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76]남태평양 외딴 섬 사모아에서<br><br> 포착된 미국침략과 분열정책 고찰한다.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5월 1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연재-76]남태평양 외딴 섬 사모아에서<br><br> 포착된 미국침략과 분열정책 고찰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10-17 20:33 조회1,777회 댓글0건

본문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76번째 나라로 "사모아는 코리아 반도 남단에 있는 제주도
보다 약간 작은 두 개의 고구마 형상의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모아 (Samoa)는 “모아 새가 있는 섬”
이라는 어원에 의하여 유럽의 침략자들이 섬의 명칭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세아니아 (대양주)는
태평양 전역의 1000 개 이상의 섬들을 가리켜서 부르는 광대한 해양지역의 명칭이다".며 그의 76번째 연재기획을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76] 남태평양 외딴 섬 사모아에서

포착된 미국침략과 분열정책

동서로 분열시켜 <독립국 사모아>와 <미국령 사모아>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사모아는 코리아 반도 남단에 있는 제주도 보다 약간 작은 두 개의 고구마 형상의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모아 (Samoa)는 “모아 새가 있는 섬” 이라는 어원에 의하여 유럽의 침략자들이 섬의 명칭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세아니아 (대양주)는 태평양 전역의 1000 개 이상의 섬들을 가리켜서 부르는 광대한 해양지역의 명칭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조지 오웰 1984 는 오세아니아를 가상 국가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오세아니아 (대양주)를 지리학적이 아니라 민족학 상으로 구분하여 3 개의 지역으로 구분한다. <멜라네시아>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로 구분한다.

<폴리네시아>에는 사모아, 통가, 투발루등 3 개 독립국이 있으며 그외에 9개의 지역에 속하는 많은 섬들이 있는데 이 많은 섬들은 영국과 프랑스등 강대국들에 예속되여 있는 속령제도들이다. 그 중의 하나가 하와이 이며 하와이 제도는 미국의 속령이다.

사모아 역사의 기원에 대하여 BC 3000년경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과학적 증거에 의하면 사모아의 역사의 기원은 BC 2000년 이후에 말레이 반도, 동인도, 필리핀, 대만등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사모아 역사의 시조가 됬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사모아인들은 사모아 역사의 시조가 외부에서 이주해 왔다는 주장을 극구 반대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그들의 시조는 사모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하늘이 보낸 사람들로 인하여 사모아의 역사가 사작됬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모아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천지창조의 전설>을 가지고 있으면서 매우 자랑하고 있는데 타갈로, Tagalo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사모아에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주장을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하기를 <사모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고 주장한다. 사모아인들이 제아무리 타갈로 신의 창조전설을 주장한다 해도 현대 과학적 방법
으로 혈통계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모아의 조상들은 선사시대때 부터 피지 섬과 통가 섬의 원주민들과의 혼혈에 의하여 사모아가 번영했다고 설명 한다.

이와 같이 과학자들이 밝혀주는 사모아 역사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을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에게 독특한 전설이 있는것은 귀중하다. 하지만 그 나라 그 민족의 전 설이 아무리 독특하고 귀중하다 할지라도 그 전설에 근거하여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민족의 특권과 정치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나라와 민족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독특한 전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세계적 평화와 규범과 역사적 진보를 실천하는 투쟁의 과정에 있어서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는 <정의로운 투쟁의 전설적 전통> 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 무엇 보다 더 중요하고 고귀한 과제이다.

1. 사모아가 어떻게 동서로 분열 되였는가?


유럽의 침략자들이 사모아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한 때는 1659 -1729년경 이다. 네덜란드인 Jacob Roggeveen이 1722년에 사모아 섬에 탐험과 향료 상업의 길을 연 최초의 유럽인 이였다.

프랑스의 탐험가 Louis Antoine이 1768년에 사모아 섬에 상육하여 네덜란드인의 뒤를 따라 역시 탐험과 상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1787년게 프랑스의 탐험가 12명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첫번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세번째로 느깍이로 이번에는 영국이 1830년대에 사모아에 상업과 선교라는 명분으로 상육을 했다. 이 때는 벌써 사모아는 유럽의 강대국들의 분주한 쑈핑몰 같은 곳이 되고 있었다.

1830년대 후반에 영국 London 선교회 소속 선교사 John Williams와 Charles Barf이 사모아에서 전투적 선교방식으로 선교하여 교회를 세웠는데 이들은 주로 사모아 원주민들의 토속 종교를 박멸하는데 유명한 선교사로 기록됬다. 1844년에 영국은 선교본부를 사모아에 설립했다. 1847년에 영국은 영국 정부의 영사관을 개설했다.

1854년에 미국은 유럽의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사모아에 미국 정부의 영사관을독자적으로 개설하여 미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1857년에 독일의 무역회사인 J.C. Godeffroy 회사가 창설되여 성공적으로 무역을 확대하여 그 당시 남태평양 전역에서 유일한 무역회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1861년에 독일도 사모아에 독일 정부의 영사관을 정식 개설했다.

그리하여 1847 -1861년 까지 14년 사이에 영국, 미국, 독일 3 나라의 영사관들이 사모아에 나란히 경쟁적으로 개설됬다.

영국, 미국, 독일 3 나라가 3 파전을 맹렬하게 벌리고 있는 와중에서 사모아 에는 강대국들의 경쟁의 “주유소”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서구 강대국들의 침략의 경쟁의 장소가 되고 있는 불리한 상항에 처해 있는 사모아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쩍 한다던가?” 사모아 원주민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 났다.

사모아 원주민들은 투쟁과 폭력으로 3 개국의 외세를 대항하여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름이 폭력이며 투쟁이지 사모아 원주민들에게 투쟁이란 그야말로 “새 발에 피”일 뿐이였다. 사모아 원주민의 투쟁은 8년만에 완전히 끝나고 말었다. 1869년에 교활한 영국 의 선교사인 John Williams 는 극비에 사모아의 왕과 접촉을 시도하여 왕의 측근인 삼촌과 형제들과 면담하여 왕에게 왕권을 제한적으로 허락하는 조건하에서 종전을 성사 시켰다.

원주민과의 싸움을 잠재운 영국과 독일과 미국 3 개 나라들은 사모아를 독점하려는 경쟁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화시키고 있었다. 영국은 자국의 영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국의 군대를 사모아에 주둔 시켰다.

사모아는 2 개의 섬으로 이루워 졌는데 서편에 있는 섬은 조금 큰 섬 “사바이”섬 이다. 동편에 있는 조금 작은 섬은 “우폴루” 섬이다. 그런데 독일은 한 때 동편에 있는 우폴루 섬을 독차지하여 코코아와 코프라 생산에 주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우폴루 섬은 미국이 독차지하는 <미국속령 우폴루>가 되고 말 았다.

1879년 1월에 독일은 독자적으로 사모아 왕과 조약을 맺고 사모아의 주요한 항구에 독일의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협약을 획득했다.

한편 영국은 1879년 11월에 역시 독자적으로 사모아 왕과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사모아의 여러 지역에서 사용하던 각 지역마다 소유한 Flag들을 페기하고 영국이 제시하는 단일 flag을 가지도록 설득시켜 성공했다. 이것은 영국이 사모아에 대한 주권을 단독으로 획득하려는 야심을 의미한다.

1870 - 1880년에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 세 나라는 내막에서 사모아를 지배 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한 경쟁을 줄곳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특히 1898년에 이르러서는 <영향력>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소유권>의 문제로 비약하여 사모아를 소유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이 저마다 군함을 사모아 항구에 주둔시키고 있는 험악한 상항하에서 1899년에 이른바 를 개최했다. Tripartite Convention of 1899>를 다른 말로 표현 한다면 영국과 미국 그리고 독일 세 나라가 사모아를 서러 나누어 먹는 <분활정책의 3 자 회의> 이였다.

<분활정책 3 자 회의>의 결과는 어떻게 됬던가?

사모아를 둘로 분활하여 동편에 있는 우폴루 섬은 <미극령 사모아>로 확정 됬다. <미국령 사모아>는 그 때부터 현재와 미래에도 미국이 존재하는한 변함 없이 계속하여 미국이 독차지 하고 있을 것이다.

사모아 서편에 있는 사바이 큰 섬은 <독일령 사모아>가 됬다. 어찌하여 사바이 큰 섬이 <독일령 사모아>가 됬는가? 그 이유는 영국과 독일이 큰 도박을 했기 때문 이였다.

그 때 당시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통가 섬과 솔로몬 군도들을 영국에게 양도해 주는 대가로 독일이 서편 사바이 큰 섬을 차지하여 <독일령 사모아>가 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동시에 <독일령 사모아>는 종식되고 말았다. 독일은 19년동안 <독일령 사모아>를 붇들고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 패전함으로 독일은 <독일령 사모아>를 뉴질란드에게 빼았겼다.

<독일령 소모아>에서 해방된 서편 사모아 섬이 이번에는 뉴질란드의 식민지가 되여 1918년 부터 25년동안 뉴지란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다. 1962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서편 사모아는 뉴질랜드에서 해방되여 독립국 사모아가 됬다.

사모아 “우폴루” 섬은 동편이라는 말을 빼고 <미국령 사모아>가 공식 명칭이 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모아 “사바이” 섬도 서편이라는 말을 빼고 <독립국 사모아>가 공식 명칭이 됬다.

이와 같이 영국, 독일, 미국 세 나라의 치열한 침략과 야욕의 결과로 인하여 형제처럼 나라히 잘 지내던 사모아 두 섬의 역사는 동서로 분열되여 되돌아 올 수 없는 영구분열의 비극에 이르게 됬던 것이다.

2. <지길 박사와 하이드>의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말 하는 사모아의 비극


스티븐슨은 1850년 11월 13일에 영국에서 출생하여 1894년에 49세의 나이로 사모아에서 사망했다. 그는 그의 49세의 짧은 생애 동안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과 남태평을 여행하면서 정렬적인 저서활동을 했는데 그의 두번째 소설 유명한 “보물섬”을 1883년에 발표했다.

그는 그의 49세의 짧은 일생 동안 20편의 소설과, 25개의 단편. 7편의 기행문, 5권의 시집 그리고 수를 이루다 파악할 수 없는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스티븐슨의 그 많은 작품중에서 필자가 발견한 놀라운 것은 스티븐슨이 사모아인 이였다는 사실이다. 스티븐슨은 사모아에 집을 마련하여 살다가 사모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묘지와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사모아에 세워졌으며 그의 유물들이 사모아에 보관되여 있다고 한다.

스티븐슨이 사모아에 살면서 1882-1892년의 10년동안 사모아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목격담을 작가의 통찰력을 통하여 낱낱히 기록했다. 그때 당시 사모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 독일, 미국 세 나라가 사모아를 서로 독차지 하려고 야비한 <제국주의 싸음>을 싸우고 있는 모습을 스티븐슨은 목격자로서 분노하면서 그 때 그 비극적 상항을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작가의 상상적인 소설이 아니라 사모아에서 강대국들이 싸우고 있는 현실을 작가의 솜씨로 실화를 적나나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영어 그대로 "Eight Years of Trouble in Samoa"이다. 이 책은 154 page로 기록되여 있는데 그 내용은 스티븐슨이 탐욕의 백인들에 대한 분노와 백인들의 침략의 정치적 구조에 대하여 깊은 관찰을 하면서 기록한 작품이다. 사모아의 원주민들이 영국과 독일 미국의 침략자들이 그들의 조상이 물려준 고귀한 문화적 유산을 마구 파괴하는데 대하여 분노하는 모습들을 그대로 전해 준다.

끝으로 스티븐스는 옛날의 콜럼버스의 역사와 사모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역사는 별로 다를바 없는 유럽 백인들이 저지른 죄과이라고 말하는 따끔한 비판으로 이 책의 끝을 맺는다.

3. 독립국 사모아의 역사


1700년대초부터 유럽인들이 사모아에 접근해 오면서 온갓 침략과 착취 뿐만 아니라 사모아의 귀중한 고대역사적 전통을 말살시키는 수난의 긴긴 200여년 동안비극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8년에는 이르러서는 형제같은 사모아의 두 섬을 동서로 분열시켜놓고 동편 사모아 섬을 <미국령 사모아>가 되여 영원히 미국의 속령이 됬다.

서편에 있는 조금 큰 사모아 섬은 <독일령 사모아>가 되여 19년 동안 무서운 독일의 나치정권의 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여 <독일령 사모아>는 이번에는 새로운 침략자 뉴질랜드의 식민지가 되여 25년 동안 뉴질랜드와 그 배후에 있는 영국
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또 다시 처해 있었다.

1962년에 이르러서 사모아는 25년간의 뉴질랜드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했다. 사모아는 남태평양에서 첫번째 독립국이 됬다. 사모아는 1970년에 영국 연방에 가입하여 영국연방의 회원국이 됬으며 1976년에는 UN에 가입했다.

사모아는 독립후 10년의 준비기간이 지난 후에 1973년에 비로서 초대 총리를 선출 했다. 첫번째 총리로 선출된 <피아메 물리누> 총리는 사모아 정부를 수립하고 장관으로 12명을 임명했다. 피아메 물리누 초대 총리가 12살 때 1929년에 사모아 민중들이 뉴질랜드 식민지 통치를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맹렬히 진행하면서 항쟁데모를 했다. 그 때 뉴질랜드 경찰은 데모하는 사모아 군중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런데 피아메 물리누 총리는 그 때 12살의 어린 나이로서 데모하는 군중속에서 함께 싸우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는 부상을 당했다고 하는 기특 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피아메 물리누 초대 총리는 1973 -1976년에 집권을 했는데 그에 대한 기록중의중요한것 하나는 그 때 당시 프랑스가 남태평양에서 핵실험 하고 있었는데 이에대하여 피아메 물리누 총리는 프랑스 정부에게 강력한 항의를 하여 남태평양에서 유일한 용감한 지도자로 알려졌다.

사모아의 제 2대 총리로 1976-1982년에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가 등장 했다.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는 역대 총리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 총리로 알려졌는데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저서도 여러권 있다.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는 냉전시대가 한창이던 1976년에 집권을 시작하였는데 사모아 독립기념일에 국가적 축하행사를 크게 진행 하면서 <소련 대표>를 귀빈으로 축하행사에 초청했다. 이로 인하여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를 학자이며 진보적인지도자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는 1981년에 그의 집권 말기에 이르렀을 때 그는 <중국과 외교적 관계>를 처음 개설하기도 했다. 중국이 남태평양에 접근한교량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 당시 사모아는 영국 선교사들의 강한 영향하에서 기독교 보수세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시대였다. 그럼으로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의 단호한 대외정책에 대하여 <용공주의자> 라고 비판하면서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항의하는 소리가 기독교의 교계에서 강하게 들려왔다고 한다. 1982년에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는 재집권을 위하여 재선에 도전했다. 하지만용공주의자라고 반대하는 세력에 몰려 타이시 투시올라는 재선에 실패했다.

그리하여 친미보수 정당인<인권옹호당, HRPP>이 처음 창당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 등장함으로 인하여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는 선거에서 재선에 패배하여 퇴진하고 말았다.

그 때 당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인권옹호당, HRPP>은 기독교 세력을 배경한 친미 보수주의정당 이였는데 <바아이 콜로네, Va’ai Kolone>가 직접 창당하고 자기자신이 출마하여 선거에 승리하여 제3대 총리가 됬던 것이다.

그런데 바아이 콜로네, Va’ai Kolone 제3대 총리는 <1982넌 4월- 9월> 5개월동안과 <1985년-1988년> 3년 동안에 정국이 “요동치는 혼란”속에서 불안전한 집권을 겨우 3년 5개월을 하다가 그는 퇴진하고 말았다.

바이이 콜로네 Va’ai Kolone 총리의 정권이 “요동치는 혼란”에 빠진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이였는가?

그 이유는 사모아의 제1대 총리와 제2대 총리가 집권하던 1970년대-1980년대는 냉전시대의 절정에 올라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사모아가 아무리 작은 나라이다 할지라도 미국은 사모아의 제1대 총리와 제2대 총리가 친소련, 친중국으로 기우려지고 있는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미국은 소모아의 제3대 총리 후보자로 바아이 콜로네, Va’ai Kolone를 등용시켜 그로 하여금 친미 정당인 <인권옹호당, HRPP>을 창당하게 함과 동시에 그를 사모아의 총리 후보자로서 선거에 승리하여 제3대 총리가 되게 했다.

하지만 미국은 바아이 콜로네 Va’ai Kolone를 3년 5개월 이상 더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은 보다 더 유효하고 안전한 친미 보수주의 지도자를 또 다시 새로 등용시켜 소모아를 통치하도록 하는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계획 대로 <인권 옹호당, HRPP>당은 보다 더 강력하고 안전한 친미 보수 주의 집권당이 되여 제4대 총리로 토필라우 알레사나가 집권을 하게 됬다. 토필라우 알레사나 총리는 1982-1985, 1988 -1998년에 모두 13년 동안 친미 정책으로 장기집권을 했다.

토필라우 알레사나 총리는 1924년생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목사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전통의 가정에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족하는 <미국령 사모아> 섬의 주지사이며 그 외에도 미국과 관련이 깊은 공직자들이 그의 친척들 중에서 크게 진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토필라우 알레사나는 사모아의 4대 총리가 되여 13년간 집권을 했는데 그가 사모아 역사에 남긴 집권기록들은 전무후무한 <부패와 독재>라고 하는것 외에 아무것도 남긴것이 없었다.

토필라우 알레사나 총리는 대학에 입학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의 독재 정치와 부패한 정권은 그의 무식과 무지의 산물이라고 여론은 맹렬히 비평했다. 하지만 토필라우 알레사나 총리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대통령을 함부로 반대와 비난을 하는 것은 옳치 않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토필라우 알레사나 총리가 13년간 집권한 부패정권에 등용되여 종사한 고급 관리들은 모두 다 부자들이 됬다고 사모아 언론은 보도한다.

어찌하여 그들은 모두 다 부자가 됬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모아 언론은 말해 주는데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를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사모아의 젊은 세대들이 즐겨 사용하는 website에서도 쉽게 찾아 볼수 있다.

1998년 8월에 토필라우 알레사나 총리는 건강의 악화로 인하여 13년간의 통치를 스스로 포기하고 퇴진할 수밖에 없게 됬다.

1998년 11월에 건강상 이유로 퇴진할 수밖에 없게된 알레사나 총리의 후임으로 말리엘레가오이 부총리가 총리로 취임했다.

사모아의 제5대 총리로 취임한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는 <인권 옹호당, HRPP>의친미 보수주의 전통을 이어 받아 총리가 됬다. 그는 1998년 11월 부터 2011년 10월 현재 까지 13년째 집권을 하고 있다.

그는 2011년 3월에 3차 재선으로 총리가 되였음으로 적어도 2014년 까지는 그 의 임기가 법적으로 보장되여 있다. <인권옹호당,HRPP>은 1982년에 창당하여 줄곳 친미 보수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기독교를 배경으로 삼고 튼튼한 집권 여당이 되고 있다.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는 1954년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 지식인 정치가이다. 그는 지식인 정치가 임에도 불구하고 무식한 전임 총리 밑에서 부총리와 경제분야의 고관직들을 두루 맡아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5대 총리가 됬다.

사모아 보수주의 집권당인 <인권옹호당>은 1982년 창당이래 6차레 선거를 치루었는데 6번 모두 다 승리한 무적의 최장 독재정당으로 기록되여 있다. 제5대 총리 말리엘레가오이 총리가 현재 13년간 집권을 하고 있으며, 만일 그의 임기를 모두 다 채운다면 16년을 집권하는 최장기 독재자가 될것으로 예견된다.

토필라우 알레사나 제4대 총리의 13년 통치와 또 현재 말리엘레가오이 제5대 총리의 13년 독재정치를 모두 합하면 26년이 된다. 이 26년간의 통치행태에 대한 평가를 와 등에서 폭로한 것들을 사모아의 webside에서 수백개를 찾아 볼수 있다.

지면상 제한으로 밝혀진 평가의 <찬성>과 <반대> 양편의 중요한 요점들을 간략 하게 간추려서 기록해 본다.

ㄱ) 사모아는 전체 인구 192,000명의 98%가 기독교인이며 교회가 없는 동리를볼수 없다. 세계 최고의 기독교국이다. 2011년 현제 까지 26년간 집권하고 있는 <인권옹호당, HRPP>당 정권은 모든 학교 교육에서 기독교 종교교육을 필수과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기독교국 이다. 하지만 사모아 정부의 독재와 부패지수는 UN 180개국 중에서 최악의 국가 30개 나라들 중의 하나로 기록되여 있으니 큰 모순이 아닌가?

ㄴ) 사모아는 전체 인구 192,000명 중에서 국외에 거주하고나 아니면 외국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100,000명이 벌어드리는 자금이 국가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또 미국의 보조 없이는 국가경제를 유지할 수 없다.

ㄷ) 사모아는 군대가 없으며 경찰의 역할도 매우 제한적이다. 사람들이 싸우다 서로 보복하는 일이 허다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과 마약문제등이 사회악으로 만연하고 있다. 정부의 고관이 큰 성범죄등 중죄를 저질러로 30개월 형으로 끝나고 만다.

사모아에는 제도가 있다. 추장은 동리마다 있는데 경찰과 재판관의 권위를 행사하는 사모아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동리에서 범죄자를 동리밖으로 추방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전통적 교회를 떠나 다른 교파나 신흥 종교로 이전하는것까지도 Matai는 관여하고 금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ㄹ) 사모이의 정치적 부패는 총리의 자질문제에 기인하고 있다. 사모아 4대 총리토필라우 알레사나를 보라.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친미파이다. 그는 미국 달러로 자신의 부를 채웠다. 그는 또 <미국령 사모아>와도 이권으로 연결되여 있다. 하지만 민중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ㅁ) 사모아의 문제는 간단하다. 부패한 정치인들을 하루 속히 도태시켜야 한다.가난한 민중인 우리들은 배가 몹시 곺으다.

ㅂ) 토필라우 알레사나 제4대 총리는 하나님을 믿는 지도자이며 하나님이 선택한 지도자이다. 불행하게도 그의 참모들이 부패하여 그의 명예를 추락시킨것 뿐이다.그에게 모든 부패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옳치 않다.

ㅅ) 사모아의 제4대 총리보다 더 나쁜 총리는 현재 집권하고 있는 제5대 총리인 말리엘레가오이 총리이다. 내가 믿기는 사모아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신앙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내가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를 규탄하고 비판하는 이유는 그의 부패와 오만한 태도이며 그의 잘못된 외교정책이다. 미국을 의지하는 외교정책이 항상 최선은 아니며 그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사모아 website에서 인용한 위의 찬성과 반대의 자유논객들의 이야기들은 수백개가 있다. 하지만 위의 7개를 인용한 글을 통하여 독자들은 사모아 역사의 현장을 가히 엿볼 수 있기를 바란다.

4. 미국령 사모아, American Samoa에 대하여


1899년에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 세 나라는 사모아 두 섬의 소유권 문제에 대하여 각투전을 벌리고 있었는데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 나라는를 개최했다.

세 나라 회의는 사모아 두 섬을 둘로 분활하여 동편에 있는 우폴루, Upolu 섬은미국이 차지하고 서 편에 있는 사바이, Savai 섬은 독일이 차지하기로 결의 했다.

영국은 통가 섬과 솔로몬 군도를 독일로 부터 양도를 받는 대가로 사모아 섬에 대한 욕심을 포기했다.

<미국령 사모아>의 역사는 1899년 부터 이렇게 시작됬던 것이다. 1900넌에 처음으로 미국 성조기가 동편 사모아 우폴루 섬에 게양되여 미국의 영토가 된것을획인 했다. 미국령 사모아의 전체 면적은 76km2이며 Washington DC보다 약간 작은 정도다. 인구는 60,000 정도 있다. 미국령 사모아는 총이 통치하며 자체 헌법이 있다. 1900년 부터 1950년 까지 50년간은 미국의 해군제독이 통치했는데 1951년 부터 미극 국무성 통치로 변경하였으며, 1977년 부터는 현지인 총독 (주지사)을 선출하여 자체 행정부가 미국령 사모아를 통치하고 있다.

미국령 사모아의 의회는 양원제이며 상원 18명의 임기는 4년이다. 하원 의원은 21명이고 임기는 2년이다.

미국령 사모아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미국 군에 입대한다. 그 이유는 경제 빈곤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령 사모아 출신 군인들이 이락과 아프카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여 발생하는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가 인구수에 비교해 보면 크게 불균형 하다는 문제가 제기되고있다. 미국령 사모아 출신 군인이 20명이 사망했는데 미국 본토의 군인 20명의 사망자 수와 비교하면 엄청난 불균형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은 Apollo Program 10, 12, 13, 14 그리고 17차에서 우주인들의 귀환지점으로 미국령 사모아에 있는 Pago Pago 비행장을 이용했다. 미국이 미국령 사모아를 Apolo Program에 사용하는 모습을 전세게에 자랑스럽게 숨김 없이 과시를 했다.

하지만 미국이 미국령 사모아를 사용하여 남태평양 전역을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밀 작전을 펴고 있는 모습들은 절대로 눈에 띄지않고 비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 전역에 정략과 전략적 이익을 위하여 미국령 사모아를 Pago Pago 비행장 이상으로 유효하게 사용하고 있다.

다 잘 아는 이야기 이지만 미국은 Korea 반도의 6.25 전쟁 때도 미국령 사모아를 사용할려고 계획을 했던것이 폭로 됬다.

<한국을 사모아 군도로 옮겨라>

이 말은 1950년 12월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계획 여하에 대하여 논의하는 과정에서 멕아더 사령관과 트루먼 대통령 사이에서 오고간 대화의 일부 중에서나온 말이다.

맥아더는 만주폭격, 중국해안 봉쇠, 대만군 투입, 그리고 미군 증원을 통하여 한국전의 승리를 이끌어 내갰다고 미국정부에 간청을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을 미국 정부가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이와같은 경우에는 미군을 철수한다 라고 맥아더 장군은 명백히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 정부가 맥아더 장군의 건의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경우에 그 때는 어떻게 할것인가?

만일 미국 정부가 맥아더 장군의 건의를 거부한다면 그 때는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군만 철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는 한국인들도 함께 철수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이 미군 합동 참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 나온 말이 있다.

<한국인 32만 8,000명을 미국령 사모아로 옮겨 그 곳에서 뉴 코리아를 만든다> 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 민족에게 치명적인 발언이였는가?

그런데 그때 당시 Washington 막후에서 중국과 협력하여 휴전을 한다는 논의가제일 큰 의제였다. 하지만 그때 미국이 논의한 회의록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정부에게 의견을 묻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모든 결정은 한국의 개입 없이 진행되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때나 오늘 이명박 정권하에서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의 강요에 굴복하여 매국적 조약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국민의 뜻과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끌려가고 있을 뿐이다.

5. 사모아와 중국과의 관계에 대하여


사모아는 제주도 보다 작으며 Washington DC 보다 더 작은 섬 나라이다. 사모아는 면적이나 인구와 그리고 군대도 전혀 없는 섬 나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앞바다로 여겨지던 남태평양 작은 섬 나라들이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넓혀짐에 따라 동요하고 있는데 대하여 미국은 매우 불안해 하고 있다.

중국은 피지와 파푸아 뉴기니아를 비롯하여 남태평양의 군소 국가들에게 경제적원조를 제공해 줌으로 인하여 UN에서 중국은 <개발도상국을 대변한다> 라는 말을 듣고 있다.

미국이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칸 전쟁등에 빠져서 헤메고 있는데 반하여 중국은 남태평양 군소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영향력은 사모아에서도 절대로 예외는 아니다. 중국은 사모아를 위하여 정부종합청사를 건설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사모아 병원에 x-ray 장비를 비롯하여 CT scanner등 많은 의료품을제공해 주었으며 중국 의사들이 사모아에 직접 와서 장기적으로 의료사업 지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중국은 사모아에게 상환 기간이 긴 이른바 “소프트론”을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2008년에 중국은 사모아에게 중국돈 1,360,000을 교육지원으로 제공해 주었다. 중국이 사모아에게 제공해 주는 경제지원은 사모아 GDP의 16%에 이른다.

2008년에 소모아 정부는 공식 문건으로 중국의 티베트 문제에 대처하는데 대하여 사모아 정부는 중국정부를 전적으로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사모아와 중국이 외교관계의 재개를 선언한 것이였다.

2011년 4월 13일에 중국 정치자문 위원회 큉링 위원장이 사모아를 공식 방문했다. 큉린 위원장은 중국과 사모아의 국교는 1975년에 맺었는데 그동안 중단됬으나 다시 재개하게 된것을 기쁘게 여긴다고 했다.

큉린 위원장이 말한 “1975년에 맺은 국교”란 무엇을 뜻 하는가?

그것은 사모아의 제2대 총리였던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가 그 때 당시 냉전시대 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국교를 맺었던 역사를 상기시키는 말 이였다. 그때 타이시 투푸올라 총리는 소련과 중국에 대하여 개방정책을 시도한것 때문에 사모아의 <인권옹호당, HRPP>이 선동한 “빨갱이 정치” 논쟁에 의하여 재선에 실패하여 퇴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큉린 위원장은 분명히 이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상기 시키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큉린 위원장은 중국 정부는 사모아에게 40 million RMB을 제공해 주며 또한 농업 발전을 위한 지원도 계속 할것을 약속했다. 사모아는 중국의 양안 문제에 대하여 중국의 단일국가 체제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사모아의 제5대 총리로 등장하여 현재 13년째 집권하고 있는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는 친미 보수주의 우익 정치인으로 유명하고 그의 정치행태는 부패정치로 낙인 찍힌지 오래 됬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친서방 정책과 배치되는 중국과 접근하고 중국으로 부터 원조를 받아 들이는 좌향정치 형태로 점차 전향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의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하여 몇가지 해답을 시도해 본다.

첫째, 사모아는 동서로 분렬되여 <미국령 사모아>와 <독립국 사모아>로 대립되여 있다. 그런데 <미국령 사모아>는 미국의 친자식으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에 비교하면 <독립국 사모아>는 서자의 위치에서 서러움을 받으면서 마지못해서 친미적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취측된다.

2009년 9월에 사모아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양편 사모아에서 많은 사망자와 난민이 발생했다. 독립국 사모아에서 3,000명이 집을 잃은 난민이 발생 했다.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는 지진으로 $147.25 million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발표를했다.

뉴질랜드와 이웃나라 수상들이 독립국 사모아를 방문하여 위로와 구호를 약속했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령 사모아>를 위해서는 막대한 복구비지원금를 보내 왔지만 <독립국 사모아>에 대해서는 냉담한 차별만 보일 뿐이였다.

미국은 <미국령 사모아>에서는 국가차원의 장학제도를 설립하여 해마다 50명을 선정하여 막대한 장학금을 지불하고 있다. 하지만 <독립국 사모아>에는 그런 혜택이 전혀 없다.
이런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친미 독재자로 악명 높은 말리엘레가오이 총리 이지만 이제는 정치적 성향이 점차 친미노선에서 부터 이탈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둘째,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는 2009년 9월 7일 부터 자동차 통행을 <우측통행>에서 <좌측통해>으로 번경하는 특별법을 사모아 전국에게 발표했다. 자동차의 통행을 갑짝이 좌측통해으로 변경하는 돌출 결정 발표는 우선 <미국령 사모아> 와 아무 협의 없이 변경했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차별성을 부각 시키는 의도적 정책이라고 해석된다.

세째,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는 또한 사모아의 “날짜변경선”을 갑찌기 변경한다고 돌출 발표를 했다. 사모아는 1892년 부터 지금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간에 맞추어 왔다.
그런데 갑짝이 119년 만에 날짜 변경선을 호주와 뉴질랜드에 맞추어 세계에서 하루가 가장 먼저 시작되는 나라로 만든 것이다. 왜 그랬는가?

말리엘레가오이 총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교회에 가는 시간에 뉴질렌드 사람들은 이미 월요일이 시작되고 있음으로 우리는 손해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변명이다. 필자는 이것도 역시 미국 캘리포니아와의 연결을 끊어 버리며 또한 <미국령 사모아>와도 날짜와 시간 차도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돌출행위라고 여겨진다. 끝.


//////////////////////////////////


*관련 보도자료 보기



한국 정부가 자칭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전하면서도 알권리를 차단해 왔습니다. 남측 당국은 한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이 이 보도 자료들을 볼수 없도록 인터네트 열람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한국 독자들이 twitter 와 facebook을 통하여 이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