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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83] 남태평양 키리바시공화국<br><br>"역사적 대명사는 영국 핵 실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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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1-11 20:59 조회2,1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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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83번째 나라로 키리바시 공화국과 팔라우 공화국을 고찰하였다.
"키리바시 공화국은 하와이 남서쪽 2,500 mile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국토의 전체 면적은 흐터져 있는 32개의
섬들을 모두 합해 약 313 sq miles 이다. 32개의 섬들 중에서 21개 섬이 무인도 이다. 키리바시 공화국의
수도는 Gilbert 섬에 있는 Tarawa 시 이며 이곳에 전체 인구 10 만명 중에서 2만7천명이 수도에 뫃여 살고 있다.
유태영 박사의 83번째 연재글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83] 남태평양 키리바시공화국

"역사적 대명사는 영국 핵 실험장"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남태평양 넒고 광활한 대양을 4대 지역으로 구분한다. 1 오스트랄리아 지역, 2 멜라네시아 지역, 3 폴리네시아 지역, 4 미크로네시아 지역등 4대 지역에 15개의 크고 작은 섬 나라들이 있다.

미크로네시아 지역에는 마샬군도, 나우루,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 키리바시 공화국등 5개의 섬 나라들이 있다. 이 글에서는 키리바시와 팔라우 2 개의 섬 나라에 대하여 그 나라들의 비극적 역사를 고찰해 본다.

키리바시 공화국은 하와이 남서쪽 2,500 mile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국토의 전체 면적은 흐터져 있는 32개의 섬들을 모두 합해 약 313 sq miles 이다. 32개의 섬들 중에서 21개 섬이 무인도 이다.

키리바시 공화국의 수도는 Gilbert 섬에 있는 Tarawa 시 이며 이곳에 전체 인구 10 만명 중에서 2만7천명이 수도에 뫃여 살고 있다.

1. 키리바시 (Kiribati) 공화국의 간추린 역사


키리바시에 3000년 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주장한다. 마샬군도와 피지 섬등 여러 섬들과 왕래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섬마다 추장들이 통치를 했으며bangota라고 부르는 제단이 섬들에서 발견됨으로 원시종교 생활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상어 뼈로 무기를 만든 것으로 보아 부족들간에 싸움도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말 한다.

고대로 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키리바시의 역사와 문화는 폴레네시아 인들과 미크로네시아 인들이 서로 왕래하고 혼혈하면서 독자적 삶의 세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역사는 끝을 모루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1606년에 키리바시에 스페인의 해양 탐험가 Quiros가 제일 처음으로 상육했다. 1788년에 영국인 Thomas Gilbert가 상육하여 섬 이름을 자기의 이름 으로 Gilbert 섬이라고 명명했다. 오늘 키리바시의 수도가 있는 Gilbert 섬은 그때 시작된 섬의 명칭을 그대로 부르고 있다.

1799-1826년 사이에 영국인들이 선봉자가 되여 많은 유럽인들이 키리바시에 왕래했으며 백인 부랑자들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Coconut Oil이 주요 무역의 상품이였으며 후에는 Copura등 다양한 산물들이 영국인들의 주요 무역의 상품들이 되고 있었다.

1857-1875년에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키리바시 여러 섬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이 선교사들은 주로 London Mission Society에 속한 선교사들이였으며 Catholic도 별도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1877-1892년에 영국은 키리바시 제도에 대한 통치권의 뿌리를 견고히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1892년에 영국은 드디어 키리바시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했다. 대영제국의 국기가 키리바시 Gilbert섬에 우뚝 서서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키리바시의 32개 섬들이 차레로 영국의 보호령으로 부터 식민지로 전향하는 과정이 1939년 까지 줄곧 게속됬는데 1939년에는 섬들의 일부를 미국과 공동으로 활용하여 태평양의 항공비행장을 건설하는데 합의를 했다.

1941년에 세계 2차대전이 시작되였다.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고 2일후에는 키리바시를 폭격하여 영국인들이 모두 떠나 갔다. 일본군은 키리바시를 1945년까지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1950년에 영국은 또 다시 키리바시에 돌아와 7년동안 치안정국의 명목으로 식민통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7년 동안에 영국은 키리바시에서 그 악명 높은 핵 실험을 감행했다.

영국은 키라바시를 핵 실험장으로 완전히 망가트려 놓은 후에 1963년에 이른바 <키리바시 행정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창설하여 키리바시의 독립을 위한 준비단계의 공작을 시작했다. 영국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키리바시를 영국의 태평양지역 지방행정관 산하에 속하도록 하고 영국인 행정관 John Field의 통치를 받도록 했다.

영국은 1973년에 미국의 평화봉사단 (Peace Corp)을 키리바시에 끌어 드렸다.
영국의 의도는 키리바시 민중들이 미국식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세뇌되여 선거를 통하여 친서방 지배세력을 창출해 내려는 고안으로 Peace corp를 끌어 드렸다.

영국은 1977년에 키리바시 자치정권을 승인하고 1978년에 이른바 자유선거를 통하여 키리바시 독립 정권을 수립하게 했다. 1979년 7월 12일에 독립국을 선포하여 영국연방의 제41번째 국가로 등록하도록 했다.

독립된 키리바시 공화국은 Gilbert에 속하는 16개 섬들, Phoenix에 속하는 8개섬들 그리고 Line Island에 속하는 8개 섬들, 모두 32개의 섬들이 하나의 국가로 형성되여 있다.

영국이 키리바시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승인한 이유중의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1900년대 초에 키리바시에서 발견되 인산 광산이 60-70년후에 바닥이 났기 때문에 영국이 키리바시를 더 이상 붇들고 있을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였다.

영국은 거의 1세기 동안 키리바시에서 막대한 인산을 착취하여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산 광산에 바닥이 났으며 또 핵 실험으로 완전히 망가진 키리바시를 더 이상 붇들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1979년에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영국의 연방국으로 묶어 놓았던 것이다.

2. 크리스마스 섬 (Christmas Island) 에서 영국의 핵 실험


왜 어찌하여 크리스마스 섬 이라 부르는가? 영국의 유명한 태평양 탐험가인 Captain James Cook이 1777년 12월 24일 Christmas Eve에 이 섬을 처음 발견하고 상육을 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에 근거하여 크리스마스 섬 이라고 부르게 됬다.

그럼으로 크리스마스 섬의 명칭은 종교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국인들의
끝없는 대양 탐험과 침략적 야욕의 전통에 근거하여 발생한 명칭인것 뿐이다.

영국이 크리스마스 섬에서 실시한 핵 실험은 대략 다음과 같다.

1957년 11월 8일 해상공중폭파 1.8 Megaton
1958년 4월 28일 해상공중폭파 2 Megaton
1958년 8월 22일 지상풍선형폭파 1 Megaton
1958년 9월 2일 해상공중폭파 2.5 Megaton
1958년 9월 11일 해상공중폭파 2.5 Megaton
1958년 9월 23일 지상풍선형폭파 100 K ton

영국이 크리스마스 섬 근방에서 실시한 핵실험

1957년 11월 8일 2250 m 고공투하 핵 실험 (3차 연속 실험)
1958년 4월 8일 2350 m 고공투하 핵 실험 2 Megaton
1958년 9월 2일 2850 m 고공투하 핵 실험 2.5 Megaton
1958년 9월 11일 2650 m 고공투하 핵 실험 2.5 Megaton
1958년 9월 23일 지상풍선형 핵 실험, 세번 연속실험 23 K ton


영국이 키리바시의 말덴 섬에서 실시한 핵 실험

1957년 5월 15일 해상공중폭파 300 K ton
1957년 5월 31일 해상공중폭파 720 K ton
1957년 6월 19일 해상공중폭파 150 K ton

영국의 핵 실험은 전적으로 미국의 설계에 의존하여 성공을 했다. 영국과 미국은 냉전시대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에 일치하고 있었다. 영국의 핵실험은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 외에 또 다른 섬들에서도 수 없이 많은 각종 핵 실험을 영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또는 미국이 단독으로 제각기 핵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모든 핵 실험들은 1953-1962년에 다양한 형태의 핵 실험으로 적어도 50차 이상 감행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영국이 단독으로 두 섬, 크리스마스 섬과 섬의 주변에서 그리
고 또 말덴 섬에서 영국이 단독으로 실시한 핵 실험에 대하여서만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3. 영국의 핵 실험 진행과 사후처리와 피해 보상문제


영국이 단독으로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핵 실험을 엄청나게 진행한 과정과 그리고 핵 실험 후에 사후처리 및 보상문제등은 너무나도 비도덕적이며 또 비현실적인 야만적 처사로 시종 일관하고 있었다.

특히 보상문제에 대하여 너무나도 방대한 문제를 영국은 시종 묵살했다. 이에 대하여 국제사회는 문제를 계속하여 제기하고 있으며 명백한 역사적 자료가 태산처럼 넘쳐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빙산의 일각으로 다만 극히 제한된 요점만을 불가불 ㄱㄴㄷ순으로 기술을 시도할 수 밖에 없다.

ㄱ.영국이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위험한 핵 실험을 감행하기 사전에 당연히 주민들을 안전지역으로 대피시켜야 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게획이 전무한 상테에서 핵 실험을 감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핵 실험을 감행한 영국 군부의 비망록에 의하면 영국정부로 부터 아무런 확실한지침이 없었으며 다만 구두로 민중에게 핵폭파 광선을 피하여 눈을 감고 얼굴을 돌리라고 경고를 내렸다는 것이다.

영국군 당국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건물안에 뫃여 있으라고 경고를 했다. 그러면서도 영국군 당국은 핵 실험 폭파로 인하여 창문이 부셔질것을 미리 에측하고있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악날한 영국인들의 기만적인 두 얼굴의 모습인가?

핵 실험을 감행한 영국의 군부는 해상의 선박들에게 또 섬의 주민들에게 하등의선전문이나 확성기를 사용하여 대피를 통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가정하여 그러한 통고를 시도 했다면 도대체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가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이나 대책이 없었을 것으로 판단 된다는 것이다.

핵 실험후에 방사선 낙진이 섬 전역에 떨어저 쌓였는데도 불구하고 영국군당국의 비망록에 의하면 핵 시험후에 그러한 핵 락진은 없을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감행한 핵 실험에 동원된 인원은 총 2,500명으로추산한다. 뉴질란드인 500명과 오스트렐리아인 그리고 피지 정부가 제공한 대다수의 인원등 총 2,500명이 영국의 핵 실험을 위하여 종사했다.

그런데 1999년에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영국의 핵 실험에 동원된 2,500명 중에서 30%가 임이 사망했으며 이들은 하등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2,500명 중에서 100여명의 자녀들이 불임증 환자들이 됬으며, 또 핵 실험에 종사한 2,500명의 후손들이 척추병의 불치의 환자로 출생하는 확율이 5배이상 높다고 하는 연구실험 결과가 발표됬다. 그 외에도 백혈병과 암환자들이 본인들과 후손들 사이에서 속출하고 있으며 또 염색체 이상형 환자들이 계속하여 발생했다.

핵 실험이 1950년대에 있었는데 40년-50년 후에야 보상문제의 공방이 영국의 볍정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피해자들이 법정 소송을 진행하는 도중에 아무 결과를 모르고 보고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뒤늦은 법정 투쟁도 뉴질랜드인들과 오스트렐리아인 그리고 피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투쟁을 시도함으로 가능한 것이였다. 크리스마스 섬과 멘델 섬의 피해자들은 감히 영국정부에게 핵 실험 피해보상 같은 것은 요구 좋차도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는것이 과거와 오늘의 현실이다.

크리스마스 섬에는 2007년 현재 5,200 명이 생존해 살고 있다. 이들은 핵 실험 락진과 핵 페기물 오염물에 대한 제거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매우 위험한 곳에서 생존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4. 수몰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키리바시 공화국


남태평양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는 1900년대에는 서방의 참략과 식민통치하에 시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핵 실험장으로 까지 사용되는 비운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의 방대하고 잔인한 핵 실험의 참화속에서 겨우 살아 남은 오늘의 키리바시 민중들에게 2000년대에 들어 서서 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000년대에 들어 서서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북국의 빙하가 녹아 내림으로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 나라들은 수몰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비극에 처해 있다. 키리바시도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로서 이와 같은 비극에 예외가 될 수 없다.

지구온난화란 도데체 무엇이 문제인가? 지구온난화 문제는 지구대기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현상이 2000년대에 들어 서서 급증하여 북극과 남극의 빙산들이 녹아 내림으로 남태평양의 섬 나라들은 해발고도 2-4미터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곧 침몰의 위기에 처해 있게된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문명국들의 경쟁적인 산업화로 인하여 무진장 방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대기의 온도를 이르키고 있다. 그럼으로 태평양의 작은 나라들이 침몰의 위기에 처해 있는것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행한 영국과 미국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펜타곤의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향후 50년 내에 지구의 기후변화로 인하여난민의 발생이 증가하고 더욱이 핵 무기 경쟁으로 인하여 세계는 위태롭게 될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와같은 보고서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키리바시는 인구 10만의 작은 나라인데 수몰의 위기가 나타나고 있지만 이렇다할 대책이 속수무책이다. 하루 두번 썰물과 밀물이 엇갈리는 시간에 해안 주택들은 수상 가옥으로 변하고 아이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길을 헤쳐 왕래한다.

코코넷 나무가 무성했던 마을들은 침수되고 있으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지하수가 바닷물에 오염되는 것이다. 30년안에 이곳 섬이 바다 물에 잠길것을 생각하면서 떠날 곳을 찾고 있지만 슬픔마음로 쉽게 떠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키리바시 섬 사람들의 실질적인 문제는 이렇다할 기술도 학력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는 어디든 없다는 문제이다. 오스틀레리아와 뉴질란드는 노동능력이 있는 젊은 이민자들만 키리바시 난민으로 받아 들인다는 엄격한 제한을 제시하고 있다.

키리바시 공확국의 제 5대 대통령으로 현재 집권하고 있는 Annuo Tang 대통령의 말은 매우 심각하다. Tang 대통령은 영국과 미국을 향하여 쓴 소리를 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으세요?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 하고 있지요>

키리바시가 처해 있는 수몰의 운명에 대한 영미의 태도를 세계는 주시하고 있다.


5. 팔라우 공화국에 대하여


팔라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3000년전에 인도네시아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이 모계의 사회제도를 이루어 발전하여 살고 있은 것으로 알려졌다.

1543년에 스페인의 해양탐험가들이 팔라우를 발견했는데 1686년에 이르러서 스페인은 팔라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여 식민지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때 부터 100년 후인 1783년에 영국의 Henry Wilson이 팔라우에 상육하여 팔라우의 왕자를 영국으로 유학을 하도록 유인했다. 이로 인하여 영국은 팔라우에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됬다 그후 부터 100년동안 영국은 팔라우를 무역의 상대지로 삼고 있었다.

스페인은 영국을 견제하면서 여전히 팔라우에 대한 주권행사를 하고 있으면서스페인의 선교사를 팔라우에 파송하여 스페인의 문화를 전파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약소국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스페인은 팔라우에 대한 기득권을 미국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팔라우를 독일에게재빠르게 팔아 넘겼다. 1899년에 독일은 팔라우의 통치권을 획득하고 팔라우인 들을 농노로 삼고 코코넛 농사를 대대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팔라우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또다른 비극적인 운명으로 전락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는 1945년 까지 30년 동안 팔라우를 잔인하게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에 팔라우는 냉전체제하에서 미극의 지배를 받게 됬다. 점령군으로 등장한 미국은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의 지역에 흐터져 있는 4개지역을 하나로 묶어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창설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팔라우의 강한 반대에 부디쳐서 1981년에 팔라우 독립을 위한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을 선출했다. 미국은 1982년에 이른바 “자유합의계약”을 맺고 조건부 독립을 승인했다.

하지만 팔라우가 완전한 독립을 획득한 것은 그 후 12년이 지난 후 1994년 10월 1일에 비로서 자유계약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국이 됬던 것이다.

팔라우의 면적은 459km2 이며 거제도의 크기이다. 인구는 원주민 1만 5000명에 중국인과 일본인 5000명이 있다. 팔라우는 수백 개의 무인도 섬들이 있는데 1,500종의 어류와 700종의 산호들로 환상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팔라우는 특이하게 국민들이 모두 기독교 신자들인데 천주교 개신교로 양분된다.
팔라우 초대 대통령 Remiik 대통령은 암살로 쓰러졌고 제 2대 Salii 대통령은 자살로 쓰러졌다. 팔라우의 현 대통령인 J. Taribing 대통령은 2009년 1월 15일에 집권을 시작하여 총 인구 2만명의 작은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


이글을 끝 맺으며,


키리바시 공화국은 핵 실험 이라고 한는 인위적 재앙에 의하여 비극적 운명으로 멍든 나라이다. 뿐만 아니라 키리바시는 자연의 재앙으로 인하여 수몰의 비극적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자연의 재앙 이라고 하는 수몰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발생안 인위적 재앙이기 때문에 천재가 아니라 인재에 속하는 비극이다.

수몰로 인하여 살 수 없게 됬으면 다른 섬, 더 큰 섬으로 이동을 해야하는 것이 삶의 원리이며 국제법으로 허락되어야 한다. 이웃 나라 뉴질랜드, 오스트렐리아 그리고 영국과 미국도 하나의 큰 섬 나라들 아닌가?

그들의 광활하고 넓은 섬 나라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 인구 10만의 키리바시인들이 갈곳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윤리로 보나 국제적 법으로도 모순이며 큰 죄악이다.

그러면 이 모순과 큰 죄악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갰는가?

그 해결의 길은 오직 혁명이다. “혁명적 인간”이 되는 길이 오직 유일한 삶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혁명은 딴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결단하여 <주체적 의식> <주체적 사상> 을 가지는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길이다. 외부의 방해와 탄압에 대하여 당당히 <반항의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세상 부조리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도전하는 정신이 바로 주체 의식이며 이것을 가리켜 <주체 사상>이라고 한다.

자기의 운명을 자가기 개척하지 못하면 그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자기 민족을 자기 민족이 지키지 못하연 그 어느 나라가 지켜 주겠는가?

비록 고난의 행군의 길 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개인과 집단 그리고 민족의 자주력을 키워 나아가는 유일한 <주체의 길>이다.

영국과 미국의 핵 실험에 만신창이 되고도 보상 한푼도 받지 못한 키리바시의 비극은 눈물겹다. 강대국들의 탐욕으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수몰의 위기에 처해 있는 키리바시의 비극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이제라도 절망을 포기하고 잃어 버린 희망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반항의식을 생동하는 힘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승화된 반항의식으로 자주를 위한 주체의식을 강화 <주체사상>으로 재무장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 길만이 무지막지한 제국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다.

키리바시 민중들과 키리바시의 비극을 염려하는 모든 이들에게 삼가 나의 글을 드린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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