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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75]서방열강에 상처받아 온 ”파프아 뉴기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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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10-02 19:23 조회1,7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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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75번째 나라로 "뉴기니아 섬은 이 지구상에서 그린란드 섬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섬이다. 공룡처럼 생긴 뉴기니아 섬은 코리아 반도의 4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하지만 뉴기니아 섬의 비극의 역사는 서구 유럽 외세가 끼친 치열한 각축전의 희생물이 되었다. 뉴기니아 섬이
동 서로 분렬되여 <인도네시아>와 <파푸아 뉴기니아> 두 나라가 서로 뉴기니아 섬을 반쪽식 차지하여 나라를
세우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며 그의 75번째 연재기획을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75] 남태평양의“지상낙원”

파프아 뉴기니아에 외세가 끼친 비극

풍부한 지하자원은 미국의 배만 부르게 해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뉴기니아 섬은 이 지구상에서 그린란드 섬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섬이다. 공룡처럼 생긴 뉴기니아 섬은 코리아 반도의 4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하지만 뉴기니아 섬의 비극의 역사는 서구 유럽 외세가 끼친 치열한 각축전의 희생물이 되었다.

뉴기니아 섬이 동 서로 분렬되여 <인도네시아>와 <파푸아 뉴기니아> 두 나라가 서로 뉴기니아 섬을 반쪽식 차지하여 나라를 세우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쪽 절반은 <인도네시아>의 영토이고 동쪽 절반은 <파푸아 뉴기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뉴기니아 섬에 사람이 최초로 정착한 것은 5만년 전 일것 이라고 추측하며 이곳에 석기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동남 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약 9천년전 부터 뉴기니아 섬의 고원지역에서 농업을 발전시킨 것으로 본다. 그후 약 2천 5백년 전에는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이 돼지를 사육하고 고기잡는 기술을 뉴기니아 섬에 도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6세기 까지 뉴기니아 섬에 대하여 서구의 열강들에게 알려진 것은 별로 없었다.

유럽인들이 뉴기니아 섬에 처음 도착한 것은 1512년에 포루투갈의 침략으로 부터 시작 됬다. 포루투갈인 Jorge Meneses는 뉴기니아 섬에 ”곱슬 머리 칼을 가 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하여 Ilhas dos Papua라고 섬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그후 스페인이 뒤를 따라 왔으며 스페인은 뉴기니아 섬에 Catholic을 가지고 왔다. 그후 1602년에 네덜란드가 침략을 대대적으로 시작 했는데 네덜란드인들은 뉴기니아 섬 사람들이 서아프리카의 기니 사람들과 비슷하다하여 New Guinea라고 불렀다.

포루투갈인들이 부른 Papua와 네덜란드인 들이 부른 New Guinea 둘을 합하여 “파푸아 뉴기니아” 라고 하는 섬의 별명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뉴기니아 섬에 욕심을 냈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인하여 떠나 가고 말았으며 독일도 욕심을 내여 1884년-1914년에 뉴기니아 섬의 북부지역에서 침략행위를 하다가 영국에 밀려 떠나 갔다.

이번에는 영국이 뉴기니아 섬을 손에 넣고 지배했다. 1814년에 런던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두 나라는 뉴기니아 섬에 대한 식민지통치권 분쟁을 합의하였는데 영국은 네덜란드에게 통치권을 일시 양보해 주었다. 하지만 영국의 야심은 또 다시 발동했다. 영국은 네덜란드에게 양보해 주었던 뉴기니아 섬을 다시 빼앗아 1883년에 <영국령 연방뉴기니아>로 제정해 놓았다.

서구의 열강들이 1500년대 부터 19세기에 이르는 300년 동안 뉴기니아 섬을 침략하여 동서남북 4방에서 서로 뜯어먹기 경쟁을 했는데 이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서쪽: 네덜란드 (Dutch New Guinea)
북쪽: 독일 (German New Guinea)
동쪽과 남동: 영국 (British New Guinea)
뉴기니이 섬 전체: (영국은 뉴기니아 섬 전체를 독차지하고 통치권을 호주에게 위임 했다. (Territory of Papua & New Guinea)

영국은 1905년에 뉴기니아 섬 전체에 대한 <영국령 연방뉴기니아>를 후주에게 넘겨 주 었다. 왜내하면 <쌈지돈, 주머니돈>이 마찬가지인것 처럼 호주는 임이 영국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처지의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부터 호주는 뉴기니아 섬의 식민지 종주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호주는 남태평양 전역에서 영국을 위하여 <골목대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뉴기니아 섬을 몇년 동안 점령했다. 하지만 1945년에 일본은 패전하여 뉴기니아 섬에서 완전히 떠나 갔다.

그런데 일본이 떠나간 후에 뉴기니아 섬의 서쪽 반쪽에서는 수카루노가 지휘하는 게릴라 투쟁이 독립을 위하여 맹렬하게 5년동안 전개하고 있었다. 뉴기니아 섬의 서쪽은 본래 네덜란드의 침략자들이 주로 지배하고 있던 네달란드의 식민지 이였다.

그럼으로 뉴기니아 섬의 서쪽에서 네덜란드를 대항하여 수카루노의 게릴라 투쟁이 시작됬던 것이다. 수카루노의 게릴라 독립투쟁의 대상은 첫째가 네덜란드며 그 다음이 영국과 호주였다. 네덜란드는 수카루노를 체포하여 3년간 투옥했다. 하지만 결국 수카루노는 독립을 위한 투쟁에 승리하여 뉴기니아 섬의 서쪽에서 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수카루노의 게릴라 독립투쟁이 승리하여 1950년 8월에 뉴기니아 섬의 서쪽 반쪽에서 자주독립을 성취했다. 그 나라가 바로 오늘의 <인도네시아> 독립국이다.

그러면 뉴기니아 섬의 동쪽 절반 지역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전게되고 있었는가?

호주의 식민지이며 동시에 <영국령 연방> 뉴기니아 섬의 서쪽 절반이 분렬되여 <인도네시아>의 독립국으로 떨어져 나가는 과정을 바라 보면서 이에 대하여 당황한 것은 우선 호주이며 다음은 영국이였다.

호주는 허겁지접 1949년에 뉴기니아 섬의 동쪽 절반을 호주와 합방시키는 긴급조치를 취하여 뉴기니아 섬의 동쪽 절반을 호주와 통합 하도록 합방을 했다.

1949년 부터 뉴기니아 섬의 동쪽 절반은 호주의 식민지가 아니라 아예 호주와 합방하여 호주의 영토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반도를 합방하여 이른바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것과 같은 침략의 방법인데 조선반도는 일본의 영토가 되여 <성씨개명>까지 강요당했다.

1973년에 호주는 뉴기니아 섬의 동쪽 절반을 호주와 합방을 강행 했지만 뉴기니아 섬의 민중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호주는 뉴기니아 섬의 동쪽 절반에 대해 이번에는 “자치주”로 승격시키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자치주>로 승격시킴으로서 뉴기니아 섬의 민중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려 했다.하지만 자치주로 승격시킴으로서 민중들의 독립을 요구하는 거센 불만과 항의를 잠재우며 무마를 시킬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리하여 호주는 2년후인 1975년 9월 16일에 할수 없이 뉴기니아 섬의 동쪽 절반을 드디어 <파푸아 뉴기니아> 독립국으로 승인을 했다. 독립국이된 파푸아 뉴기니아는 영국의 연방제도 밑에서 독립국이 됬으며 10월 10일에 UN에 가입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는 냉전으 몸살을 앓은 뉴기니아 섬은 동서로 양분되여 서쪽에서 <인도네시아> 국가가 먼저 창건되였으며 그리고 동쪽 절반에서도 역시 <파푸아 뉴기니아> 국가가 새로 창건됨으로 뉴기니아 섬의 분렬의 역사가 전개 됬던 것이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지하자원이 무진장 풍부한 뉴기니아 섬은 서구 강대국들의 침략의 대상이 되여 300년동안 몸살을 앓았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에는 냉전시대로 인하여 뉴기니아 섬은 결국 영원히 되돌아 갈 수 없는 영구분단이 되여 동쪽과 서쪽에서 두개의 독립국이 창설됬던 것이다.

1. 독립국이 된 파푸아 뉴기니아의 파란만장한 발 자취


1975년에 독립국이 된 파푸아 뉴기니아는 면적이 462,840km2로 코리아 반도의2배가량되며 인구는 600만명으로 추산하며 인구의 15%가 도시에 거주한다.

파푸아 뉴기니아는 독립을 했지만 영국의 련방국으로 독립을 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국가 수반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3세 여왕이다. 엘리지베스 3세 여왕 밑에는 파푸아 뉴기니아의 총독이 있다. 총독은 의전적 기능과 내각의 결의사항에 대하여 형식적인 추인을 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을뿐이다.

파푸아 뉴기니아는 6백개의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도서국이며 800개가 넘는 부족들이 800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전통 문화를 창조하고 고수하면서 제각기 살아 가고 있는 나라이다. 파푸아 뉴기니아의 행정구역은 19개의 주로 분활되여 있으며 각 주마다 독자적인 입법 체제를 가지고 있다. 파푸아 뉴기니아 중앙 정부의 정당의 수는 현재 18개의 정당들이 난립해 있다.

파푸아 뉴기니아의 중앙정부는 총선을 통하여 109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선출된 국회 의원들은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수상을 선출한다. 총선 때 마다 정당들 사이에 충돌과 총격사건이 항상 발생하여 정국의 불안을 이르키고 있었다.

1975년에 파푸아 뉴기니아 국가창건이후 2011 까지 36년 동안 총선을 8번 치루었다. 그리고 36년 동안에 최고 지도자로 등장한 수상들은 모두 12명 이다. 그런데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수상의 정치생명은 평균으로따지면 2년 7개월의 단명의 수상으로 모두 다 끝 났다. 하지만 12명의 단명의 수상들 중에서 유일하게 3차의 재선을 통하여 17년동안 장기집권을 계속한 수상이 한 사람 있었다.

파푸아 뉴기니아의<국민 연합당, National Alliance>의 당수인 마이클 소마레, Michael Somare 수상은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로서 초대 수상으로 3년간 집권을 한 후에 또 다시 3번이나 수상으로 재선되여 4차집권을 하면서 17년간 통치했다.

17년간 통치를 한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2011년 8월 2일에 75세의 노인으로서 심장병 중환자가 되여 모든 권한과 직책을 후임자 피터 오네일, Peter O’Neil 신 임 수상에게 넘겨주고 퇴임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2011년 6월에 싱기포르에서 병원에 입원하여 심장수술을 세번이나 받았으며 회복이 불투명한 중환자가 되고 있다.

마이클 소마레는 36년간 국회의원의 자리를 보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17년간 수상으로서 화려한 정치적 경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장기집권 정치적 경력에 대한 평가는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긍정적 평가 보다는 부정적 평가의 요소들이 너무나도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마이클 소마레의 국회의원과 수상으로서의 36년의 긴 세월 동안 정치적 경력과 통치행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을 살펴보고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

ㄱ. 마이클 소마레 수상이 2011년 6월 이후 싱가포르에서 심장수술을 받고 치료 와 투병을 하고 있는 와중에 파푸아 뉴기니아 의회는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재임 직위권을 전격적으로 종결시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소마레 수상에 대한 수상직의 직위종결 결의안을 전격적으로 채택한 이유는 그가 심장병으로 입원하여 수상의 직무수행이 불가능 했기 때문이 아니였다.

파푸이 뉴기니아 의회가 마이클 소마레 수상에 대하여 수상직위 종결안을 전격적으로 결의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1990년-2010년 20년 동안에 마이클 소마레 수상이 그때 당시에 의회에 제출한 <재정보고> 문건들이 모두 다 허위문건들이며 조작된 가짜 재정보고 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이였다.

ㄴ. 마이클 소마레 수상이 싱기포르에서 심장병 치료를 받는데 지출된 국고금이 3백 70만 달러로 밝혀 젔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거액의 국고금을 싱가포르 병원에 지출한데 대한 첵임소재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아니 수상이 의료보험도 없었단 말인가?> <어린이와 여성들, 빈곤한 국민들은정부의 도음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병원의 문깐에도 갈 수 없는 데…> <마이클소마레 수상을 당장 감옥에 보내라> 이와 같이 쏟아져 나오는 분노의 소리들이 세계의 언론에 계속 보도되고 있다.

ㄷ. 호주와 미국은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부패정권에 대하여 모든 것을 확실히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호주는 계속하여 파푸아 뉴기니아마이클 소마레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를 계속하여 지원해 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남태평양 지역의 군소 국가들을 친미 세력권 안에 튼튼히묶어 놓기 위한 미국의 정책때문에 파푸아 뉴기니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할 수 없이 부패정권의 괴수인 마이클 소마레 수상에게 막대한 원조를 해마다 계속하여 제공해 주었다.

2007-2008년 파푸아 뉴기니아에 대한 호주의 경제지원은 480 million달러 이상 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막대한 원조는 일푼도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헤택으로 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푸아 뉴기니아는 남태평양 지역에서 민중들의 생활 수준이 제일 빈곤한 나라로 항상 기록되고 있다.

ㄹ. WikiLeaks가 폭로한 파푸아 뉴기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대사관이 미국정부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호주가 마이클 소마레 정권에게 제공한 막대한 달러는 민중을 위한 원조가 아니라 소수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특권층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라고 보고했다.

<파푸아 뉴기니아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정권은 하잘것 없는 독재자들의 집단 이다> 라고 평가하여 미국 대사는 항상 미국 정부에 보고를 했다고 WikiLeaks는 폭로했다.

ㅁ.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마이클 소마레 수상이 36년 동안 권좌에서 정권을 유지하도록 도와준 이유는 미국이 강요하는 이른바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실시하도록 하기위함 이였다.
하지만 파푸아 뉴기니아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정권하에서 실행하고 있는 이른바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마이클 소마레 수상을 옹호하는 옛동지들의 집단들 에게<권력명세표>를 제공해 주는 행사에 불과하다 라고 파푸아 뉴기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대사는 미국정부에 비밀로 보고했다고 WikiLeaks는 또 폭로 했다.

뿐만 아나라 파푸아 뉴기니아의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정권의 미래에 대한 호주 정부의 전망과 평가서를 미국 대사가 미국정부에게 보고한 비밀문건에 의하면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소마레 수상이 통치하는 한 <세대교체 희망은 절망이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마이클 소마레는 누구?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36년 동안 장수 국회 의원과 16년 6개월 동안 장수 수상으로 독재를 계속한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도대채 어떤 사람인가?

소마레는 1930년생이며 일본이 파푸아 뉴기니아를 점하고 있을 때 일본인 밑에서 가까히 지내며 교육을 받은 기록이 있다고 하여 일부에서는 친일파 인사로 알 려지기도 했다.

어쨋던 제2차 대전이 끝난후에 소마레는 호주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파푸아 뉴기 니아에 돌아와 교사와 방송국 아나운사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64년부터 소마레는 호주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공직에 종사하기 시작하였으며점차 사회봉사와 정치적 그룹을 조직하는데 관여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소마레는 1972년에 파푸아 뉴기니아의 독립을 미리 예견하면서 적극적으로 정당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정당조직들과 연대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975년 9월 16일에 드디어 파푸아 뉴기니아가 70년 동안의 호주의 식민지 통치에서 부터 해방되여 독립을 쟁취했다.

마이클 소마레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신생 독립국 파푸아 뉴기니아의 초대 수상이 됬다. 마이클 소마레는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명예를 획득하고 75세가 될때 까지 그의 명예를 보존하고 있었다.마이클 소마레는 국회의원으로 75세까지 장수의원 이였다. 그리고 수상으로 집권한 기간은 다음과 같다.

<1975년-1980년 5년간> <1982년-1985년 3년간> <2002년-2010년 8년간>
<2011년 1월-2011년 6월 까지 6개월간>

모두 16년 6개월 동안 마이클 소마레는 수상으로서 무서운 독재자가 되여 장기 집권을 했다.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뿐만 아니라 남태평양 넓은 지역의여러 섬 나라들에 까지 지독한 독재자로 그의 명성이 알려지고 있다.

마이클 소마레를 로마의 Caesar와 비슷한 독재자라고 했다. 하지만 로마의 Caesar와 다른 점이 있다. 그 다른 점은 Caesar는 암살을 당해 죽었지만 마이클 소마레는 심장병으로 죽게 된것이 다르다 라고 Dr. Ritchie는 비교하여 론평을 했다.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식민지 종주국 호주와의 관계에 대하여 <탯줄>의 관계라고 하면서 호주를 극구 찬양했다. 파푸아 뉴기니아는 호주에 종속된 국가임을 스스로 자인하면서 호주와 미국이 해마다 계속하여 제공해 주는 막대한 무상원조를 받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면서 스스로 만족해 하고 있었다.

호주와 미국은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무지막지한 독재정치에 대하여 골머리를 알코 있으면서도 해마다 원조를 계속해 주었다. 호주와 미국이 마이클 소마레 독재정권에게 무상원조를 계속하여 제공해 주는데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남태평양 여러 군소 국가들이 반미와 반호주로 전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파푸아 뉴기니아의 마이클 소마레 독재 정권권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며 오히려 튼튼히 호주와 미국편으로 묶어 놓기 위함 이다.

둘째는 파푸아 뉴기니아에 액화천연 가스가 무진장 매장되여 있는 것을 발견 했기 때문이다. 파푸아 뉴기니아에 천연가스 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이에 대하여미국이 독차지 하기 위하여 미국의 석유업체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호주와 미국은 마이클 소마레 정권에게 제공해 주는 원조액 보다 훨신 더 많은 달러를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착취와 광업을 통하여 벌어 드리고 있는 것이다.

파푸아 뉴기니아 민중들이 하루에 1.25 달러로 겨우 살아가고 있는데 대하여는 호주와 미국은 아무 관심이 없다. 미국과 호주의 석유재벌들은 앞으로 30년간 수천억 달러의 수익을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파푸아 뉴기니아의 막대한 천연 자원이 축복일 것인가, 아니면 저주가 될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호주와 미국은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절대로 손을 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미국은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독재정권을 계속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007년에 마이클 소마레 독재 정권과 호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기이한 마찰 현상이 돌발했다.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미국과 호주가 무상 원조를 제공 해주는 대가로 파푸아 뉴기니아에 대하여 지나치게 내정간섭을 한다> 라고 오히려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호주와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기를 <호주와 연결된 “탯줄”을 끊길 원한다> 라고 놀라운 충격적인 발언을 망발했다.

호주는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이와같은 돌출적인 오만한 발언을 망발한데 대하여 즉각적으로 매우 강경한 반응을 보이면서 <아멘>으로 대응을 했다.

호주는 2007년 3월에 호주의 브리즈번 공항 검색대에서 호주를 방문하는 파푸아뉴기니아 마이클 소마레 수상에게 <신발을 벗으라> 고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경색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푸아 뉴기니아는 호주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호주는 일부 공무원들의 실수라고 핑계하고 공식 사과요구를 묵살했다. 파푸아 뉴기니아의 마이클소마레 수상의 위상이 이와 같이 극도로 손상을 당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부터 마이클 소마레 정권의 재정관리에 대한 의혹이 붉어지기 시작하면서 국내와 해외에서 혼란이 이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와 미국의 유일한 관심은 파프아 뉴기니아에대한 역사적 관련성과 이해관계를 강조하면서 파푸아 뉴기니아를 독차지 하는데만 주력하고 있다.

호주와 미국은 식민지 이후에 줄곳 생존하고 있는 파푸이 뉴기니아 민중들의 분노에 대하여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폭넓게 대응해야 한다. 만일 미국과 호주가 그렇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파푸아 뉴기니아는 미국과 호주의 원조 이상의 것들을 미국괴 호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추구하게 될런지도 모를 일이다.

국제사회의 파푸아 뉴기니아에 대한 관심이 최근에 지대하다. 미국과 호주의 독점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파푸아 뉴기니아에 매장돠여 있는 막대한 천연 액화가스에 대하여 투자의 바람이 솔솔 불어 오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2. 부겐빌 섬의 폭동에 대하여


부겐빌 섬은 파프아 뉴기니아에 부속되여 있는 600여개의 많은 섬들 중에서 제일 큰 섬이다. 섬의 면적은 9,318km2 으로 중국 대만의 ¼ 정도이며 인구는 19만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이 작은 부겐빌 섬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구리광산이 발견됬다. 세계 2위의 광산업체인 <리오 틴토, Rio Tinto>가 1973년 부터 불도저를 끌고 부겐빌 섬에 상육했다.

리오 틴토는 호주의 다국적 광산업체이며 현재 런던과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여 있으며 두 회사는 일원화된 위원회에 의하여 단일 경제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리오 틴토는 2006년에 연결회전 254억 달러에 대한 순이익 102억 달러를 낸 세계 최대의 광산업체 중의 하나다. 이와 같은 거대한 광산업체가 부겐빌 섬에 들어와서 큰 굴을 뚫고 구리와 금,다이아몬드등 기타 광물들을 채굴하면서 엄청난 환경파괴를 이르켰다.

뿐만 아니라 구리 채굴을 위해 광산 근처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폭행을 저지르기 까지 했다.

부겐빌 원주민들의 항의는 폭발하여 광산 업체의 불도저 맨앞에서 결사적인 저항이 시작됬다. 원주민들은 벌목을 하지 못하도록 나무를 끌어안고 밤을 새웠다.

하지만 파푸아 뉴기니아 중앙정부는 부겐빌 원주민들의 결사적인 저항운동에 대하여 원천적으로 냉담 할 뿐이고 오히려 호주의 리오 틴토 광산업체와 협조하여 이익배당을 취하는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파푸아 뉴기니아 중앙정부가 리오 틴토 광산업체로 부터 받는 이익배당은 총이익의 19%의 배당금을 받는다. 하지만 19%의 이익배당금은 전부 파푸아 뉴기나아의 중앙정부에게 지불되고 부겐빌 원주민 민중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뿐 이다.

파푸아 뉴기니아 중앙 정부와 리오 틴토 광산업체는 부겐빌 민중들에게 환경의파괴와 생활에 막대한 피해만 쭐 뿐이고 또한 인종차별의 뿌리 깊은 원한만 안겨주고 있었다.

부겐빌 원주민들은 중앙정부에게 이익배당금의 일부를 돌려 달라고 정당한 요구를 강력히 제안 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부겐빌 원주민들의 강력한 요구를 총칼로 대응하며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결국 1987년에 분노한 부겐빌 원주민들의 테러가 발생했으며 테러는 걸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내전은 13년동안 게속하다가 2000년 3월 23일에 부겐벨 평화정착을 위하여 양측이 를 조인한 후에 임시로 끝쳤다.

13년간 내전이 계속됨으로 인하여 구리광산체굴이 중단되여 경제적 손실이 막대했으며 양측에서 1,500명이 사망했고 4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이 격화되자 파푸아 뉴기니아 정부는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리카 출신 용병 수백명을 끌어 드렸으나 문제가 제기됨으로 얼마 후에 철수시키고 말았다.

13년 동안 내전이 격심해 짐에 따라 부겐빌 미중들은 급기야<부겐빌반군, BRA> 을 1990년에 창설했다. 부겐빌 반군은 파푸아뉴기니아에 대해 독립을 선포했다.

파푸아 뉴기니아 중앙정부는 2천명 군인을 급파했으며 심지어 용병을 끌어드리기 까지 했던 것이다.파푸아 뉴기니아 중앙정부는 부겐빌 섬을 완전히 봉쇠하여 식량과 의료품과 사람들의 왕래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호주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시킴으로 본격적인 내전이 끝이 보이지 않게 지속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호주의 리오 틴토 광산업체도 파푸아 뉴기니아 군을 뒤에서 전쟁물자를 지원해 주었는데 전투용 헬리콥터, 운송 차량과 연료등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결국 1994년에 부겐빌 섬의 80%를 파푸아 뉴기니아 정부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주고 약도 주는 UN>은 1994년에 파푸아 뉴기니아-부겐빌 내전에 대하여 그저 못본척 할 수는 없었다. 부겐빌에서의 살해와 인권침해에 대하여 조사를 함으로서 문제의 심각함을 발견하 양측의 평화회담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한편 1995년에 독일 기독교 아카데미는 세게의 사회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조직단체로서 유럽 대표단을 파푸아 뉴기니아에 파견하여 부겐빌 반군과의 협상을 통하여 평화를 회복하도록 독촉했다.

1997년 7월에는 뉴질란드가 양편의 평화회담을 주선했다. 그리하여 양측 대표와 뉴지란드와 솔로몬 아일랜드의 수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른바에 서명을 하기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양측은 1998년 4월에 <내전 영구종전>에 합의하는데 공동서명을 했으며또 2000년 3월에는 에 양측이 서명함으로 부겐빌 내전은 종전이 되었다.

부겐빌 섬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13년 동안의 내전의 결과로 중앙정부의 헌법애 따라 부겐빌 섬은 전면적인 자치권을가지는 <자치주>가 되었던 것이다.

2002년 3월 27일에 파푸아 뉴기니아 중앙정부의 국회는 부겐빌 섬을 <자치주>로 승격하여 자치권을 부여하는 헌법개정안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부겐빌 섬은 1975년에 파푸아 뉴기이아 독립 후 27년만에 <자치주>로 승격됬다.
하지만 부겐빌 섬의 민중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 외세의 지배가 없는 독립국이 어느 때 완전히 성취 될지는 아직 아무도 말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3. 피터 오네일 수상의 등장으로 새시대의 문 열리는가?


친서방 독재부패 정권의 마이클 소마레 수상이 75세의 고령과 심장병의 중환자로서 16년 6개월간 집권한 수상직에서 퇴임을 하게 되었다. 그는 퇴임을 앞두고 긴급 대행자로 Sam Abal을 임명하여 그에게 정권을 넘겨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2011년 8월 2일에 실시한 의회의 투표에서 Sam Abal을 물리치고 피터 오네일, Peter O’Neil이 당선되여 파푸아 뉴기니아의 신임 수상으로 취임했다.

피터 오네일이 수상으로 취임한데 대하여 호주는 즉각 환영의 뜻을 발표했다. 왜내하면 전임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부패정권에 대하여 호주는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가 마이클 소마레 수상의 부패에 대하여 잔소리를 하면 마이클 소마레 수상은 호주에 대하여 <왜 내정간섭을 하느냐?> 라고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푸아 뉴기니아는 호주와 긴밀한 종주국과 종속국의 관계속에서 한 세기를 살아왔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서로 불편함을 내포하고 있는<동상이몽>의 관계 와 <동문서답>의 모순된 우방국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마이클 소마레의 부패한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제공을 끊치 못하고 계속하여 지원을 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밝혀진 기록에 의하며 호주는 1775년에 파푸아 뉴기니아의 독립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15 billion를 제공 했다고 한다. 하지만 파푸아 뉴기니아는 세계에서 최빈국으로 여전히 남아 있으며 학교와 병원이 전혀 없는 도시가 여전히 많이 방치되고 있다.

파푸아 뉴기니아의 신임 수상으로 2011년 8월 2일에 취임한 피터 오네일 수상은 1965년 2월 13일 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Irish 혈통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파푸아 뉴기니아의 원주민 출신이다. 피터 오네일 수상은 초등학교 교육과 대학 까지 모두 다 파푸아 뉴기니아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런던, 홍콩, 동경등지에서 금융기관과 자본 투자회시의 관리자로 다양한 직책을 해외에서 종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역시 개발업체와 국가 강철 기술회사와 강철 기업은행등 다양한 직장에서 고위급 관리업무에 종사를 했다.

그의 다양한 국가적 중요한 기관에서 관리급 공직자로 청념한 개인적 평판을 받고 있었음으로 부패로 얼룩진 파푸아 뉴기니아의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발탁되여 신임 수상으로 취임을 하게 됬다고 평가 한다.

2011년 8웡 2일에 취임한 피터 오네일 수상이 바로 한 달후인 9월 9일에 파푸아뉴기니아의 주요 상공인 회의 석상에서 행한 그의 연설을 소개한다. 지면상 제한으로 연설문 중에서 중요한 요점만을 간추려 소개한다.

ㄱ. 우리 나라는 풍부한 광물과 석유의 지하자원을 발굴하게 된것을 여러분과 나는 자랑스럽다. 신임 수상으로 취임한지 38일째가 되는 오늘 나는 우리 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여러 상공인 들에게 분명히 밝히려 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과거의 고질적인 부패청치를 척결하는 과제이다.

ㄴ. 파푸아 뉴기니아는 독립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소수의 관료주의적 정치인들의 그룹에 의하여 통치됬으며 막대한 달러가 인민들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빈부의 격차가 국가운영을 위기에 빠지게 했다.

ㄷ. 나의 행정부는 참신한 14명의 과도 내각을 조직 임명 했으며 부총리와 재무장관, 석유 에너지부의 책임 장관도 새로 선출됬다. 전체 명단을 참고하기 바란다.

나의 행정부는 과거의 부패와 부정에 대하여 대대적인 조사를 하여 수억달러의 행방불명과 횡령을 반드시 밝혀 낼것이다.

ㄹ. 외국 투자 자본 유치에 대하여 과감한 개방이 요구 된다. 하지만 과거에 잘못한 <일방통행> 외국 투자도입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주고 받는<쌍방통행>의 외국 자본 유치를 확대해 나아갈 것이다.

우리 나라는 석유 외에 금, 구리, 백동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여 있다. 나의 행정부는 외국자본 유치에 대하여 문을 활작 열어 놓고 그 어느 나라던지 공정한 투자원측하에서 상호 이익을 위한 투자국이라면 어느 나라던 차별 없이 수용할 것이다. (연설 끝)

피터 오네일 신임 수상의 연설 중에서 “과거의 부패부정 척결”을 강조한 것은 전임자 마이클 소마레 수상에 대하여 1990년- 2010년 20년 동안의 의회 재정보고가 허위와 거짓으로 판명되여 의회가 재조사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대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피터 오네일 신임 수상이 연설에서 외국자본 유치원측을 강조한데 대하여 팔자는 한가지 질문을 한다. 오넬 수상이 참신한 내각 14명을 새로 임명하고 석유장관도 새로 교체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전임 마이클 소마레 수상 정권하에서 Tienstain 장관, Pruaitch 장관 그리고 소마레 수상의 아들인 Arthur Somare등 3인이 2014년을 만기 해로 정해 놓고 ExxsonMobil과 $13 billion의 자금유통 계약을 임이 맺고 있는데 대하여 피터 오네일 신임 수상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또 어떻게 처리를 할 것인지를 질문한다.

파푸아 뉴기니아 민중들의 비참한 빈곤과 비극은 부패한 지도자들이 국가자본의 막대한 수익을 불법적으로 삼켜 버림으로서 지금까지 원조와 개발 수익들은 모두 다 <밑빠진 항아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파푸아 뉴기니아는 독립 이후 36년 동안 냉전 체제속에서 친서방 친미 독재정권의 깊숙한 곳까지 부패가 참투해 들어가 있다.

새로운 피터 오네일 수상의 정권이 등장하여 만일 낡은 부패를 깨끗하게 척결하지 못한다면 외국자본의 개발 수익을 또 다시 그 누가 훔쳐갈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2011년 8월 2일에 마이클 소마레의 17년간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새로 등장한 피터 오네일 수상 정권의 새 출발에 대하여 우리 모두의 기대와 관심은 지대하다.

이글을 끝 맺으며,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나라의 순박한 사람들이 자연의 경치속에서 지상낙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서구의 침략자들이 마구 침입해 들어와서 300년 동안이나 순박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착취를 헀다.

섬 사람들이 독립을 쟁취한지 겨우 반세기도 되기 전에 이번에는 그 곳에 천연가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침으로 땅 밑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런데 그 불이 수백억 달러가 되여 미국의 지배자들의 배만 불리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섬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ExxonMobil은 파푸아 뉴기니아에 150억 달러를 투자계획을 승인 받았으며 30년 후쯤에는 지금의 3배로 늘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상 돌아가는 환경과 조건하에서 순진한 토박이 원주민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파푸아 뉴기니아 우리 정부와는 더 이상 거래하고 싶지 않고 차라리 ExxonMobil과 땅 소유자인 우리가 직접 협상하겠다> 라고 주장하는 요지경에이르고 있다.

지난 날에 호주와 영국이 지원해 준 마이클 소마레 정권이 그 얼마나 부패했는 가를 그대로 말 해 주고 있다. 부패, 부패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부패의 실레를하나 직접 들어 보자.

파푸아 뉴기니아의 어느 한 지방 책임자에게 외국 기업의 보상금으로 12만 달러를 지불했다. 보상금의 조건은 경찰서 건축과 지방 도로포장용 이였다.

하지만 이 지방 책임자는 12만 달러를 10명의 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돼지 48마리를 샀다. 그리고 또 이 책임자는 15세 소녀를 11번째 신부로 데려오기 위하여 되지 30마리 값을 소녀의 부모에게 지불했다.

그런데 12만 달러 사용에 대하여 정부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불문에붙치는 것이 제도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소마레 수상이 20년간 의회에 제출한 재정보고가 완전이 허위문서이며 거짓이였다는 사실을 가히 알 수 있다.

2010년 3월에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파푸아 뉴기니아를 방문하였는데 마이클 소마레 수상이 이끄는 정부의 부패에 대하여 우려하는 발언을 했다. 그녀는 말하기를 <미국은 파푸아 뉴기니아의 부정척결과 인권 향상을 위하여 도와줄 준비가 되있다> 라고 헛소리 같은 발언만 하고 파푸아 뉴기니아를 떠나갔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파푸아 뉴기니아에 대하여 실낱 같은 희망을 가져 보기 바란다. 그것은 피터 오네일 신임 수상이 집권을 시작한지 한 달만에 행한 그의 연설중에서 발언한 구절에 의해서 이다.

<오늘 나는 우리 나라의 고질적인 부패정치 척결이 첫번째 과제임을 밝힌다>

<외국 투자는 과거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반드시 주고 받는 “쌍방통행”이 되야 한다>

<나의 행정부는 외국 투자의 문을 활작 열어 놓고 어느 나라든지 정직한 투자를 하는 나라들을 수용하겠다>

피터 오네일 수상이 그의 연설에서 밝힌 것은 과거에 미국에만 예속된 일방통행의 외교정책을 과감히 탈피하여 중국을 비롯한 동방외교의 문도 활짝 열것으로 예상된다.아뭏든 이 나라도 더 이상 열강들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로서 자기 국민들을 위하여 진실로 복무하는 정부가 굳건하게 세워질 것을 바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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