중에서 남자 하나 여자 두 명 3인이 살아남아 생존하고 있었다.

1876년에 최후 노인인 한 사람 할머니가 죽음으로서 태즈메니아 섬에서 애버리진 원주민은 완전히 멸종되고 말았다.


최후의 생존자 노인 할머니는 죽은 후에 자신의 시체가 백인들의 손에 찢기는 것이 싫어 바다에 수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그녀의 유언마저 들어주지 않고 그녀의 시체를 과학적 연구용으로 박물관에 보관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사후 100년이 되는 1976년에 화장되어 바다에 흩뿌려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5. <토끼 울타리> 영화 이야기



1900년부터 1972년까지 약 70년 동안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토끼 울타리> 라는 영화가 창작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의가혹한 식민지 통치 하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비극을 배경으로 하여 저 유명한 <토끼 울타리> 라는 영화가 창작됐다는 말이다.


그럼으로 <토끼 울타리> 영화는 영국의 식민지 역사적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한 비극적 실화를 소재로 창작된 영화이다.


<토끼 울타리, Rabbit Proof Fence>영화를 제작한 Phillip Noyce 감독은 헐리우드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제작자인데 그는 호주 출신 영화감독이다.


그는 고향의 나라 호주에 2002년에 돌아가서 눈물겨운 호주 원주민의 실화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며 그 실화를 소재로 삼아 이 유명한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 이야기는 원주민 한 가정의 <도둑맞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제작한 Phillip Noyce 감독은 <도둑맞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아니라 그것은 <도둑맞은 세대> 대한 이야기라고 영국의 침략적 최악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토끼 울타리> 혹은 <도둑맞은 아이들>의 비극적인 실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00년부터 1970년까지 70년 동안 영국 식민정책은 이른바 <원주민개화정책>이라 하여 영국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호주정부와 교회가 주동이 되어 애버리진 원주민 가정에서 아이들을 강제로 빼앗아 1500마일 떨어진 먼 곳으로 끌고 갔다.


영국 식민정권은 원주민 아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하여 교육을 시키거니 혹은 백인 가정에 강제로 입양을 시키는 정책을 감행했다.


영국의 이와 같은 이른바 <개화정책>의 숨은 이유는 <고귀한 백인의 피가 원주민 속에 섞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원주민 아이들을 강제로 가정에서 떼어내 떨어진 곳에서 별도로 집단 수용 교육을 시도했던 것이다.


집단 수용소에서는 반드시 영어만 사용하게 하고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하도록 교육하였으며 원주민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백인의 기독교를 강요하였다.


1931년 7월 30일 그 당시 14세의 “몰리” 라고 하는 소녀는 나이 어린 두 여동생을 데리고 몰래 수용소를 탈출하는데 일단 성공했다. 14새의 몰리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와 같이 붙잡혀간 동생들은 나보다 어렸기 때문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그리웠고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몰리와 두 여동생은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집에 찾아 온 백인 관리들에게 강제로 붙잡혀 끌려가 집으로 부터 2천 2백km나 떨어진 남쪽의 한 수용소에 갇혔다. 24시간 감시를 당하는 수용소에서 14세의 몰리는 여동생 둘을 데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토끼 울타리> 라는 울타리는 토끼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아니라 사실은 토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백인들이 설치한 울타리이다. 몰리와 두 여동생은 이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백인들이 설치한 울타리를 따라 멀고 먼 길과 무더운 날씨에 숨고 또 걸으면서 어머니가 그리운 집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이 영화는 몰리가 훗날 그녀의 둘째 딸 도리스에게 백인 수용소에서 탈출한 눈물겨운 경험담을 생생하게 들려준 이야기에 근거하여 도리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 책의 제목이 이다 .


Phillip Noyce 감독은 도리스가 쓴 <어머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재치 있는 다큐먼터리 제작 솜씨를 총집중하여 <토끼 울타리, Rabbit Proof Fence> 를 2002년에 제작하여 발표했다.


Phillip Noyce 감독이 <토끼 울타리>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서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자행된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키지 않고 사건의 본질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하여 상당히 조심하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토끼 울타리>는 단순히 역경을 딛고 일어나 어머니 품에 다시 안기는 그 소녀들의 눈물겨운 여정만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국의 사악한 식민통치 역사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는 <도둑맞은 세대>와 유린된 <세계 평화>를 고발하고 있다.


또한 <토끼 울타리>는 백인들이 저지른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진’을 말살 정책이 바로 서구문명의 야만적 행위라는 사실을 명백히 부각시키고 있다.


이 영화가 전 세계의 명작으로 발표된 2002년에 그 당시 14세였던 도리스 소녀는 어언 향년 84새로 아직 건강한 노년기 할머니로 생존해 있었다.



글을 맺으며..



영국의 기독교는 뿌리 깊은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이다. 영국의 전통적 왕실의 모든 행사는 기독교의 전통을 준수하는 순서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영국의 대외적 외교정책도 역시 기독교 전통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의 대부분이 1700-1800년대에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작사”하고 “작곡” 했으며 또 편찬하고 출판한 찬송가들이다.


영국이 호주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 말살을 감행한 그 악독한 시기에 어떻게 영국 본국에서는 그러한 찬송가를 출판하여 전 세계에 내보내고 있었을까?


기독교적 문화와 문명을 역사적으로 과시하고 있는 영국이 호주에서 그러한 반인륜적이며 반종교적인 악행을 감행하고 있었다는 실은 놀라움을 넘어 역겨움과 증오로 잠 못 이루게 한다.

아마도 이명박 정권의 “고소영” 체제도 영국식 기독교를 닮아서 그런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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